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에서 학생 평의회로
- 관악 27호 유재명 -
사실, 학생회에 대한 이러저런한 글들은 지겹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생회에 대한 글을 또 쓰는 이유는? 더 이상 학생회에 대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다. 무슨 소리인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될 것이다.
학생회에 대한 소고
많은 사람들이 학생회란 ꡒ당연히 있는 것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학생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에 대한 수 많은 의견들이 이런 ꡒ당연함ꡓ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학생회가 별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오늘날 한국 대학의 학생회란 80년대라는 시기에 주어진 상황에 맞춰 운동권들이 발명한 조직이다.
운동권들이 발명했다니? 이상한 소린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80년대 초반까지 학생회란 없었다. 그 한참 전에야 있긴 했지만 한동안 대학에 학생회란 건 없었다. 요즘 단대 학생회들이 보통 20대, 21대인데 이게 증거다. 2003에서 20을 빼보면 83이 나온다. 이 때가 바로 학생회를 만들던 시기다. 보통 그 배경으로 드는 게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ꡐ유화조치ꡑ다.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때처럼 힘으로 억누르기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대학에 숨통을 틔워준다. 단적으로 대학 내에 상주하고 있던 전투경찰 병력을 뺀다. 이 때부터 많은 대학에서 학생회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당시 학생 운동의 중심은 지금처럼 학생회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의 중심은 ꡒ써클ꡓ이라 불리는 비공개 조직들이었고, 이들 조직들이 서로 협의해서 학생운동을 이끌어갔다. 당시에 45명인 과에서 1학년 43명이 이런 저런 써클들에 가입되어있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이런 써클 중심의 학생운동은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일단 써클들끼리 협의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한 학교 안에도 수 십 개의 써클이 있는데 여러 학교가 함께 뭔가를 하려면 골치가 아픈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학교 간의 비공식적인 채널이 존재했다. 이 역시 비효율적이었음은 더 말할 이유가 없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한 학생회가 완전히 발명되는 건 80년 대 후반에 가서부터다. 당시까지도 한국에서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하기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등등한데 그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80년대 학생운동 문건들을 보면 ꡒ당건투ꡓ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ꡒ당 건설 투쟁ꡓ의 준말인 당건투는 당시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 실천적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단 당시 운동권의 최대 과제였다. 왜냐하면 전체 운동을 총괄하는 정치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이런 당시 상황에서 학생운동권이 선택한 최고의 해답이었다.
80년대 말 학생회를 발명한 것은 민족해방파 학생운동이었다. 이들이 발명한 학생회는 전대협(전국 대학 대표자 협의회)이라는 조직 형식을 통해 완성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건데 전대협 중앙에서 뭔가를 결정 내리면, 그 결정은 순식간에 서울, 경기 등 지역 조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광역 단위 조직에서 다시 서울로 치면 서울 남부, 동부, 서부, 북부 등의 지구 조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지구 조직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로 그리고 총학생회에서 단대 학생회로, 단대학생회에서 과 학생회로 중앙의 결정은 순식간에 파급된다. 써클 중심의 학생운동이 시골길이라면 전대협 체계는 고속도로를 뚫은 셈이다.
써클은 불법이 될 수 있어도 학생회는 어찌됐거나 학생들이 선거로 구성한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기가 편하다. 최소한 경찰한테 안 쫓겨 다니면서 학생운동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선거로 선출한 학생회장들은 학생들에게 권위도 인정 받을 수 있다. 이래저래 학생회란 좋은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발명된 학생회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선거란 구실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학생회 선거에서 채택하고 있는 투표 방식은 세상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단순 다수득표제다. 한 마디로 딱 한 번 투표해서 제일 많이 득표한 사람이 당선된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도 이렇게 치르니까 대부분 무감각했지만 얼마전에 민주당에서 선보인 선호투표제처럼 훨씬 더 투표자들의 의사를 잘 받아들이는 투표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가장 비민주적인 단순 다수득표제를 채택했냐하면 사실 학생회 선거란 요식절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단순 다수득표제는 모든 투표 방식 중에 가장 간단하고 손이 덜 간다. 어차피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투표 방식이 복잡해봐야 일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에 딱 한 번 투표로 선출된 학생회장은 1년 내내 학생회 운영에 대해 전권을 누린다. (투표 방식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 ꡒ역시 제목 미정ꡓ에서 다루겠다.)
학생회란 이렇게 발명된 것이었다. 사실 학생회 운영이 비민주적이니 뭐니 투덜댈 이유가 없는 게, 애초에 학생회란 그런 목적으로 발명된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 중앙의 방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체계일 뿐인데 민주적일 필요란 애시당초 없었다. 그런 점에서 비운동권 학생회란 일종의 코미디일 수 밖에 없다. 80년대에 운동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조직을 가지고 2000년대에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운동권 학생회도 역시 코미디다. 지금은 80년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회 체계의 붕괴
이렇게 발명된 학생회의 좋은 시절은 몇 년이 못 가 끝나고 만다. 학생들이 4년 주기로 싹 바뀌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의 변화란 그만큼 빠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들어서 민족해방파와 함께 학생운동을 양분하고 있던 민중민주파 학생운동도 학생회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학생회는 전국 중앙의 결정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전국에서 지역, 지구까지는 결정 사항이 잘 내려오다가 중간에 민중민주파 총학생회까지 오면 이 결정이 딱 끊어져버린다. 경부고속도로로 치면 대전쯤에서 도로가 끊어진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우회로를 뚫어야 한다. 그래서 ꡒ수임자ꡓ라는 요상한 체계가 만들어진다. 민족해방파가 총학생회 선거에서 떨어지면 단대 학생회 중 하나가 총학생회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즉 지구 조직에서 총학생회로 결정 사항이 전달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총학생회를 뛰어넘어서 단대 학생회로 바로 넘어간다. 고속도로에서 중간에 국도로 갈아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갈아타는 기묘한 꼴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민중민주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총학생회에 당선되도 단대 학생회에 떨어지면 역시 과학생회로 바로 넘어가야 했다. 이 때부터 민족민주파와 민중민주파는 서로 우회로를 열심히 뚫기 시작한다. 게다가 민중민주파를 크게 묶는 노선, 즉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무너지면서 과거 민중민주파로 묶을 수 있었던 여러 세력들이 또 각자 우회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민족민주파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면서 이들도 제각각 우회로를 만들어댄다. 결국 고속도로는 수 많은 국도와 지방도로 심지어 비포장도로로 만들어진 복잡하고 산만한 체계가 되고 만다. 학생회의 가장 큰 장점이 사라진 것이다.
학생회 체계가 완전히 산산 조각 난 건 90년대 후반이었다. 90년대 중반에 연세대와 한양대에서 있었던 일들로 인해서 전대협에 이은 학생회 체계인 한총련(한국 대학 총학생회 연합)이 산산조각 나고 민족민주파를 제외한 모든 학생운동 세력들이 사실상 한총련에서 탈퇴하자 고속도로는 명목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제 각각의 학생운동 세력들은 자신만의 고속도로를 뚫어대기 시작한다. 이런 고속도로들이 지금 있는 전학협(전국 학생회 협의회), 연대회의(전국 학생 연대회의), 전학대협(전국 학생 대표자 협의회) 등의 단체들이다. 그러나 1Km짜리 고속도로를 본 적이 있는가? 한총련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전국에서 과까지 이어지는 선을 구성한 단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지방도로와 국도로 난립한 괴상망칙한 체계 속에 뒤엉키게 되었다.
