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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겨레]'경성트로이카' 이끈 이재유

행동연대 2005.09.10 20:38 조회 수 : 948















연쇄 파업 주도…식민지 조선 뒤흔들어
광복60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열전 ⑧ ‘경성트로이카’ 이끈 이재유 (1905~1944)
이본영 기자





























▲ 이재유의 체포를 전한 일제의 어용신문 <경성일보> 호외. ‘집요하고 흉악한 조선공산당을 마침내 괴멸시키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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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10개월여 앞둔 1944년 10월 어느날, 불혹으로 접어드는 한 남자가 다죽어가는 몰골로 30대 초반 여자의 등에 업혀 청주보호교도소 철문을 나섰다. 결핵과 각기병은 그에게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실 시간을 얼마주지 않았다. 1930년대 소설같은 탈주극과 신출귀몰한 도피 행각으로 일제 경찰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이재유(1905~1944)의 최후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식화사업 벌여
70여차례나 연행…대중중심 투쟁 강조





















▲ 이재유 (1905~1944)
이재유는 함경남도 삼수군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뒷날 그는, 어릴 때 삼수군 서기 박기춘이 사회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뒤 주검이 버려진 것을 목격하고 일제체제에 반감을 갖게 됐다고 진술했다. 17살에 집을 떠난 이재유는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가 월사금을 내지 못해 그만둬야 했다. 다시 개성 송도고보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종교교육 강요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도쿄 니혼대에 입학한 이재유는 1927~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든다. 이재유는 유인물 배포 등으로 70차례나 연행될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1930년 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국내로 압송돼 징역 3년6개월형을 선고받는다.

1933년 5월 이재유는 형무소에서 만난 김삼룡을 비롯해 이현상, 이관술, 정태식 등을 끌어들여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트로이카’를 만들었다. 그는 1936년 12월 마지막으로 검거될 때까지 이를 통해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을 벌였다. 경성트로이카는 상부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확충하는 것에 주력하기보다는 활발한 대중활동 속에서 조직을 확대하는 양상을 보였다. 3년여 만에 500명의 검거자를 낳을 정도로 활발한 운동이었고, 그만큼 일제의 집중 탄압 대상이었다.

경성트로이카의 활동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직원들이 주도해 1933년 하반기 서울의 8개 고무·섬유 공장과 7개 학교에서 연쇄적으로 일으킨 파업과 동맹휴업이다. 이재유는 서울을 활동 중심지로 삼으면서도 인천과 함흥, 신의주 등에도 조직원을 파견해 노동운동을 이끌었고,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는 농민운동을 시도했다. 또 △일본제국주의 타도 △대토지 소유의 해소 △7시간 노동제 확립 등을 혁명의 주요임무로 삼았다. 또한 기관지 〈적기〉 등을 발행해 노동자와 학생층을 의식화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재유는 운동 방식과 대중에 접근하는 시각에서 차별성을 보인 인물이다. 트로이카는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3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알려졌지만, 이재유가 고안한 조직방식으로 보는 게 진상에 더 가깝다. 〈이재유 연구〉를 집필한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그는 운동가들이 직접 노동자가 되고 농민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3~5명 정도가 모였을 때 구성원들이 모두 지도자인 동시에 피지도자가 되어 서로에게 지도받는 수평적 결합 방식으로 대중적 기반을 확대한다는 개념이 트로이카”라고 설명했다. 엘리트 몇몇이 만든 지도부를 시작으로 수직적 계통을 만들어가는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고, 그가 파업을 조직하면서 노동자들을 ‘지도’한 게 아니라 ‘응원’했다고 표현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토착 사회주의자로도 평가받는 그는 소련 등지에서 들어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배경’을 내세웠던 이들이 대중 위에 군림하려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 1936년 12월 이재유(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를 체포한 경기도경찰부 고등과 경찰들이 농부 차림인 그를 세워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경찰들은 잠복 때 입은 복장을 그대로 걸치고 있다.






경기도 양주군에서 농부 행세를 하며 조직 확대를 꾀하던 이재유는, 1936년 12월 그가 파견한 인물이 이끌었던 함흥의 파업을 조사하던 경찰에 꼬리를 밟혀 생애 마지막으로 검거된다. 체포 당할 때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저항해 함께 살던 이관술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줬다. 이재유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에도 조선말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하며 옥중투쟁에 나섰다. 이재유는 1941년 형기를 마쳤지만 사상전향을 거부하는 바람에 석방되지 못하고 신설된 예방구금제도에 따라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됐다. 죽음 직전의 이재유를 업고 나온 이는 동지이자 옛 연인이며, 이관술의 누이인 이순금이다.

이재유는 구체적인 현실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왜 싸우는지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사창가로 팔려간 한국 여성을 구출한 적도 있다고 밝히면서, “어린 그녀들의 고기를 베어내서 파는” 짓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또 여성 직공들과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기도 했다.

