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노동에 대하여 : 난점과 자원들 / 루이 알튀세르/ 서용순 역
나는 맑스주의적 원리들을 설명하는 모든 작업(노동, travail)이 맞닥뜨리는 난점들 중 몇몇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후, 몇몇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몇몇은 종종 무시되곤 하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자원들을 검토할 것이다.
Ⅰ. 난점들
그 용어의 단순함과 그 설명의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맑스주의의 이론적 논문은 특수하고 불가피한 난점들을 보여준다. 이는 그 난점들이 이론의 고유한 특성, 좀 더 정확하게는 이론적 언설의 고유한 특성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A. 이론적 언설에서의 전문용어의 난점
맑스주의는 과학(역사적 유물론)인 동시에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과학적 언설과 철학적 언설은 그것에 고유한 요구들을 갖는다. 즉 그 언설들은 일상 언어의 단어들, 혹은 일상 언어의 단어들로 구성되어진 조합된 표현들을, 그러나 항상 일상적인 언어 안에서와는 다르게 기능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론적 언어 안에서, 단어들과 표현들은 이론적 개념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아주 엄밀하게는 단어들의 의미가 이론적인 언어 안에서 단어들의 통상적인 쓰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체계 내부에서의 이론적 개념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의해서 고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개념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에 그들이 가지는 이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러한 관계들이다. 이론적 전문용어의 고유한 난점은 단어의 일상적 의미의 배후에서, 항상 그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그것의 개념적 의미를 판별해야만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러한 난점은 이론적 용어가 순수하고 단순하게 하나의 일상적인 용어를 계속 사용할 때, 일반 독자들에게 감추어진다. 예를 들자면, 맑스가 "노동"과 같이 통상적인 단어를 사용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 단어의 (이데올로기적인) 공통된 자명함의 배후에서 노동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고, 노동이라는 단어가 서로 구분되는 여러가지 개념들 - 노동과정, 노동력, 구체노동, 추상노동 등의 개념들 - 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더 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전문용어가 양호할 때, 즉 잘 고정되어지고 더욱 포착 가능할 때, 그것은 동일한 단어 안에서의 일상적 의미와 (개념적인) 이론적 의미 사이의 혼동을 저지하는 적확한 기능을 담당한다. 전문용어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혼동을 저지하는 조합된 표현들을 벼려내면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노동과정, 추상노동, 생산양식, 생산관계 등등과 같은 표현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각각의 표현들 안에서는, 노동, 구체적, 추상적, 양식, 생산, 관계 등과 같은 일상적인 단어들 만이 눈에 띌 뿐이지만,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새로운 의미, 규정된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어들의 특수한 결합이다. 이론적 개념을 지칭하는 그러한 특수한 표현들을 생산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이론적 언설은 행해질 수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대상을 규정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개념들을 지칭하기 위해,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표현들을 제시해야만 했다 (예를 들면, 인식효과, 이론적 생산양식 등등).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그것을 행하였고, 또 그것을 해야만 했었다.
B. 이론적 언설의 난점
전문용어의 난점은 그 자체로 우리의 언설의 이론적 특성과 관련된, 더욱 심도깊은 또 다른 난점의 지표에 불과하다.
이론적 언설이란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는 효과를 가지는 언설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후에 출판될 이론적 전개들을 선취하는 몇몇의 세부사항을 제시하여야 한다.
우리는 현실적 대상들과 개별적 구체들만이 존재한다 - 말의 철저한 의미에서 - 고 말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이론적 언설은 현실적 대상들과 개별적 구체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맑스)이라는 궁극적 존재 이유를 가진다고 말하고자 한다. 추상적 역사, 혹은 역사 일반은 존재하지 않고(말의 철저한 의미에서), 단지 인류의 집적된 경험 속에서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회구성체들이라는, 구체적인 대상들의 구체적-현실적 역사만이 존재한다. 생산일반, 추상적 생산은 존재하지 않고(맑스), 단지 이러 저러한 결정(結晶)된 사회구성체 안에서 서열화된 생산양식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결합-조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결정된 사회구성체로서 우리는 1848년의 프랑스(맑스, 브뤼메르의 18일,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혹은1905년, 1917년의 러시아(레닌)등을 들 수 있다. 모든 인식, 즉 모든 이론적 언설은, 이러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 - 혹은 이 대상들의 개별성이거나 (한 사회구성체의 구조), 혹은 그 개별성의 양식들(그들의 내부에 이러한 사회구성체가 존재하는 연속적인 국면들) - 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점은 바로 여기인데,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대상이 직접적인 소여도 아니고, 단순한 추상도, 일반적 개념들의 특수한 소여들에의 적용도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관념론과 경험론의 입장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인식의 생산 과정 전체의 결과인데, 이 결과는 맑스가 "결정들의 다양성의 종합" - 이 종합이 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 인식([1857년 서문])이기 때문에 - 이라고 부른 것이다. 맑스가 그렇게 "종합"이라고 부른 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결정"들은 무엇인가?