그 결과 학생회는 이름만 학생회로 남게 되었다. 학생회의 일상적인 의결 기구는 운영위원회라는 회의다. 총학생회의 경우 운영위원회는 총학생회장단과 단대 학생회장들이 모여서 구성한다. 총학생회장과 단대 학생회장이 모두 같은 정치세력일 때 운영위원회란 총학생회장이 단대학생회장들에게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다음 날 단대 학생회 운영위원회를 하는 게 보통인데 그래야 총학생회에서 받아온 지침을 단대 학생회장들이 과 학생회장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총학생회장은 물론 단대 학생회장들이 전부 서로 다른 정치세력인 현재의 경우다. 운영위원회는 별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없어졌다. 결정해도 아무도 따르지 않게된 것은 물론이고. 총학생회장과 소속이 다른 단대학생회장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뭐라고 결정이 나건 어차피 별도의 우회로를 통해 내려오는 자기 조직의 입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운영위원회는 점점 유명무실해진다. 지금 운영위원회는 기껏해야 말싸움이나 하는 자리거나 아니면 적당히 학생회비를 타쓰기 위해 합의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학생운동의 학생들에 대한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게 약화되면서 학생회는 점점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조직으로 전락한다. 즉 총학생회-단대학생회-과학생회를 엮어주는 고리도 다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로부터도 버림받자 학생회는 그냥 각각의 운동권들의 거점으로 전락하게 된다. 학생회는 안팎으로 고립된 것이다. 내우외환이라 하겠다.
그나마 학생회에 운동권들만 있으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른바 비운동권들마저 끼어들면서 사태는 복잡해진다. 운동권들끼리 모이면 그래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좀 있겠는데 학생운동에 반대하거나 또는 관심없는 이들이 끼어들자 학생회는 운동을 위한 공간으로서도 전혀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지금 있는 학생회들은 이름만 학생회일 뿐이다.
학생회의 모순 하나 - 당선된 자 마음대로, 민주주의는 없다.
그럼 학생회가 이제 운동 공간으로 별 쓸모가 없으니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된 박경렬 총학생회장 말대로 운동권들은 모두 학생회를 떠나야 하는 걸까? 그게 또 아니다. 왜냐하면 떠나야 하는 건 운동권이 아닌 박경렬 씨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박경렬 씨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 학생회는 그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박경렬, 홍상욱 씨를 후보로 내세운 ꡒ학교로ꡓ 선거운동본부(이하 ꡒ학교로ꡓ)이 주장한 내용은 현재 학생회 구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 학생회는 80년대 운동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체계인데 거기에서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일들을 하겠다는 건 상복 입고 잔치가는 꼴이다.
ꡒ학교로ꡓ를 비롯해 많은 비운동권이 주장하는 요지는 ꡒ운동권 학생회는 학우들의 요구를 잘 반영하지 못하니 우리가 학우들이 원하는 걸 하겠다.ꡓ 이런 거다. 문제는 운동권이건 비운동권이건 ꡒ학우들이 원하는 걸ꡓ 할 수도 없는 학생회 체계에서 말로는 그렇게 하기 쉬워도 사실 누구든지 결국 학우들이 원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걸 할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일단 제일 큰 문제는 학생들이 학생회 운영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통로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
결국 총학생회는 학생회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 외에는 학우들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이 없다. 다른 건 하나도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학생회에서 아주 좋은 일을 하나 하기로 했다고 하자. 총장잔디를 잔디밭 대신 꽃밭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하자.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아무도 공약으로 낸 적이 없다. 따라서 학생들이 여기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알 길도 없다. 총학생회에서 여론조사를 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참고로 할 뿐이지 하고 말고는 총학생회 마음이다. 그러니 총장잔디를 꽃밭으로 만드는 이 좋은 일도 총학생회가 한다면 그건 월권이다. 예를 이렇게 드니까 무척 이상한데 좀더 현실감 나는 예를 들어보자. 지난 45대 총학생회는 여러 가지 공약을 냈다. 그런데 실제로 2002년 내내 한 건 교육투쟁 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총학생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섭섭해 하겠지만, 총학생회장이 학교에서 잘리는 상황 속에서 교육투쟁을 열심히 한 45대 총학생회 집행 간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수고했다고 이해하기 바란다. 문제는 45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2002년 교육투쟁에 관한 공약은 없었다. 물론 있기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건 아니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46대 총학생회를 구성하고 있는 ꡒ학교로ꡓ측은 등록금 인상에 대해 자세한 공약을 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게 등록금 인상 문제는 총학생회 선거가 끝나야 대충 윤곽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등록금 인상 등 교육투쟁 사안에 대해 단 한 번도 학생들로부터 검증받지 않은 총학생회가 교육투쟁을 주도하게 되어있다는 문제다. 즉, 다른 사안들에 대한 지지를 받아 학생회에 당선된 사람이 그 사안 외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도 관할하게 되어있는게 문제라는 얘기다.
물론 총론에서 지지를 받았으니 각론은 총론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세상 일이 또 그렇던가. 학생회 선거 때도 이 정책은 여기가 더 마음에 들고, 저 정책은 저기가 더 마음에 드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그래서 정책투표제 하자는 얘기도 나오는 거고. 사실 학생회 선거는 전혀 다른 사안들을 하나로 묶어서 처리하는 기괴한 체계다. 다른 안은 따로 심의해야 하는 데 선거운동본부별로 이걸 묶어서 제출한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학생회 선거에서 공약 남발이다. 어차피 전체가 마음에 들어서 투표하는 게 아니므로 좋은 공약은 다 갖다 붙여서 내는 거다. 이러다보니 후보마다 정체성을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요즘 이런 분위기에 반발하면서 자신들의 핵심 주장만 얘기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학생회가 해야 하는 건 딱 그것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회에 당선되고 나서 공약으로 냈던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지면 그걸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총학생회 운영위원인 각 단대 학생회장들은 더 문제다. 이들은 총학생회 운영과 관련해서 검증 받은 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단대 학생회장들은 단대 문제에 대해서 검증 받았지 총학생회 운영에 대해서 학생회 선거에 일언반구라도 한 적이 없다. 근데 단대 학생회장들이 총학생회 운영에 발언권을 갖는다. 뭔가 묘하다. 예를 들어 총학생회는 A라는 세력이 당선되고 단대 학생회는 전부 B라는 세력이 당선되면 총학생회 운영위원회는 B라는 세력이 다수다. 그러면 A라는 세력은 C라는 안에 대해 찬성하면서 당선됐고, B라는 세력은 C라는 안에 대해 반대하면서 당선됐는데 학우들의 뜻은 C에 대한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 수가 없다. 총학생회장단이 권위를 앞세워서 통과시키는 경우도 있고, 단대 학생회장들이 우루루 들고 일어나 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결국 자격없는 총학생회장단과 자격없는 단대학생회장들이 싸움박질 하는 새에 1년은 가고 학생들은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하게 된다. 애초에 ꡒ학우들의 뜻을 대변하여 어쩌구ꡓ는 실현 가능성 0%의 새빨간 거짓말이라 하겠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학생회라는 게 생겨먹은 구조가 그런 걸 어쩌랴. 이는 어떤 의미에서 다들 학생회를 잡으려고 아등바등 대는 모습 자체가 그렇다. 만약 학생회가 학생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조직이라면 뭐하러 굳이 학생회장이 되려고 그 난리들일까. 당선된 사람 또는 세력 마음대로 하는 게 학생회니까 당선되겠다고 그 난리들 아닌가. 운동권이건 비운동권이건 따라서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회의 모순 둘 - 나는 공대, 죽어도 공대
필자의 전공은 산업공학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로 사는 곳은 학생회관이다. 공대는 필자에게 수업듣는 곳일 뿐이고 주로 일상은 학생회관에서 보낸다. 그러면 필자는 공대생일까 아닐까? 물론 학적상으로야 공대생이지만 실제로는 학생회관 거주자(?)라고 보는게 옳은 일이다. 근데 문제는 필자가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문제들을 학생회를 통해 처리하려면 죽으나 사나 산업공학과 학생회나 공대 학생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산업공학과 학생회나 공대 학생회는 학생회관 쪽과는 인연이 없다. 필자는 허공에 붕뜬다.
