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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생태주의?
들어가며
개인적인 경험으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가 ‘환경’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지나치는 의미가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단순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교과서 한 켠에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 이야기 했고, 또 한 켠에는 개발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미적지근한 말로 보전과 개발의 가치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고요. 그 이율배반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라는 단어의 용법이 그 자체로 목적이지 않고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해져 있는 것 같았고, 그럴 바에야 교과서에서 ‘생명은 소중해요’ 식의 가식은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대상이고, 공존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이익에 도움이 될 때까지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걸 테니까요.
가치의 계량화 - 대상화
이 사회에서 한 존재의 가치가 다른 존재를 위해서 매겨져 버리는 상황을 많이 겪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노동자들은 기업을 위해서 일해야 하고(그래서 파업은 끔찍한 범죄이고), 여성의 역할은 가정을 돌보는 것으로 규정지어집니다.
생명, 환경이라는 가치 또한 비교 가능한 크기로 계산 되어 다른 가치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태계 종 다양성을 보존해야 하는 것은 그것들의 유전자가 앞으로 많은 경제적 가치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고, 습지를 보존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홍수 조절 능력이 있고 식량생산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류의 이익을 위해(혹 국익을 위해) 황우석씨의 복제 실험을 열렬히 지지하던 정치인과 언론의 모습이 있지 않았던가요. 그네들에게는 황우석씨의 복제 실험을 통해 얻을 어떠한 이익과, 그 실험으로 인해 짓밟힐 생명존중의 가치 중 어느 편이 더 클까라는 계산이 이미 세워져 있는 것이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환경’이라는 가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감각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지내온 그 존재들이, 그 존재자체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까, 그 ‘환경’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고요. 또한 그렇게 환경이라는 가치를 지켜냈을 때 많은 이들의 삶이 더욱 윤택하게 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어서는 안될 거라구요.
그리고 저는 이게 다른 영역의 억압받는 존재들과 밀접하다고 생각해요. 개발이라는 가치 속에서 저항한 번 못한 채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무감각한 현실과 동일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많은 경우 환경의 파괴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같이 앗아갑니다.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경우 ‘님비’, ‘집단이기주의’ 등의 딱지를 붙이며 마치 사회의 공익을 해치는 마냥 마녀사냥을 하곤 하죠. 그들이 얻게 될 고통보다 개발을 통한 전체의 이익이 더 크므로 고통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기업의 이윤을 위해 묵묵히 일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어떤 존재를 계량화(수단화, 대상화)할 수 있다는 사고가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가치관의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신의 가치를 그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잣대를 통해 규정하게 되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상대적인 가치평가 속에서 그 가치는 언제든지 다른 가치에 의해 뒷 순위로 밀려날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까요.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치환하고 비교하는 합리적 이성의 방식은 단지 ‘환경’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 모든 부분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환경’, ‘생태주의’를 고민하는 첫 번째 지접은 바로 여기에서 부터에요. 앞서 교과서 이야기를 꺼냈듯이, 그런 이율배반이 가장 극렬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환경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생태주의’를 딱히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인간을 중심으로(자신을 외부 대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 그 전체를 바라보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해요. 여기에서 ‘환경보호’등에서 쓰이는 ‘환경’이란 단어의 용법과 ‘생태주의’가 등치되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어쩌면 ‘생태주의’는 ‘환경’이 이미 ‘나’와 분리된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일거에요.(아, 물론 그 ‘환경’이라는 단어를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포함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제가 이야기 하는 건 주로 관변단체나 기업 등에서 이야기 하는 ‘환경’이에요. 그네 들이 운영하는 ‘환경캠프’ 같은 것들의 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분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게 쉽게 느껴지거든요.) 생태주의는 어느 것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기도 해요. 더 잘생기거나, 더 못생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입이 좀 튀어나왔고, 눈이 큰 편이고, 눈썹이 짙은 한 개체가 존재 하는거에요.
