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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 노동자 대회의 역사와 의미

인학련 2003.10.21 22:51 조회 수 : 649

노동자 대회의 역사와 의미
< 2003 전국노동자대회의 목표 >


1. 명칭

비정규직 차별철폐·국민연금 개악 저지·노동탄압 분쇄·파병반대·WTO 반대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3 전국노동자 대회


2. 목표

- 전국노동자대회 조직 과정을 통해 현장의 조직력을 강화한다.
- 10만 노동자대회 성사로 침체된 분위기를 일소하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반전의 계기로 삼는다.
- 재신임 정국에 맞서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반민중적인 정책을 폭로하고 총체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강력한 투쟁전선을 구축한다.


3. 노동자대회 주요 요구

-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화와 차별철폐를 위한 제도개혁 실시
- 국민연금 개악 저지와 세제·재정 개혁
- 노동탄압 중단 및 노동3권 강화
- 반전·반세계화 투쟁


4. 대회기조

- 참가한 조합원은 하나 이상의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원들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를 만들어 낸다.
- 서울시내 전역에서 우리의 요구를 알리고, 10만 이상의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든다.



< 노동자대회 역사와 의미 >

민주노총은 매년 11월 전태일열사의 기일은 11월 13일 전후한 전국추모 주간에 노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전국노동자대회는 전태일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해의 사업을 평가하고, 하반기 투쟁을 위한 새로운 투쟁의지를 다지는 자리이다.
전국노동자대회는 1988년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로 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전국 5만명이 집결하여 진행한 노동자대회는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어용노조와 정권탄압에 맞서, 투쟁하던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민주노조운동을 전국조직 건설로 나아가게한 밑거름이 되었다.


[1987년]

해방 이후 40여년간 군부독재와 어용 노조에 짓눌려있던 노동자들은 1987년 7·8·9월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3개월간 3,300여개의 사업장에서 파업투쟁이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려 1,300개의 신규노조가 건설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8월에는 평균 400여개의 쟁의가 진행되었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터지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8월 한달간 하루 평균 22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건설되었다.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억압과 굴종을
거부하는 이 땅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던 것이다.

[1988년]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전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건설된 민주노조들은 그 뒤 상반기 임 금·단체협약 투쟁 과정에서 지역별 연대투쟁을 전개하여 '마산·창원 노동조합 총연합'을 필두로 각 지역에서 노동자
연대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87년 노동자 투쟁에 놀란 노태우 정권이 노동자의 힘을 누르기 위해 노동법개정을 단행하고, 연행·구속 등 노동자탄압을 자행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전국 모든 지역과 업종조직을 망라한 <전국 노동법 개정 투쟁 본부>를 구성하게 된다.

'전국 노동법 개정 투쟁 본부'는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개정 전국 노동자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대회에 앞서 10월 9일 <노동법 개정 투쟁 전국 노동자 등반대회>를 개최하였으며, 화왕산(영남지역), 대둔산(호남지역), 북한산(수도권지역)에서 진행되어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였다.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 강당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전국의 5만여 명의 대중이 결집하여 당시로서는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연세대부터 여의도까지 행진하는 행렬의 첫머리에는 노동자들이 피로 쓴 노동해방 깃발이 자리를 잡았다. 여의도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 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1) 전야제 (전노협 백서에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저녁8시에는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이 열려, 수상자인 권용목을 대신해 권처홍 아버님이
수상하였다. 밤11시에는 조합원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인천지역의 허재호(인천 일용공 노조 소속)가 1등인 노동해방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밤11시에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전국 100여 곳의 단위 사업장 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하여 11월13일 대회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으며, 11월13일 새벽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가 계속해서 도착했는데, 새벽3시경에는 마창지역 노동자들 800여명이, 다음날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600여 명 등 각지에서 연세대로 속속 집결하였다.

2) 본대회 (전노협 백서에서)
본대회에 앞서 오전10시에는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가 사전결의 대회로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5,000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대회 입장식은 한시간 이상 소요되었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분란하게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쳤다. 또한 집회를 마친 후, 녹십자병원을 비롯한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악법철폐, 민주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 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후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대략 5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오후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각 대오별로 ‘노동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개최되었고,
귀가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백골단의 폭행에 맞서 영등포역 앞에서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다.


[1989년 이후]

'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거치면서 각 지역에서 흩어져서 투쟁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하나로 모여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고 나자 전국조직 건설에 박차가 가해졌다. 이는 곧 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건설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91년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 93년 6월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라는 조직의 건설로 한 단계 나아가고, 노경총 합의 반대투쟁, 한국노총 탈퇴투쟁, 노동법개정투쟁, UR반대투쟁 등을 거치면서 95년
11월11일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이 주축이 되어
1,048개 노동조합 420,409명 노동자를 포괄하는 민주노총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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