필자 뿐일까. 여기 A라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은 여성이고 자연대 소속인데 사회대에서 복수 전공을 하나 하고, 주로 수업은 인문대에서 들으며, 공강시간에는 학생회관에 있는 자기 동아리에서 보낸다고 하자. 이 학생은 여학생으로 겪는 문제가 있고, 자연대 학생으로 겪는 문제가 있고, 사회대에서 복수전공 하는 사람으로서 겪는 문제 등등이 있다. 이들 각각은 별개의 문제다. 그럼 이건 어디서 처리해야 하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의 학생들의 정체성과 거기에 맞닿은 문제는 결코 과-단대-총학생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회는 그렇게 짜여져있다. 즉, 실제 학생들의 삶과 학생회 구조는 따로 논다는 것이다. 특히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하는 사람처럼 정체성이 애매한 경우는 정말 따로 놀기 십상이다. 복수전공/부전공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텐데 이들을 대변하는 기구는 없다. 왜? 계속 말하지만 학생회가 애초에 그럴려고 만든게 아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단대학생회-과학생회 어디에서도 처리하기 애매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해야한다. 정말 요상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모집단위광역화가 전면 도입되면서 실제로 부딪힌 문제다. 과가 결정되지 않은 1, 2학년들이 허공에 붕뜨는 현상이 2002년 내내 지속되었다. 해결책으로 반학생회라는 역시 요상한 구조가 도입되었다. 반학생회의 문제는 여러 가지다. 전공이 결정된 다음에 반학생회에 그대로 소속되어 있자니 이미 전공이 달라져서 처한 문제가 다르고, 과학생회로 소속을 옮기자니 또 반학생회가 유지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단대마다 알아서 괴상한 해결책들을 내놓고 있는데 괴상한 해결책은 괴상할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002년에 학생회에서 일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 문제로 한 해 내내 골머리를 썩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과 학생회 때라고 없었던 문제가 아니지만 광역화와 함께 좀 더 심화된 문제다. 같은 과라고 해서 완전히 같은 생활을 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든 과 학생회로 다 묶어 놓으려고 하니까 말이 안된다. 그래서 유행했던 담론이 ꡒ과 공동체ꡓ라는 건데 사실은 그게 허구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전공이 같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어버리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냔 말이다. ꡒ과 학생회 행사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ꡓ는 얘기는 수많은 과 학생회장들이 털어놓는 고민이지만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서울대에 2만명의 학생이 있는 데 이들은 제각각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단대나 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럼 총학생회에서 처리할까? 그래도 안된다. 총학생회는 형식상 ꡒ모든ꡓ 학생들이 겪는 문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수의 학생들에 해당하는 문제를 총학생회에서 처리한다면, 한정된 총학생회의 집행력(인력+재정)을 특정한 학생들의 문제에 할당하는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총학생회 간부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하거나 아니면 되는대로 결정한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고시생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을텐데 처리해도 문제, 처리하지 않아도 문제다. 처리하자니 고시생이 아닌 학생들이 불만이고, 처리하지 말자니 고시생들이 불만이다. 결국 총학생회장이 고시 준비라도 하지 않는 한은 그냥 내버려두고 만다. 가끔 학교 측에서 고시 합격자 수에 목이 말라 고시생에 대한 지원이라도 하지 않는한 이들은 영원히 천덕꾸러기다. 학생을 위한 게 학생회라면 이럴 수 없는데 이렇다. 왜 그런지는 또 말하지 않겠다.
대안 : 직접결정, 직접집행, 학생회에서 학생평의회로
평의회는 의결과 집행이 일치된 조직, 직접민주주의와 자주관리를 실현하는 조직이다. 간단히 말해서 의결과 집행을 학생들에게 풀어버리자는 얘기다. 바꿔말하면 학생회장 선거를 올해부터 하지 말자는 얘기다. 이렇게만 말하면 납득이 안갈테니 좀 더 설명을 하겠다.
앞에서 학생회의 모순 첫 번 째로 검증되지 않은 학생회장들이 학생회 운영에 전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럼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모든 문제를 학생들이 직접 결정하게 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궁리하면 답이 나온다. 요즘에 핸드폰으로 투표하는 서비스도 제공되던데 그런 걸 써보든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모든 문제를 직접투표로 하기 어려우면 적당한 수의 평의원을 선출하는 방법도 있겠다. 지금도 전학대회(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라고 해서 한 학기에 한 번 과학생회장 이상 모든 학생회장들이 모이는 회의가 있지만 요식절차다 뿐이지 실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전학대회 대의원은 학생들의 ꡐ소속ꡑ을 대표할 뿐이지, ꡐ의견ꡑ을 대표하지 않는다. 내가 A과라고해서 A과 학생회장이 내 의견을 전학대회에서 대변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A과 학생회장이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라서 전학대회 안건을 미리 A과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A과 사람들이라고해서 다 같은 의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심하게 말해 관악의 과들 중에 절반에 약간 못미치는 과에서는 전폭적 지지를 받고 나머지 절반 조금 넘는 과에서는 절반에 못미치는 지지를 받는 안이 있다고 하자. 이 안은 더 많은 학생들이 지지해도 실제로는 부결이다. 따라서 소속을 대표하는 과학생회장이 아니라 의견을 대표하는 평의원으로 학생평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이들 평의원은 선출한 사람에 의해서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해야 하고, 언제든지 뽑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뽑은 평의원이 나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평의원으로 선출해서 나를 대변하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소속의 문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학생평의회 내 위원회로 묶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평의원들은 학생평의회의 평의원이면서 동시에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한다. 이들 평의회는 여성위원회에서 여학생들에 해당하는 사업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학생평의회 전체에서 처리하는 서울대 전체 학생들에 대한 문제에서 여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다. 단대 체계도 마찬가지로 인문대 학생회, 경영대 학생회가 아니라 학생평의회 내의 인문대위원회, 경영대위원회를 두면 된다. 아니면 일정 수의 학생평의회 평의원과 해당 위원회 위원으로 따로 선출된 사람들로 해당 위원회를 구성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문제는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게 아니다.
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
학생평의회는 모두가 행복하다. 먼저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생회보다 자신의 의견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조직이 생기니 행복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럼 지금까지 학생회 활동의 중심을 이뤄왔던 사람들, 주로 학생운동가이거나 또는 비운동권 학생회 활동가들은 어떨까? 역시 행복하다. 비운동권 활동가들은 학생회 선거에 떨어지면 국물도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학생회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다. 굳이 비싼 돈 들여서 학생회 선거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다. 언제나 이들을 환영하는 학생들은 많을 것이다. 비운동권 활동가들은 평의회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 된다. 그럼 학생운동가들은 행복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이들은 오랬동안 학생회 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학생평의회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기꺼이 맞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학생평의회가 행복한 이유는 학생운동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야할 강제력을 만드는 제도기 때문이다. 다들 대중운동, 대중운동 하지만 사실 학생운동가들이 학생들과 함께 뭔가를 해야할 객관적 요인은 없다. 다만 그렇게 해야한다는 당위만 있을 뿐이다. 그 당위가 실현되는 건 오로지 학생회 선거 때 뿐인데 왜냐하면 표라는 객관적인 결과가 있고, 그에 따라 다음 1년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강의실에 코빼기도 안비치던 학생운동가들이 바쁘게 다른 학생들과 만나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철은 선거 시기 뿐이다. 조금이라도 쉬운 말이나마 쓰는 때도 선거 시기 뿐이다. 그러나 학생평의회에서 학생운동가들은 언제나 다른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학생평의회는 소환과 선출이 자유로운 제도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혁신이니 뭐니 하는 화두가 몇 년 째 회자되고 있어도 학생운동이 혁신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회는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물질적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을 혁신하려면 주관적 의지로 할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물질적 조건을 바꿔야 한다. 학생운동을 둘러싼 물질적 조건이란 다름 아닌 학생회다. 학생회란 끊임없이 학생운동가들로 하여금 학우들을 기만하게 만드는 제도다. 학생운동이 학우들 속으로 들어가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학생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선거 한 철 반짝 잘하면 어떻게든 학생회 깃발 잡고 뭐라도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그 대신 학생운동가들에게 학생평의회는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제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학생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또 그만큼 서로 마음대로 하려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그러나 학생평의회는 학생들의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 많은 동의를 받는 게 중요하다. 학생운동 1년만 해본 사람이라면 다른 정치세력의 활동가와 토론하는 게 얼마나 시간낭비고 짜증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속한 조직적 입장이 뚜렷한데 논쟁에서 져도 수긍할 수 없다. 억지라도 부려야하고 서로 어차피 동의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밤새워서 싸우는 소모적인 일은 이제 집어치우자. 학생들에게 각자 의견을 말하고 학생들이 더 많이 동의해주는 안으로 가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지금까지 학생회가 이른바 ꡒ쇼부ꡓ(협의, 타협과 비슷한 뜻의 학생운동 은어)치다가 날샜다면, 학생평의회는 많은 학생들에게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 쓸데없이 ꡒ쇼부ꡓ치느라 시간낭비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깔끔한 제도다.