그 종합은 두가지 형태의 인식의 요소(혹은 인식의 결정)의 정확한 조합-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두 요소를 잠정적으로, 우리의 설명의 명확성을 위하여,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인 요소들과 경험적인 요소들, 혹은 다른 표현을 쓰자면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인 개념들과 경험적인 개념들이라고 칭할 것이다.1)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개념들은 결정들, 혹은 추상적-형식적 대상들에 관계하고, 경험적 개념들은 구체적 대상들의 개별성의 결정들에 관계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생산양식 개념은 이론적 개념이며, 철저한 의미에서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전체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식에 필수불가결한 - 전체 사회구성체는 여러가지 생산양식의 결합에 의하여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 생산양식 일반에 관계한다고 말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은 이론적 개념이고, 철저한 의미에서의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철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구성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자본주의 생산양식 등의 지배 하에 놓여진 사회구성체 전반에 대한 인식에 필수 불가별한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에 작용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맑스의 다른 모든 이론적 개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생산양식, 생산력 (혹은 생산의 기술적 관계), 생산의 사회적 관계, 정치적 심급, 이데올로기적 심급,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 심급들의 접합 개념, 사회구성체의 개념, 국면, 실천, 이론의 개념 등등의 개념들 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구체적 대상의 구체적 인식이 아니라, 결정들에 대한 인식, 혹은 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 인식의 생산에 필수 불가결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들 (우리는 대상들이라고 말할 것이다)을 우리에게 공급한다. 이 대상들이 추상적-형식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본론에서, "추상" 안에서 움직이고, "형태"들과 "발전된 형태"들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맑스 자신에 의해서 사용되어진 전문용어를 확인하게끔만 하려 한다.
경험적 개념들은 구체적 대상들의 개별성의 규정들에, 즉 어떤 사회구성체가 그 자신을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이러저러한 형상, 윤곽, 개별적인 배열들을 나타낸다는 사실들에 관계한다. 따라서 경험적 개념들은 철저한 의미의 이론적 개념들에 본질적인 그 무엇 - 명확하게는 구체적 대상들의 (철저한 의미에서의) 결정들 - 을 추가한다. 우리가 설명한 것과는 반대로, 우리는 이론적 개념들 아래에 경험주의와 유사한 어떠한 것 - 명확하게는 경험적 개념들 - 을 재도입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애매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이후의 작업 속에서 수정되어질) 이 명칭이 우리를 오류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 경험적 개념들은 순수한 소여들이나, 현실의 순수하고 단순한 복사판, 혹은 현실의 순수하고 단순한 직접적 독해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수준과 정도의 정교화를 포함하는, 인식과정 전체의 결과이다. 경험적 개념들은 확실히 어떠한 구체적 인식도 관찰과 경험, 즉 그것들의 소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든 위대한 노동자운동의 지도자