올해는 이재유의 출생 100돌이다. 김경일 교수는 11월 일본에서도 〈이재유 연구〉가 번역돼 출간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이재유 남은 가족 없어 유공자신청 못해 가슴아파”

‘경성트로이카’ 참여한 이병희씨

“‘이놈들이 나를 열 번은 죽였다가 살려놨어’라고 하더라고.”















1933년 9월 서울 신설동 종연방적에서 500여명의 노동자 파업을 이끈 여성 노동자 이병희(87)씨는 70여년 전 마지막으로 본 이재유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파업을 주도하고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방면돼 활동을 계속하던 이씨는 1936년 경성트로이카가 와해할 때 다시 검거돼 독방에서 4년의 수감생활을 했다. 조사를 받던 이씨는 온통 피범벅이 되어 수용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봤다. 그런데 안면이 전혀 없는 그가 눈짓을 하며 “병희야, 나 이재유다”라고 하더란다. “이재유가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악랄한 고문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경성여상에 다니던 이씨는 15살에 위장취업한 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규모 여공 파업을 주도했다. 사회주의운동을 하던 사촌오빠 영향을 받은 이씨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취업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학력을 국민학교 졸업으로 속이고 국영기업인 종연방적에 입사했다.

이씨는 동료들 방을 돌며 “일본 놈들 식민지 된 것도 비참한데, 이렇게까지 착취당하고 살 수는 없지 않냐”고 밤새 설득해 파업을 이뤄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매일 이재유를 찾아가 활동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씨는 당시 여공들의 처지에 대해 “11시간 이상을 일하며 돼지우리 같은 기숙사에서 살아도 생활이 유지되기 힘들었다”며 “직공들은 기껏해야 16살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을 심하게 부려먹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재유에 대해 “참 착하고, 진실하고,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았다”고 평했다. “요즘은 좌익도 (독립운동 유공자로) 해준다는데, 이재유는 가족이 없어 유공자 신청도 못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 사촌오빠 등이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 출신인 이씨는 시인 이육사의 손녀뻘이 된다. 출옥한 뒤 베이징으로 간 이씨는 이육사의 국내 무기반입 계획을 돕다가 1943년 한번 더 체포됐다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이육사가 옥에서 숨을 거뒀다는 통보를 받고 달려가 주검을 수습했다. 이씨는 1996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았다.

이본영 기자
















신출귀몰 도피술 일제경찰 농락

족쇄 열쇠 만들어 탈주…마루밑에 굴 파서 숨기도

1936년 12월25일 이재유의 마지막 검거는 경기도경찰부의 다나카 고등과장을 우두머리로 한 경찰 32명이 농부,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으로 꾸며 잠복한 작전의 결과였다. 사상범 검거에 혈안이 된 당시 식민지 경찰이 그들의 수기에서 상투적으로 쓴 표현인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경찰이 이재유 체포에 그토록 안달한 이유는 조선공산당 재건 시도 등의 반일활동에 대한 두려움이 근본 이유였지만, 이재유한테 번번이 농락당한 ‘아픔’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재유는 1934년 1월 이순금의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지만 용변을 본다고 속인 다음 화장실 창문을 깨고 도망쳤다. 불과 며칠 뒤 다시 붙잡힌 이재유는 3월에 간수가 조는 틈을 타 서대문경찰서에서 달아나 정동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탈출을 모색하던 이재유는 마침내 4월13일 탈출에 성공해 2년 반 동안의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 탈출 과정은 비상한 계책의 승리였다. 밥알을 짓이겨 족쇄에 넣어 모양을 본뜬 뒤 우유통 뚜껑으로 열쇠를 만들어 족쇄를 풀었다. 탈출하던 날 저녁을 남겨 이질환자에게 주고, 그 환자가 한밤중에 간수를 졸라 화장실에 간 사이에 당당하게 경찰서 정문을 빠져나왔다.

탈출 직후 이재유가 숨은 곳이 트로이카의 협력자인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의 동숭동 관사였다는 점도 화제가 됐다. 이재유는 마루 밑에 굴을 파고 38일 동안 숨어 지내다 미야케가 체포되자 다른 아지트로 옮겼다. 경찰이 아지트를 덮치는 등 추격을 계속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1935년 1월 양주군 공덕리(현재 서울 창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남부지방의 수해 이재민으로 위장한 둘은 경상도 사투리까지 써가며 신분을 완벽하게 숨겼다. 당시 신문은 “대경성 지하에 숨은 이재유를 잡을 일이 까마득하다”며 치안당국의 답답함을 전하기도 했다. 이재유는 본적지 조사를 나온 경찰에게 태연하게 엉뚱한 이름을 불러주기도 했다.

이본영 기자









기사등록 : 2005-09-08 오후 05:44:11기사수정 : 2005-09-08 오후 05: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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