학생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학생운동 혁신의 길이다. 이렇게 하면 다수 학생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운동방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물론 피곤해서 어떻게 그렇게 살겠냐고 말하겠지만 편하게 운동하다가 만들고 싶은 세상 못만들고 인생 종칠거냐, 아니면 힘들게 운동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아서 만들고 싶은 세상 만들거냐라고 되묻고 싶다. 학우들에게 동의받지 못하면 망해버리는 시스템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라. 그래서 망하든지 아니면 건강하게 살아남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 어차피 수명이 얼마남지 않은 학생회 체계 속에서 안주하다가 학생들의 외면 속에 사라지느니 그게 더 낫다.
둘째, 학생평의회는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원하는 세상은 더 민주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학교부터 그렇게 운영하고 자신의 주변 공간도 그렇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학생운동가들이 위계적인 학생회 체계에서 행복할 수 없다. ꡒ프롤레타리아 독재ꡓ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ꡒ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ꡓ로 전락한 저 소련을 위시한 가짜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를 보자. 최소한 소련도 혁명 직전과 직후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의결하고 집행하는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부터 소비에트 연방인 것이었던 것이고(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의 붕괴는 이미 권력이 소비에트에서 당으로 넘어간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순간 권력의 부패는 시작된다. 이는 학생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대표자랍시고 까만 양복 입고 ꡒ안녕하십니까~ 저는 무어무어의 무어 제 몇 대 무슨 학생회 학생회장 누구~입니다ꡓ 따위로 어깨에 힘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역겹다. 늙은 사람이 그래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그런 행위 전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학생회고, 이런 것은 학생운동가들을 알게 모르게 권위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에 대해
사실 지금까지 학생회 얘기만 했지만 한국이라는 ꡐ국가ꡑ를 돌아보자. 사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다. 국회나 전학대회나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반대 이상의 기능은 없다. 삼권 분립은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역사적으로 의결과 집행의 분리는 의결을 무력하고 집행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국민은 다시 노예의 위치로 전락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중목욕탕에도 가고 이러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파격이라고. 근데 그런 누군가의 행동이 ꡒ파격ꡓ이라는 사실 자체가 더 문제다. 법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국가라고 하지만 대통령제는 사실 5년제 군주제와 다를게 없다. 대통령이 아무리 국민의 종복이라고 해도 왕은 왕이다. 나름대로 민주적입네 하는 미국을 보자. 거기는 더 하다. ꡒ대통령의 연인ꡓ이라는 영화에서 대통령이 꽃을 사러가자 꽃집 점원이 기절을 한다. 왕을 만난들 그랬을까.
그렇다고 의원책임제, 이른바 내각제를 하자는 얘기냐하면 그렇지 않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면 기탁금 1000만원을 내야한다. 이것도 몇 프로 이상 득표를 못하면 돌려받지도 못한다. 국회의원도 알고보면 상당히 높은 진입장벽이 있다. 현재 정치는 고비용구조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참정권을 제약하는 각종 장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사실 현재로서 국회는 지방 토호들이 모여 회의하는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제가 조선 시대의 왕정이라면, 국회는 고려 초기 호족 연합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진보정당들은 국회에 다수석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국회든 뭐든 국가 조직 자체가 가진 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도록 짜여져있고 국민의 참여를 배제하도록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근대의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우는 신흥 계급이 왕과 귀족들과 싸운 것이었을 뿐이었고 그에 기반한 민주주의 제도 또한 부르주아의 이해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은 현재 말과 달리 국회 외에 진정한 민주적 조직 형식을 만드는 일에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현재의 국가 조직이 문제고, 그래서 그 조직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면, 민주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보정당의 과제일 것이다. 민중권력쟁취가라는 노래는 ꡒ공장은 노동자에게, 토지는 농민에게, 주택은 서민에게ꡓ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 그대로라면 민중권력은 자신이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통제를 바로 그 자신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자주관리가 바로 민중권력이며 이를 실현하는 조직형태는 국가가 아니라 평의회다.
글을 마치며
마감을 하루 앞두고 취중에 쓴 글이라 여러 모로 과격한 언사도 없지 않다. 그리고 좀 많이 나간듯한 느낌도 든다. 아마 이 따위로 글을 써놓으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상상도 간다. 원고지 80매가 넘는 글을 썼으니 편집장의 잔소리도 또 어떻게 감당할지도 걱정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이 글이 무용한 또 하나의 학생회론이 되어 종이 낭비로 끝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형식으로서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방식으로서 효율적이다. 더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민(民)을 주(主)로 만드는 제도다. 지금 관악의 2만명이나 되는 학생 중에서 학생회칙 중 한 글자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또 그 중에 한 글자라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따져보자.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비민주적인 구도는 그만큼 정보에 대한 제한을 가하며 학생들을 점차 학생회에 관심을 잃게 만든다. 이는 학생회를 열심히 하든 말든 학생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자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과/반 학생회장 할 사람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이 시기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는 학생평의회가 얼마나 의의를 가질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지난 시절 의제워크샵 등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던 실험들이 참여의 부족으로 실패했던 걸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학생회 자체가 이미 학생들을 배제하는 구조 속에서 부분적인 참여를 도입했기 때문에 실패했을 뿐이다. 아예 학생회 자체를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체계, 학생들이 진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체계로 만들지 않으면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생회는 강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심지어 학생회에 가장 관심이 많은 학생운동가들마저도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무슨 결론이 나오는지 밖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학생회인데 도대체 누구에게 학생회 운영에 참여하라는 말인가. 학생평의회로 전환해서 설사 한 두 해 문제만 잔뜩 쌓인채 지나가더라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결국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시차를 감당못할 만한 시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차를 참아내지 않는다면 학생회도 학생운동도 미래가 없는 시기다.
- 관악 27호 유재명 -
사실, 학생회에 대한 이러저런한 글들은 지겹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생회에 대한 글을 또 쓰는 이유는? 더 이상 학생회에 대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다. 무슨 소리인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될 것이다.
학생회에 대한 소고
많은 사람들이 학생회란 ꡒ당연히 있는 것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학생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에 대한 수 많은 의견들이 이런 ꡒ당연함ꡓ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학생회가 별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오늘날 한국 대학의 학생회란 80년대라는 시기에 주어진 상황에 맞춰 운동권들이 발명한 조직이다.