들 이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 전체를 귀속시킨 구체적인 조사와 연구에 일치하는, 그리고 맑스, 엥겔스, 레닌의 "사실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경험적 연구에 일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이다) 절대적인 요구를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적 대상들은 직접적인 경험적 조사의 순수한 소여들로 환원될 수 없다. 사실상, 조사나 관찰은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조사나 관찰은 그것에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관찰, 분류, 기술적 합성의 법칙 안에서, 관찰과 경험의 장을 구성하는 이론적 개념들의 인도와 통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조사와 관찰, 게다가 경험은 그렇게 마침내 경험적 개념을 생산하게 될 이후의 전환 작업의 원재료로 계속해서 정교화되어지는 자료들만을 우선적으로 제공한다. 그러므로 경험적 개념들의 이름 하에서 우리는 최초의 자료가 아닌, 그것의 연속적인 정교화의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고, 최초의 자료와 획득된 원재료가 이론적 개념들의 개입 효과에 의하여 경험적 개념들로 전환되어지는 그 자체로 복잡한 인식 과정의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론적 개념은 이러한 개입에 있어서 그것들 자체로서, 또한 그곳에 현존하면서, 방법의 규칙, 비판과 해석의 규칙으로 실험적 합성의 형태 하에서 이러한 정교화 작업 안에서 작동한다.2)
경험적 개념들에 대한 이론적 개념들의 관계는 고로 어떠한 경우에도 외재성의 관계가 아니고 (이론적 개념들은 경험적 소여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연역의 관계도 아니며 (경험적 개념들은 이론적 개념들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포섭의 관계 또한 아니다 (경험적 개념들은 이론적 개념들의 어떤 특수한 경우들처럼 이론적 개념의 일반성의 보족적인 특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잉여가치의 실현"에 대해 말하는 맑스의 표현과 가까운 의미에서) 경험적 개념들은 구체적 대상의 구체적 인식 안에서 이론적 개념들을 "실현"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것 안에서의 이념의 사변적 "실현"이라는 헤겔적 개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러한 "실현"의 변증법은 당연히 과학들의 실천에 관한 이론과 과학사의 이론의 기초 위에서만 생산될 수 있는 긴 해명들이 필요하다. 이 점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한 구체적 대상의 구체적 인식은 맑스가 말한 "종합"으로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종합은 잘 가공된 경험적 개념과 결합된, 획득된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개념들의 종합이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의 추상적-형식적 개념들에 조응하는 특수한 대상들의 인식에 불가피하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구체적 대상의 구체적 인식이 아니다.
당분간 이러한 규정들은 우리가 이론적 언설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들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도입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우리가 조금전 추상적-형식적 대상들과 구체적-현실적 대상들 사이에 가한 구분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이론적 언설은 그 수준에 따라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대상에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상에도 관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체적인 현실의 역사의 과학적 분석 - 가령 1966년의 프랑스 사회구성체 - 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언설을 잘 구성할 것인데, 이는 그 언설이 우리에게 하나의 인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언설은 현실적-구체적 대상에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맑스의 자본론은 하나의 사회구성체(하나의 현실의 구체적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한다. 이 경우, 『자본론』은 형식적인 혹은 추상적인 대상에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혹은 추상적인 대상에 관계하는 수 많은 이론적 언설들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생산양식 개념에 관계하는, 한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심급들(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한 생산양식으로부터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의 형태들에 관계하는 언설들 등등 … 맑스주의적 이론의 일반적 원칙들에 대한 언설 역시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에 관계한다. 말하자면, 그러한 언설은 어느 구체적 대상(어떠한 사회구성체, 계급투쟁의 어떠한 국면)이 아닌 원칙들, 즉 맑스주의의 이론적 원칙들, 그러므로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관계한다.