하지만 환경을 이야기 하는 많은 사람들, 환경단체들이 사실 ‘환경’에 대해 기능주의적(이러이러한 가치가 있으니까 보호해야 한다)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이렇게 접근하면 그네들이 이야기 하는 환경보호의 논리가 얼마든지 다른 이익(특히 자본의)의 크기에 따라 흔들릴 수 있을거에요.
한 사례를 들면,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매우 좁은 공간만 남기고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환경단체들과 부안 주민들은 함께 방조제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 둘의 입장이 서로 달랐는데요, 환경단체에서는 ‘신구상안’을 제시하며 현실적으로 정부가 수용할 수 있도록 방조제를 유지하되 갯벌의 20%는 버리더라도 80%를 살릴 수 있는 방법, 새만금 방조제를 이용해 관광 등 경제적으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이야기 했고, 주민들은 무조건 방조제를 터서 해수를 유통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환경단체들은 주민들을 생각 모자란 답답한 사람들로 취급했지만, 정말 그럴까요.
결국 어느 편의 이야기도 들어지지 않긴 했지만, 설령 환경단체의 안이 들어졌다 하더라도 과연 개발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한국의 전체적인 상황이 변할지 의문이에요. 중요한 건 ‘새만금사업’ 그 자체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극이 다른 곳에서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치관의 변화니까요.
제가 사는 전북지역은 70-80년대 개발정책에서 분명 소외(?)된 곳입니다. 그럴듯한 공단도 없고 도시의 규모나 시설 모두 다른 지역에 비해 못하거든요. 하지만 그 현실을 마치 문제인 것 마냥 부추기는 집단,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고 극복해야할 상황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곳과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확장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요. 설사 그 욕구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다른 존재의 권리를 빼앗는 것일지라도, 마치 집단 최면에 빠진 양 그 부당함에 대해 서로 침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도시, 핵폐기장을 유치해서 지역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가 전라북도(도지사 및 말단 공무원까지를 포함한 공직자 사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될 수 있고,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물리적 테러를 가하는 단체가 등장하는 상황까지 만들어져요. 이런 개발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 하는 수단으로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전북 발전 음해세력’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전북사회의 공적이 되고 어떠한 발언도 못하게 되거든요.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해수유통을 요구하는 새만금 주민들도, 핵폐기장에 반대하는 군산사람들도, 기업도시에 반대하는 무주사람들도 - 모두 ‘전북발전 음해세력’이고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개발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여론을 조작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몸짓들을 철저히 가로막습니다. 이건 비단 전북지역만의 이야기가 아니겠죠. 한 존재(혹 가치)가 다른 존재를 위해 전유될 수 있다는 반생태주의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과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자는 데에 조금 더 보태서, 환경(자연)이라는 대상과 인간을 분리해 인식하는 시각을 넘어서려는 입장도 생태주의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환경(자연)을 자신과 따로 떨어트려놓고 그것에 개입하지 않은 채 보호하려는 태도는, 환경(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도구적으로 이용하려는 입장의 거울에 비친 모습일거에요.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구분짓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애-비장애의 구분을 만들어 내는 장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을 토대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처럼요. 본래 서로 다른 무수한 개체가 있는 것이고, 인간-자연(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 장애인-비장애인 등)으로 묶을(구분지을) 수 있는 잣대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장치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설명이 현실을 더 잘 반영하는 듯 해요. 서로 다른 개체를 같은 이름으로 묶어 부르는 것(동일성), 또한 어떠한 개체를 그 이름에서 제외시키는 것(타자) - 제가 생각하는 생태주의가 도달하는 또 하나의 문제제기에요.