운동권들이 발명했다니? 이상한 소린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80년대 초반까지 학생회란 없었다. 그 한참 전에야 있긴 했지만 한동안 대학에 학생회란 건 없었다. 요즘 단대 학생회들이 보통 20대, 21대인데 이게 증거다. 2003에서 20을 빼보면 83이 나온다. 이 때가 바로 학생회를 만들던 시기다. 보통 그 배경으로 드는 게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ꡐ유화조치ꡑ다.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때처럼 힘으로 억누르기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대학에 숨통을 틔워준다. 단적으로 대학 내에 상주하고 있던 전투경찰 병력을 뺀다. 이 때부터 많은 대학에서 학생회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당시 학생 운동의 중심은 지금처럼 학생회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의 중심은 ꡒ써클ꡓ이라 불리는 비공개 조직들이었고, 이들 조직들이 서로 협의해서 학생운동을 이끌어갔다. 당시에 45명인 과에서 1학년 43명이 이런 저런 써클들에 가입되어있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이런 써클 중심의 학생운동은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일단 써클들끼리 협의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한 학교 안에도 수 십 개의 써클이 있는데 여러 학교가 함께 뭔가를 하려면 골치가 아픈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학교 간의 비공식적인 채널이 존재했다. 이 역시 비효율적이었음은 더 말할 이유가 없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한 학생회가 완전히 발명되는 건 80년 대 후반에 가서부터다. 당시까지도 한국에서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하기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의 위세가 등등한데 그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80년대 학생운동 문건들을 보면 ꡒ당건투ꡓ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ꡒ당 건설 투쟁ꡓ의 준말인 당건투는 당시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 실천적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단 당시 운동권의 최대 과제였다. 왜냐하면 전체 운동을 총괄하는 정치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회는 이런 당시 상황에서 학생운동권이 선택한 최고의 해답이었다.
80년대 말 학생회를 발명한 것은 민족해방파 학생운동이었다. 이들이 발명한 학생회는 전대협(전국 대학 대표자 협의회)이라는 조직 형식을 통해 완성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건데 전대협 중앙에서 뭔가를 결정 내리면, 그 결정은 순식간에 서울, 경기 등 지역 조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광역 단위 조직에서 다시 서울로 치면 서울 남부, 동부, 서부, 북부 등의 지구 조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지구 조직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로 그리고 총학생회에서 단대 학생회로, 단대학생회에서 과 학생회로 중앙의 결정은 순식간에 파급된다. 써클 중심의 학생운동이 시골길이라면 전대협 체계는 고속도로를 뚫은 셈이다.
써클은 불법이 될 수 있어도 학생회는 어찌됐거나 학생들이 선거로 구성한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기가 편하다. 최소한 경찰한테 안 쫓겨 다니면서 학생운동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선거로 선출한 학생회장들은 학생들에게 권위도 인정 받을 수 있다. 이래저래 학생회란 좋은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발명된 학생회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선거란 구실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학생회 선거에서 채택하고 있는 투표 방식은 세상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단순 다수득표제다. 한 마디로 딱 한 번 투표해서 제일 많이 득표한 사람이 당선된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도 이렇게 치르니까 대부분 무감각했지만 얼마전에 민주당에서 선보인 선호투표제처럼 훨씬 더 투표자들의 의사를 잘 받아들이는 투표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왜 가장 비민주적인 단순 다수득표제를 채택했냐하면 사실 학생회 선거란 요식절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단순 다수득표제는 모든 투표 방식 중에 가장 간단하고 손이 덜 간다. 어차피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투표 방식이 복잡해봐야 일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에 딱 한 번 투표로 선출된 학생회장은 1년 내내 학생회 운영에 대해 전권을 누린다. (투표 방식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 ꡒ역시 제목 미정ꡓ에서 다루겠다.)
학생회란 이렇게 발명된 것이었다. 사실 학생회 운영이 비민주적이니 뭐니 투덜댈 이유가 없는 게, 애초에 학생회란 그런 목적으로 발명된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 중앙의 방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체계일 뿐인데 민주적일 필요란 애시당초 없었다. 그런 점에서 비운동권 학생회란 일종의 코미디일 수 밖에 없다. 80년대에 운동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조직을 가지고 2000년대에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운동권 학생회도 역시 코미디다. 지금은 80년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회 체계의 붕괴
이렇게 발명된 학생회의 좋은 시절은 몇 년이 못 가 끝나고 만다. 학생들이 4년 주기로 싹 바뀌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의 변화란 그만큼 빠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들어서 민족해방파와 함께 학생운동을 양분하고 있던 민중민주파 학생운동도 학생회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학생회는 전국 중앙의 결정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전국에서 지역, 지구까지는 결정 사항이 잘 내려오다가 중간에 민중민주파 총학생회까지 오면 이 결정이 딱 끊어져버린다. 경부고속도로로 치면 대전쯤에서 도로가 끊어진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우회로를 뚫어야 한다. 그래서 ꡒ수임자ꡓ라는 요상한 체계가 만들어진다. 민족해방파가 총학생회 선거에서 떨어지면 단대 학생회 중 하나가 총학생회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즉 지구 조직에서 총학생회로 결정 사항이 전달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총학생회를 뛰어넘어서 단대 학생회로 바로 넘어간다. 고속도로에서 중간에 국도로 갈아탔다가 다시 고속도로로 갈아타는 기묘한 꼴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민중민주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총학생회에 당선되도 단대 학생회에 떨어지면 역시 과학생회로 바로 넘어가야 했다. 이 때부터 민족민주파와 민중민주파는 서로 우회로를 열심히 뚫기 시작한다. 게다가 민중민주파를 크게 묶는 노선, 즉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무너지면서 과거 민중민주파로 묶을 수 있었던 여러 세력들이 또 각자 우회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민족민주파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면서 이들도 제각각 우회로를 만들어댄다. 결국 고속도로는 수 많은 국도와 지방도로 심지어 비포장도로로 만들어진 복잡하고 산만한 체계가 되고 만다. 학생회의 가장 큰 장점이 사라진 것이다.
학생회 체계가 완전히 산산 조각 난 건 90년대 후반이었다. 90년대 중반에 연세대와 한양대에서 있었던 일들로 인해서 전대협에 이은 학생회 체계인 한총련(한국 대학 총학생회 연합)이 산산조각 나고 민족민주파를 제외한 모든 학생운동 세력들이 사실상 한총련에서 탈퇴하자 고속도로는 명목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제 각각의 학생운동 세력들은 자신만의 고속도로를 뚫어대기 시작한다. 이런 고속도로들이 지금 있는 전학협(전국 학생회 협의회), 연대회의(전국 학생 연대회의), 전학대협(전국 학생 대표자 협의회) 등의 단체들이다. 그러나 1Km짜리 고속도로를 본 적이 있는가? 한총련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전국에서 과까지 이어지는 선을 구성한 단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지방도로와 국도로 난립한 괴상망칙한 체계 속에 뒤엉키게 되었다.
그 결과 학생회는 이름만 학생회로 남게 되었다. 학생회의 일상적인 의결 기구는 운영위원회라는 회의다. 총학생회의 경우 운영위원회는 총학생회장단과 단대 학생회장들이 모여서 구성한다. 총학생회장과 단대 학생회장이 모두 같은 정치세력일 때 운영위원회란 총학생회장이 단대학생회장들에게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다음 날 단대 학생회 운영위원회를 하는 게 보통인데 그래야 총학생회에서 받아온 지침을 단대 학생회장들이 과 학생회장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총학생회장은 물론 단대 학생회장들이 전부 서로 다른 정치세력인 현재의 경우다. 운영위원회는 별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없어졌다. 결정해도 아무도 따르지 않게된 것은 물론이고. 총학생회장과 소속이 다른 단대학생회장은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뭐라고 결정이 나건 어차피 별도의 우회로를 통해 내려오는 자기 조직의 입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운영위원회는 점점 유명무실해진다. 지금 운영위원회는 기껏해야 말싸움이나 하는 자리거나 아니면 적당히 학생회비를 타쓰기 위해 합의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학생운동의 학생들에 대한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게 약화되면서 학생회는 점점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조직으로 전락한다. 즉 총학생회-단대학생회-과학생회를 엮어주는 고리도 다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로부터도 버림받자 학생회는 그냥 각각의 운동권들의 거점으로 전락하게 된다. 학생회는 안팎으로 고립된 것이다. 내우외환이라 하겠다.