만약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모든 언설들을 일반적으로 이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아주 중요한 구분을 실행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현실적-구체적 대상들에 관계하는 언설들과,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관계하는 언설들 간의 구분이다.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작용하는 언설들은 이론적 언설, 혹은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이라고 불리워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필수적이다. 한편으로, (구체적인) 첫번째 언설들은, (추상적인) 두번째 언설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인) 두번째 언설들의 범위는 첫번째 언설들의 대상들을 무한히 넘어선다. 우리는 자본론 안에서의 맑스의 이론적 언설의 실례를 취함으로써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인 자본주의 생산양식(형식적-추상적 대상)의 이론은 확실히 수 많은 구체적-현실적 대상에 관한 인식, 이 경우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구조화된 모든 현실 사회들과 모든 사회구성체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그 반면에 하나의 현실대상(예를 들면 1966년의 프랑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의 도움없이는, 다시 말해 최초의 구체적 인식으로부터 그곳에서 작동중인 추상적 인식을 추출함이 없이는, 자동적으로 또다른 하나의 현실대상(예를 들면 1966년의 영국)에 대한 인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어려운 지적들 - 확실히 그것은 어렵지만 나는 명백하기를 바란다 - 로부터 우리는 두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번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의 일반적 원칙들에 대해서 행해진 언설은 그것의 경계 자체들 안에서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언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구체적 대상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개인숭배"의 역사 등등)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형식적-추상적 대상, 즉 모든 현실적-구체적 대상과는 독립적으로 사고된 맑스주의의 기본적 원칙들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결론은, 철저한 의미의 이론의 속성은 엄밀하게는 하나의 대상 혹은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관계한다는 데 있다. 부언하자면, 그것은 현실적-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이어지는 계기 안에서 현실적-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주석을 달 수 있고, 주석을 달아야 하는 형식적-추상적 대상에 대한 인식, 혹은 이론적 인식, 여러가지 관계들,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들에 대한 인식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인식, 혹은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이 형식적-추상적 대상들, 개념들과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들에 관계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 이론적 인식이 모든 일련의 가능한 현실적-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구체적 인식에 필수적인 이론적 수단들을 제공하는 툭수한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하면서,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은 그러므로 가능한 현실적 대상들 - 이러저러한 사회구성체, 혹은 현시점에서의 여기에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구체적 상황"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저러한 다른 사회구성체, 혹은 다른 장소에서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질 어떤 다른 상황까지도 - 에 관계한다. 단, 이러한 현실적 대상들이 고찰된 이론의 추상적 개념들에 적절히 종속된다는 조건에서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론의 난점이다. 철저한 의미에서 이해된 이론은 결코 이론을 예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예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론은 주어진 현실대상 전체를 넘어서며, 그것의 개념들에 종속된 가능한 현실대상들 전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의 난점은 비단 그 개념들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그 대상들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성격에 연결되어 있다. 맑스주의적 이론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이론적 원칙들을 정의하는 것,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들에 대하여 작업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대상들을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상적 대상들의 예를 들 수 있다.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과학, 철학, 변증법, 생산양식, 생산관계, 노동과정, 추상노동, 구체노동, 잉여 가치, 경제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구조, 이론적 생산양식, 이론적 실천, 이론적 구성, 이론과 실천의 통일 등등이 그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대한 지식은 "순수한" 관념들에 관한 사변적이고 사색적인 인식과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현실적 대상들만을 염두에 두고, 단지 그것이 현실적-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형식적이며 추상적인 이론적 개념들과 이론적 수단들을 벼려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인간 정신"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론적 노동과정의 산물이고, 물질적 역사에 복종하며, 그것의 조건들과 결정적인 요소들 가운데 비이론적 실천들(경제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그 실천들의 결과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일단 생산되어지고 구성되어진 이들 형식적-이론적 대상들은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노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며, 그들의 필연성과 내적 관계 안에서 분석, 사고되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어야만 하며, 그것으로부터 모든 결과들, 즉 모든 풍요함을 끌어내기 위해 발전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맑스는 우리에게 자본론 안에서 그러한 노동의 예를 제시한다. 맑스는 그 안에서 하나의 형식적-추상적 대상(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한다. 그것의 "형태들"을 발전시키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결과들을 도출해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현실적 대상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속하는 사회구성(체)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는 것은 맑스가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노동을 수행했기 때문, 즉 그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형식적-추상적 대상에 대한 인식, 그것의 모든 "형태들"과 결과들에 관한 인식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다시 좀 더 멀리 나아가보자.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이론적 대상에 대한 노동을 수행하면서 맑스는 역시 그리고 동시에 더욱 일반적인 이론적 대상에 대한 노동을 수행했다. 생산양식의 개념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역으로 우리에게 바로 이 대상에 대해, 그리고 다른 여타의 대상들 - 생산양식 개념이 이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 에 대해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는 다른 여타