생태주의 <-> 자본주의
제가 생태주의의 입장에 서는 두 번째 지점은 자본의 가치가 생태적 삶의 가치의 저 극단에 있기 때문이에요. 가치가 저평가 혹은 비평가 되는 노동(가사노동, 육아노동, 감정노동 등)이 자본의 이윤을 확장시키는 방편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가공의 대상을 제공하지만 그 존재가치를 무시당함으로서 상품경제를 유지하게 합니다.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을 때 상품이 만들어질 수 없지만, 역시 가공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상품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사실은 쉽게 망각되곤 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항상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더 많은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행위는 우리의 욕망이기도 하지만 자본이 원하는 욕망이 투사된 것이기도 합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하고, 그 욕망을 소비하도록 이끕니다. 저는 ‘자전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어렸을 적엔 페달과 브레이크만 잘 작동하면 신나게 타고 다녔던 자전거가 요즘은 앞뒤 쇼바는 기본으로 포함하고 다양한 방식의 부가기능들로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이 사회의 여러 장치들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기능들도 그것이 기본적인 것인 마냥 생각하도록 만들고, 욕망의 기본수준이 꾸준히 상승하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소비는 자연히 자원 사용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또한 욕망의 소비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번 소비된 것이 공공재로 전환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더 단순하게 적자면 - 내가 산 물건은 내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와 같이 쓸 필요가 없다 - 이겠지요.)
어느 시점의 사용가능한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현재와 같은 방식의 자원 사용이 확대되는 것은 그 시점에서 공공재의 축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공공재의 축소는 전체 자원에 대해 내가 쓸 수 있는 비율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10의 자원이 있을 때 그 중 9가 공공재라면 나는 9를 쓸 수 있는 것이지만 10의 자원 중 사적인 소유가 1이고 공공재가 없다면 나는 그 1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절대적 양이 증가한다고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용방식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거에요. 생태주의는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고민이고, 이는 공공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포함합니다.
자전거의 예를 다시 들자면, 어떤 사람이 하루 중 자전거를 타는 시간이 1시간이라면 나머지 23시간은 그 자전거가 아무런 사용가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전거 보관소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는 그 순간에 고철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그 자전거를 아무나 탈 수 있게 놓아둔다면 - 그 자전거가 하루 중 이용되는 시간이 늘어나겠죠.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워놓지 않는다면 - 세워져 있는 아무 자전거나 타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 이동한 다음 다른 사람이 탈 수 있도록 그곳에 세워놓고.... 그렇게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자전거로, 훨씬 많은 사람들이 더 풍요롭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전체 자전거에 투입되는 자원도 훨씬 줄일 수 있을테고요.
자본주의의 상품경제는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도록 만들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그 분리의 정도가 커집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소비하고, 만드는 이 또한 누가 소비할지 모르는 채 만듭니다. 그 거리는 점점 멀어져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것을 소비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특히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에서 많은 문제를 만듭니다. 식품에 농약을 치고 방부제를 넣고 색소를 입히는 등의 일을 죄책감 없이 서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소비할 대상이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소비하는 사람들 또한 끊임없이 먹을거리에 대해 의심하고 그것은 ‘웰빙’이라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한 몸 지키기 위한 웰빙은 상황을 전혀 변하시키지 못했고, 단지 고급 먹을거리를 생산하도록 부추기고 소비의 양극화만 만들었을 뿐입니다.