그나마 학생회에 운동권들만 있으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른바 비운동권들마저 끼어들면서 사태는 복잡해진다. 운동권들끼리 모이면 그래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좀 있겠는데 학생운동에 반대하거나 또는 관심없는 이들이 끼어들자 학생회는 운동을 위한 공간으로서도 전혀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실 지금 있는 학생회들은 이름만 학생회일 뿐이다.
학생회의 모순 하나 - 당선된 자 마음대로, 민주주의는 없다.
그럼 학생회가 이제 운동 공간으로 별 쓸모가 없으니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당선된 박경렬 총학생회장 말대로 운동권들은 모두 학생회를 떠나야 하는 걸까? 그게 또 아니다. 왜냐하면 떠나야 하는 건 운동권이 아닌 박경렬 씨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박경렬 씨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지금 학생회는 그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박경렬, 홍상욱 씨를 후보로 내세운 ꡒ학교로ꡓ 선거운동본부(이하 ꡒ학교로ꡓ)이 주장한 내용은 현재 학생회 구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 학생회는 80년대 운동권들이 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체계인데 거기에서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일들을 하겠다는 건 상복 입고 잔치가는 꼴이다.
ꡒ학교로ꡓ를 비롯해 많은 비운동권이 주장하는 요지는 ꡒ운동권 학생회는 학우들의 요구를 잘 반영하지 못하니 우리가 학우들이 원하는 걸 하겠다.ꡓ 이런 거다. 문제는 운동권이건 비운동권이건 ꡒ학우들이 원하는 걸ꡓ 할 수도 없는 학생회 체계에서 말로는 그렇게 하기 쉬워도 사실 누구든지 결국 학우들이 원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걸 할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일단 제일 큰 문제는 학생들이 학생회 운영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통로가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
결국 총학생회는 학생회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 외에는 학우들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이 없다. 다른 건 하나도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학생회에서 아주 좋은 일을 하나 하기로 했다고 하자. 총장잔디를 잔디밭 대신 꽃밭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하자.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아무도 공약으로 낸 적이 없다. 따라서 학생들이 여기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알 길도 없다. 총학생회에서 여론조사를 해볼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참고로 할 뿐이지 하고 말고는 총학생회 마음이다. 그러니 총장잔디를 꽃밭으로 만드는 이 좋은 일도 총학생회가 한다면 그건 월권이다. 예를 이렇게 드니까 무척 이상한데 좀더 현실감 나는 예를 들어보자. 지난 45대 총학생회는 여러 가지 공약을 냈다. 그런데 실제로 2002년 내내 한 건 교육투쟁 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총학생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섭섭해 하겠지만, 총학생회장이 학교에서 잘리는 상황 속에서 교육투쟁을 열심히 한 45대 총학생회 집행 간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수고했다고 이해하기 바란다. 문제는 45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2002년 교육투쟁에 관한 공약은 없었다. 물론 있기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건 아니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46대 총학생회를 구성하고 있는 ꡒ학교로ꡓ측은 등록금 인상에 대해 자세한 공약을 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게 등록금 인상 문제는 총학생회 선거가 끝나야 대충 윤곽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등록금 인상 등 교육투쟁 사안에 대해 단 한 번도 학생들로부터 검증받지 않은 총학생회가 교육투쟁을 주도하게 되어있다는 문제다. 즉, 다른 사안들에 대한 지지를 받아 학생회에 당선된 사람이 그 사안 외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도 관할하게 되어있는게 문제라는 얘기다.
물론 총론에서 지지를 받았으니 각론은 총론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세상 일이 또 그렇던가. 학생회 선거 때도 이 정책은 여기가 더 마음에 들고, 저 정책은 저기가 더 마음에 드는 경우가 한 두 번인가. 그래서 정책투표제 하자는 얘기도 나오는 거고. 사실 학생회 선거는 전혀 다른 사안들을 하나로 묶어서 처리하는 기괴한 체계다. 다른 안은 따로 심의해야 하는 데 선거운동본부별로 이걸 묶어서 제출한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학생회 선거에서 공약 남발이다. 어차피 전체가 마음에 들어서 투표하는 게 아니므로 좋은 공약은 다 갖다 붙여서 내는 거다. 이러다보니 후보마다 정체성을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요즘 이런 분위기에 반발하면서 자신들의 핵심 주장만 얘기하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학생회가 해야 하는 건 딱 그것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회에 당선되고 나서 공약으로 냈던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벌어지면 그걸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총학생회 운영위원인 각 단대 학생회장들은 더 문제다. 이들은 총학생회 운영과 관련해서 검증 받은 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단대 학생회장들은 단대 문제에 대해서 검증 받았지 총학생회 운영에 대해서 학생회 선거에 일언반구라도 한 적이 없다. 근데 단대 학생회장들이 총학생회 운영에 발언권을 갖는다. 뭔가 묘하다. 예를 들어 총학생회는 A라는 세력이 당선되고 단대 학생회는 전부 B라는 세력이 당선되면 총학생회 운영위원회는 B라는 세력이 다수다. 그러면 A라는 세력은 C라는 안에 대해 찬성하면서 당선됐고, B라는 세력은 C라는 안에 대해 반대하면서 당선됐는데 학우들의 뜻은 C에 대한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 수가 없다. 총학생회장단이 권위를 앞세워서 통과시키는 경우도 있고, 단대 학생회장들이 우루루 들고 일어나 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결국 자격없는 총학생회장단과 자격없는 단대학생회장들이 싸움박질 하는 새에 1년은 가고 학생들은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하게 된다. 애초에 ꡒ학우들의 뜻을 대변하여 어쩌구ꡓ는 실현 가능성 0%의 새빨간 거짓말이라 하겠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학생회라는 게 생겨먹은 구조가 그런 걸 어쩌랴. 이는 어떤 의미에서 다들 학생회를 잡으려고 아등바등 대는 모습 자체가 그렇다. 만약 학생회가 학생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조직이라면 뭐하러 굳이 학생회장이 되려고 그 난리들일까. 당선된 사람 또는 세력 마음대로 하는 게 학생회니까 당선되겠다고 그 난리들 아닌가. 운동권이건 비운동권이건 따라서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회의 모순 둘 - 나는 공대, 죽어도 공대
필자의 전공은 산업공학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로 사는 곳은 학생회관이다. 공대는 필자에게 수업듣는 곳일 뿐이고 주로 일상은 학생회관에서 보낸다. 그러면 필자는 공대생일까 아닐까? 물론 학적상으로야 공대생이지만 실제로는 학생회관 거주자(?)라고 보는게 옳은 일이다. 근데 문제는 필자가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문제들을 학생회를 통해 처리하려면 죽으나 사나 산업공학과 학생회나 공대 학생회에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산업공학과 학생회나 공대 학생회는 학생회관 쪽과는 인연이 없다. 필자는 허공에 붕뜬다.
필자 뿐일까. 여기 A라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은 여성이고 자연대 소속인데 사회대에서 복수 전공을 하나 하고, 주로 수업은 인문대에서 들으며, 공강시간에는 학생회관에 있는 자기 동아리에서 보낸다고 하자. 이 학생은 여학생으로 겪는 문제가 있고, 자연대 학생으로 겪는 문제가 있고, 사회대에서 복수전공 하는 사람으로서 겪는 문제 등등이 있다. 이들 각각은 별개의 문제다. 그럼 이건 어디서 처리해야 하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의 학생들의 정체성과 거기에 맞닿은 문제는 결코 과-단대-총학생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회는 그렇게 짜여져있다. 즉, 실제 학생들의 삶과 학생회 구조는 따로 논다는 것이다. 특히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을 하는 사람처럼 정체성이 애매한 경우는 정말 따로 놀기 십상이다. 복수전공/부전공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텐데 이들을 대변하는 기구는 없다. 왜? 계속 말하지만 학생회가 애초에 그럴려고 만든게 아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단대학생회-과학생회 어디에서도 처리하기 애매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해야한다. 정말 요상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모집단위광역화가 전면 도입되면서 실제로 부딪힌 문제다. 과가 결정되지 않은 1, 2학년들이 허공에 붕뜨는 현상이 2002년 내내 지속되었다. 해결책으로 반학생회라는 역시 요상한 구조가 도입되었다. 반학생회의 문제는 여러 가지다. 전공이 결정된 다음에 반학생회에 그대로 소속되어 있자니 이미 전공이 달라져서 처한 문제가 다르고, 과학생회로 소속을 옮기자니 또 반학생회가 유지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단대마다 알아서 괴상한 해결책들을 내놓고 있는데 괴상한 해결책은 괴상할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002년에 학생회에서 일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이 문제로 한 해 내내 골머리를 썩였을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과 학생회 때라고 없었던 문제가 아니지만 광역화와 함께 좀 더 심화된 문제다. 같은 과라고 해서 완전히 같은 생활을 하는 게 아닌데 어떻게든 과 학생회로 다 묶어 놓으려고 하니까 말이 안된다. 그래서 유행했던 담론이 ꡒ과 공동체ꡓ라는 건데 사실은 그게 허구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전공이 같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어버리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냔 말이다. ꡒ과 학생회 행사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ꡓ는 얘기는 수많은 과 학생회장들이 털어놓는 고민이지만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서울대에 2만명의 학생이 있는 데 이들은 제각각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단대나 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럼 총학생회에서 처리할까? 그래도 안된다. 총학생회는 형식상 ꡒ모든ꡓ 학생들이 겪는 문제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수의 학생들에 해당하는 문제를 총학생회에서 처리한다면, 한정된 총학생회의 집행력(인력+재정)을 특정한 학생들의 문제에 할당하는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총학생회 간부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하거나 아니면 되는대로 결정한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고시생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을텐데 처리해도 문제, 처리하지 않아도 문제다. 처리하자니 고시생이 아닌 학생들이 불만이고, 처리하지 말자니 고시생들이 불만이다. 결국 총학생회장이 고시 준비라도 하지 않는 한은 그냥 내버려두고 만다. 가끔 학교 측에서 고시 합격자 수에 목이 말라 고시생에 대한 지원이라도 하지 않는한 이들은 영원히 천덕꾸러기다. 학생을 위한 게 학생회라면 이럴 수 없는데 이렇다. 왜 그런지는 또 말하지 않겠다.
대안 : 직접결정, 직접집행, 학생회에서 학생평의회로
평의회는 의결과 집행이 일치된 조직, 직접민주주의와 자주관리를 실현하는 조직이다. 간단히 말해서 의결과 집행을 학생들에게 풀어버리자는 얘기다. 바꿔말하면 학생회장 선거를 올해부터 하지 말자는 얘기다. 이렇게만 말하면 납득이 안갈테니 좀 더 설명을 하겠다.
앞에서 학생회의 모순 첫 번 째로 검증되지 않은 학생회장들이 학생회 운영에 전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럼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모든 문제를 학생들이 직접 결정하게 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궁리하면 답이 나온다. 요즘에 핸드폰으로 투표하는 서비스도 제공되던데 그런 걸 써보든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다. 모든 문제를 직접투표로 하기 어려우면 적당한 수의 평의원을 선출하는 방법도 있겠다. 지금도 전학대회(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라고 해서 한 학기에 한 번 과학생회장 이상 모든 학생회장들이 모이는 회의가 있지만 요식절차다 뿐이지 실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전학대회 대의원은 학생들의 ꡐ소속ꡑ을 대표할 뿐이지, ꡐ의견ꡑ을 대표하지 않는다. 내가 A과라고해서 A과 학생회장이 내 의견을 전학대회에서 대변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A과 학생회장이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라서 전학대회 안건을 미리 A과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A과 사람들이라고해서 다 같은 의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심하게 말해 관악의 과들 중에 절반에 약간 못미치는 과에서는 전폭적 지지를 받고 나머지 절반 조금 넘는 과에서는 절반에 못미치는 지지를 받는 안이 있다고 하자. 이 안은 더 많은 학생들이 지지해도 실제로는 부결이다. 따라서 소속을 대표하는 과학생회장이 아니라 의견을 대표하는 평의원으로 학생평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이들 평의원은 선출한 사람에 의해서 언제든지 소환이 가능해야 하고, 언제든지 뽑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뽑은 평의원이 나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평의원으로 선출해서 나를 대변하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이치라고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소속의 문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학생평의회 내 위원회로 묶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평의원들은 학생평의회의 평의원이면서 동시에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한다. 이들 평의회는 여성위원회에서 여학생들에 해당하는 사업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학생평의회 전체에서 처리하는 서울대 전체 학생들에 대한 문제에서 여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다. 단대 체계도 마찬가지로 인문대 학생회, 경영대 학생회가 아니라 학생평의회 내의 인문대위원회, 경영대위원회를 두면 된다. 아니면 일정 수의 학생평의회 평의원과 해당 위원회 위원으로 따로 선출된 사람들로 해당 위원회를 구성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문제는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게 아니다.
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
학생평의회는 모두가 행복하다. 먼저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생회보다 자신의 의견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조직이 생기니 행복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럼 지금까지 학생회 활동의 중심을 이뤄왔던 사람들, 주로 학생운동가이거나 또는 비운동권 학생회 활동가들은 어떨까? 역시 행복하다. 비운동권 활동가들은 학생회 선거에 떨어지면 국물도 없는 상황에서 언제나 학생회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다. 굳이 비싼 돈 들여서 학생회 선거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다. 언제나 이들을 환영하는 학생들은 많을 것이다. 비운동권 활동가들은 평의회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 된다. 그럼 학생운동가들은 행복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이들은 오랬동안 학생회 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학생평의회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기꺼이 맞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학생평의회가 행복한 이유는 학생운동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야할 강제력을 만드는 제도기 때문이다. 다들 대중운동, 대중운동 하지만 사실 학생운동가들이 학생들과 함께 뭔가를 해야할 객관적 요인은 없다. 다만 그렇게 해야한다는 당위만 있을 뿐이다. 그 당위가 실현되는 건 오로지 학생회 선거 때 뿐인데 왜냐하면 표라는 객관적인 결과가 있고, 그에 따라 다음 1년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강의실에 코빼기도 안비치던 학생운동가들이 바쁘게 다른 학생들과 만나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철은 선거 시기 뿐이다. 조금이라도 쉬운 말이나마 쓰는 때도 선거 시기 뿐이다. 그러나 학생평의회에서 학생운동가들은 언제나 다른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학생평의회는 소환과 선출이 자유로운 제도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혁신이니 뭐니 하는 화두가 몇 년 째 회자되고 있어도 학생운동이 혁신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회는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물질적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을 혁신하려면 주관적 의지로 할 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물질적 조건을 바꿔야 한다. 학생운동을 둘러싼 물질적 조건이란 다름 아닌 학생회다. 학생회란 끊임없이 학생운동가들로 하여금 학우들을 기만하게 만드는 제도다. 학생운동이 학우들 속으로 들어가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학생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선거 한 철 반짝 잘하면 어떻게든 학생회 깃발 잡고 뭐라도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그 대신 학생운동가들에게 학생평의회는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제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학생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또 그만큼 서로 마음대로 하려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그러나 학생평의회는 학생들의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 많은 동의를 받는 게 중요하다. 학생운동 1년만 해본 사람이라면 다른 정치세력의 활동가와 토론하는 게 얼마나 시간낭비고 짜증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기가 속한 조직적 입장이 뚜렷한데 논쟁에서 져도 수긍할 수 없다. 억지라도 부려야하고 서로 어차피 동의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밤새워서 싸우는 소모적인 일은 이제 집어치우자. 학생들에게 각자 의견을 말하고 학생들이 더 많이 동의해주는 안으로 가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다. 지금까지 학생회가 이른바 ꡒ쇼부ꡓ(협의, 타협과 비슷한 뜻의 학생운동 은어)치다가 날샜다면, 학생평의회는 많은 학생들에게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 쓸데없이 ꡒ쇼부ꡓ치느라 시간낭비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깔끔한 제도다.