또한 대량생산 체제는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판매를 위한 생산을 전제하고 있고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더 중요시하여 팔리지 않는 상품은 그대로 폐기하기 까지 합니다. 채소 값이 폭락하여 작물이 있는 밭을 그대로 갈아엎는 모습은 단적인 예입니다. 그것들을 팔기 위해 기른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기른다면 - 생산의 전제를 바꾼다면 그렇게 작물들을 갈아엎는 일이 발생할까요? 가져가고 싶은 사람이 와서 그 작물을 가져가게 해도 될련만, 그것을 폐기할지언정 나누지 못하게 하는 게 현재 생산방식입니다. 한 편에는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또 다른 어딘가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에 작물을 폐기해 버리는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는 가축을 사육하는데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축들은 화폐를 지불 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소비되기 위해 길러집니다. 그 곡물만 굶주리는 이들에게 돌아가더라도 기아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굶어 죽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더라도,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원을 투입하지 않는 잔혹함이 바로 소비사회의 진실입니다. 우리의 소비가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동체적인 삶의 질문을 생태주의는 던집니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빠르고, 강한 것이 우월하고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습니다. 항상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빠름’과 ‘강함’, ‘큼’의 가치로 포장해야 합니다. 어느 만큼의 성과를 얻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고, 그 경쟁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아동, 장애인, 노인, 환자 등)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되거나, 자기결정권이 축소됩니다. 끊임없이 ‘발전’할 것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은 ‘느림’과 ‘작음’의 가치를 낙오와 도태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사회적 시간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자연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흐르고 있고, (문명의 이기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을 조절할 줄 모르거나 할 수 없는 존재들은 이 경쟁에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빠름과 힘센 것이 무조건 부정적인 가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치들과 비교되어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 상황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위를 부여했을 때 어떠한 상황이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상황이 공동체를 행복하게 하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 대해 대안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 -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생태주의는 ‘느림’과 ‘작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외되어 있는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여야 진정 모두가 존중받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생태주의는 느린 삶, 보잘 것 없는 삶, 모자란 삶을 보듬어 안습니다.
나가며 - 친환경개발(?!) = 생태자본주의 = 민주적 독재정권 =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뷁스러운 상황들
생태주의를 환경에 대한 보호 정도로 협소하게 접근하면 다양한 문제의식을 갖추기 어렵습니다. 사실 이 글에서 ‘환경’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지만, 저는 지금도 ‘환경’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먼저 느껴지곤 합니다. 육식을 못하겠고, 동물의 모피는 못 입겠다하면서 굶주리는 이들의 아픔에는 관심한 번 가져봤을 까 싶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해서요. 그 이들이 생명에 대해 갖는 감수성은 존중해야겠지만, 그런 감수성조차도 자본주의적 가치(더불어 사는 자본주의)로 전용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터는 ‘친환경-개발’이라는 말을 개발을 추진하는 당사자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덜 수탈하는 개발-발전은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개발-발전은 반드시 누군가의 삶을 제물로 삼아야만 가능한 가치입니다.
물론 모든 존재들이 서로 맞물려 살아가야 하고, 어떤 존재도 다론 존재의 삶을 이용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당장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전에는 그 맞물린 삶의 과정에서 다른 존재에게 이용당하는 존재에게도 자신의 삶이 있었고, 이용하는 존재 또한 어느 순간에는 다른 존재를 위한 순환에 함께 했다면, 지금은 그 고리가 단절되어 특정한 존재를 위해 나머지 존재들의 삶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이용이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한 ‘전유’이고, ‘수탈’입니다. 그리고 ‘친환경-개발’이라는 관계 속에서도 ‘환경’은 어디까지나 수단으로서 위치지어지고, 개발은 그 자체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 ‘환경’ 뿐만이 아닌 다른 가치들도 아래에 복속시킵니다.
‘생태-자본주의’가 불가능한 단어이듯이 ‘친환경-개발’도 성립할 수 없는 모순어법입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져간 새만금 갯벌에서 ‘아픔과 사랑이 공존’하는 축제를 만들자며 커다란 락페스티발을 준비하고 있고, 그것에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구체적인 실천 없이는 사태가 반복될 뿐입니다.
생태주의적인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삶의 양식을 바꾸는 자기로부터의 변화여야 합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생태주의에 대한 고민을 같이 풀어나가면 좋겠어요.
덧) 소수자 투쟁 선언 中
이제 만물이 소수자입니다. 물과 흙바람이 소수자이고 뻘의 조개와 들판의 곡식이 소수자이며 농민과 노동자 청년 여성 장애인 학생 예술인이 소수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소수자입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에서 싸우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서 있는 그곳에서 싸우십시오. 물과 흙, 바람이 싸우는 곳에서, 뻘의 조개와 들판의 곡식이 싸우는 그곳에서, 농민과 노동자, 청년, 여성, 장애인, 학생, 예술인이 싸우는 그곳에서, 만물이 소수자로서 투쟁하는 그곳에서, 당신도 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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