학생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학생운동 혁신의 길이다. 이렇게 하면 다수 학생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운동방식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물론 피곤해서 어떻게 그렇게 살겠냐고 말하겠지만 편하게 운동하다가 만들고 싶은 세상 못만들고 인생 종칠거냐, 아니면 힘들게 운동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아서 만들고 싶은 세상 만들거냐라고 되묻고 싶다. 학우들에게 동의받지 못하면 망해버리는 시스템 속에 자기를 집어넣어라. 그래서 망하든지 아니면 건강하게 살아남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 어차피 수명이 얼마남지 않은 학생회 체계 속에서 안주하다가 학생들의 외면 속에 사라지느니 그게 더 낫다.
둘째, 학생평의회는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원하는 세상은 더 민주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학교부터 그렇게 운영하고 자신의 주변 공간도 그렇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학생운동가들이 위계적인 학생회 체계에서 행복할 수 없다. ꡒ프롤레타리아 독재ꡓ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ꡒ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ꡓ로 전락한 저 소련을 위시한 가짜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를 보자. 최소한 소련도 혁명 직전과 직후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의결하고 집행하는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부터 소비에트 연방인 것이었던 것이고(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의 붕괴는 이미 권력이 소비에트에서 당으로 넘어간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순간 권력의 부패는 시작된다. 이는 학생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대표자랍시고 까만 양복 입고 ꡒ안녕하십니까~ 저는 무어무어의 무어 제 몇 대 무슨 학생회 학생회장 누구~입니다ꡓ 따위로 어깨에 힘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역겹다. 늙은 사람이 그래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그런 행위 전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학생회고, 이런 것은 학생운동가들을 알게 모르게 권위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에 대해
사실 지금까지 학생회 얘기만 했지만 한국이라는 ꡐ국가ꡑ를 돌아보자. 사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다. 국회나 전학대회나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반대 이상의 기능은 없다. 삼권 분립은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역사적으로 의결과 집행의 분리는 의결을 무력하고 집행을 강화시켰다. 게다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국민은 다시 노예의 위치로 전락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중목욕탕에도 가고 이러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파격이라고. 근데 그런 누군가의 행동이 ꡒ파격ꡓ이라는 사실 자체가 더 문제다. 법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국가라고 하지만 대통령제는 사실 5년제 군주제와 다를게 없다. 대통령이 아무리 국민의 종복이라고 해도 왕은 왕이다. 나름대로 민주적입네 하는 미국을 보자. 거기는 더 하다. ꡒ대통령의 연인ꡓ이라는 영화에서 대통령이 꽃을 사러가자 꽃집 점원이 기절을 한다. 왕을 만난들 그랬을까.
그렇다고 의원책임제, 이른바 내각제를 하자는 얘기냐하면 그렇지 않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면 기탁금 1000만원을 내야한다. 이것도 몇 프로 이상 득표를 못하면 돌려받지도 못한다. 국회의원도 알고보면 상당히 높은 진입장벽이 있다. 현재 정치는 고비용구조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참정권을 제약하는 각종 장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사실 현재로서 국회는 지방 토호들이 모여 회의하는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제가 조선 시대의 왕정이라면, 국회는 고려 초기 호족 연합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진보정당들은 국회에 다수석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국회든 뭐든 국가 조직 자체가 가진 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도록 짜여져있고 국민의 참여를 배제하도록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근대의 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우는 신흥 계급이 왕과 귀족들과 싸운 것이었을 뿐이었고 그에 기반한 민주주의 제도 또한 부르주아의 이해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은 현재 말과 달리 국회 외에 진정한 민주적 조직 형식을 만드는 일에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현재의 국가 조직이 문제고, 그래서 그 조직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면, 민주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진보정당의 과제일 것이다. 민중권력쟁취가라는 노래는 ꡒ공장은 노동자에게, 토지는 농민에게, 주택은 서민에게ꡓ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이 뜻하는 바 그대로라면 민중권력은 자신이 일하고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통제를 바로 그 자신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자주관리가 바로 민중권력이며 이를 실현하는 조직형태는 국가가 아니라 평의회다.
글을 마치며
마감을 하루 앞두고 취중에 쓴 글이라 여러 모로 과격한 언사도 없지 않다. 그리고 좀 많이 나간듯한 느낌도 든다. 아마 이 따위로 글을 써놓으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상상도 간다. 원고지 80매가 넘는 글을 썼으니 편집장의 잔소리도 또 어떻게 감당할지도 걱정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이 글이 무용한 또 하나의 학생회론이 되어 종이 낭비로 끝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형식으로서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 방식으로서 효율적이다. 더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민(民)을 주(主)로 만드는 제도다. 지금 관악의 2만명이나 되는 학생 중에서 학생회칙 중 한 글자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또 그 중에 한 글자라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따져보자.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비민주적인 구도는 그만큼 정보에 대한 제한을 가하며 학생들을 점차 학생회에 관심을 잃게 만든다. 이는 학생회를 열심히 하든 말든 학생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자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과/반 학생회장 할 사람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이 시기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는 학생평의회가 얼마나 의의를 가질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지난 시절 의제워크샵 등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던 실험들이 참여의 부족으로 실패했던 걸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학생회 자체가 이미 학생들을 배제하는 구조 속에서 부분적인 참여를 도입했기 때문에 실패했을 뿐이다. 아예 학생회 자체를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체계, 학생들이 진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체계로 만들지 않으면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학생회는 강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심지어 학생회에 가장 관심이 많은 학생운동가들마저도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무슨 결론이 나오는지 밖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학생회인데 도대체 누구에게 학생회 운영에 참여하라는 말인가. 학생평의회로 전환해서 설사 한 두 해 문제만 잔뜩 쌓인채 지나가더라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결국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시차를 감당못할 만한 시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시차를 참아내지 않는다면 학생회도 학생운동도 미래가 없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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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투쟁기획단 제안서 완안입니다. | 딸기 | 2007.03.28 | 747 |
91 | 제안서 [1] | 설영 | 2007.03.26 | 740 |
90 |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을 제안합니다^^ | 현수 | 2007.03.21 | 718 |
89 | 여성의날 자료 올려요!! | 딸기 | 2007.03.05 | 703 |
88 | 전북대 인권강좌 웹자보 | 전북대 | 2007.03.04 | 710 |
87 | 알바생권리찾기위원회 제안문 | 행동연대 | 2007.02.28 | 726 |
86 | 범국본 웹소식지 소스 | 인학련 | 2006.11.29 | 815 |
85 | 11월 교양강좌 웹자보 | 인학련 | 2006.11.15 | 724 |
84 | 기호0번 유인물 | 멍청이 | 2006.11.15 | 769 |
83 | 학생회란 무엇인가? | 전주대 | 2006.11.13 | 886 |
82 | 전주대신문에 올릴글입니다.. | 전주대 | 2006.10.22 | 646 |
» | 학생회에서 학생평의회로 - 관악 27호 | 멍청이 | 2006.10.11 | 734 |
80 | 기관지 글 | 설영 | 2006.09.28 | 691 |
79 | 늦어서 지송 | 설영 | 2006.09.26 | 630 |
78 | 2003년 전학협 해체 관련 기사 | 멍청이 | 2006.09.26 | 757 |
77 | [re] 2003년 전학협 해체 관련 기사 | 멍청이 | 2006.09.26 | 703 |
76 | 전주대 신문에 투고할 글입니다. | 전주대 | 2006.09.19 | 664 |
75 | FTA 반대 원광대학교 대책위 | 멍청이 | 2006.09.18 | 594 |
74 | 전주대 하반기 계획서 | 전주대 | 2006.09.15 | 576 |
73 | 성명서 | 인학련 | 2006.09.13 | 5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