의 생산양식에 대한 - 봉건적 생산양식,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는 맑스 자신이 그곳에 이르지 못했을 지라도, 이론적 생산양식의 개념 그리고 나머지 종속적인 개념들과 같은 맑스의 사상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대상에 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은 생산양식들의 그러한 여러 다른 개념들에 대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대해 계속해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 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론의, 그리고 철저한 의미에서의 모든 이론적 언설의 근본적인 난점이다. 당연히 이 난점은 상식과 충돌하는데 그것은 이 난점이 역설적인 혁신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그 혁신이란 역시 그리고 동시에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에 대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현실적-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착상이다. 그것을 통해 이 난점은 명백히 특수한 존재형태, 즉 현실적-구체적 존재 형태와는 구분되는 형식적-추상적 대상들의 존재형태라는 착상을 도입한다.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의 착상 그 자체인 이러한 착상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고, 또한 무엇보다도, 실제적, 지속적으로 이론적 텍스트의 독해 안에서 그것을 고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주의의 유혹 - 그것에 따르면, 현실적-구체적 대상 이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에 저항하고, 또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자명성"을 비판하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정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론의 수준, 즉 형식적-추상적 대상의 수준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C. 이론적 방법론의 난점
이론에 고유한 또 하나의 난점은 그 대상에 뿐만 아니라, 이론이 그 대상을 다루는 방식, 즉 그 방법론에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철저한 의미에서 이론적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언설이 이론적 대상을 다루는 것 만으로는 사실상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자면, 하나의 이론적 대상은 동일하게 이데올로기적이거나 교육적인 언설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언설들을 구별지워 주는 것은 바로 이 언설들이 이론적 대상을 취급하는 양태, 즉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몇십년 동안 수백만의 당원들에게 맑스주의를 가르치는 거대한 역할을 수행했던 스탈린의 소논문(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과 같은 언설은 교육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그 대상을 다룬다. 그것은 맑스주의의 기본원칙을 일반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잘 설명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정의들을 부여하고,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구분들을 행한다. 그것은 간단하고 명확하다는, 따라서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술순서"(맑스)의 필연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 다시 말해 그 원리들과 개념들을 서로 연결짓는 내적 필연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 맑스주의의 원리들을 나열하는 큰 결점을 노정한다. 그런데, 개념들을 서로 연관짓는 (진술)순서는 그 개념들의 필연적인 관계들, 즉 그들의 속성 자체에 대한 관계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순서는 각각의 개념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맑스주의적 과학(역사적 유물론)과 맑스주의적 철학(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구분은 스탈린의 텍스트 안에서 잘 지적되어 있지만, 그들의 내적 관계와 그들 사이의 고유한 필연성은 진정으로 사고되거나 증명되고 있지 않고, 유물론과 변증법의 원리들은 잘 주장되고 있지만, 그들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는 그 특수한 내용들 안에서 설명되지도 증명되지도 않는다.
확실히, 교육적 설명의 방법론은 사실상의 실천적인 이유들로 인해 상당수의 관계들, 아니면 개념들 사이를 연결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필연적인 관계들을 어둠 속에 버려둘 수 있다. 권리상의 이유로 인해 이론적 설명의 방법론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론적 설명의 방법론은 엄밀하게 이 관계들의 필연성을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이 방법론의 존재이유이다. 맑스가 자본론 안에서 연구 방법론(혹은 연구와 발견의 방법론)과 구분되는 "진술 방법론"이 모든 과학적 언설(우리는 또한 철학적 언설이라고도 추가할 수 있다), 즉 모든 이론적 언설의 구성 부분이었다고 썼을 때 그는 이 점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언설의 난점은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그 대상의 형식적-추상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순서"의 엄밀성, 즉 그것의 진술 방법론과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통해 거론되어졌던 것은 동일하게 방법론을 통해서도 거론되어져야 한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방법론은 필연적으로 형식적-추상적이다.
주지하듯이, 그것은 이론적 언설이 오로지 이론적 추상의 수준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론적 언설은 수 많은 가능한 "구체적" 사례들에 의해 예증되어 질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맑스는 우리에게 자본론 안에서 그 길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현실적-구체적 대상으로부터 취해진 실례들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예증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 현실적-구체적 대상이란 다름 아닌 19세기 영국의 사회구성체이다. 우리는 좋은 교육적 성격을 지니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이 예증의 방법을 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추상적인) 이론적 대상을 그것의 모든 "구체적인" 예증들로부터 잘 구분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리고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의 대상은 그것의 예증인 현실적 대상들로 환원될 수 없고 현실적 대상들과 혼동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예증들을 예증을 위한 예증, 즉 우리가 맑스와 함계 정의한 의미에의 구체적 지식이 아닌 단순한 예증들로만 다루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는다면, 결국 자본론을 읽는 역사가들을 그 희생물로 만드는, 그 유명한 오해와 같은 많은 오해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다. 역사가는 확실히 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 지식을 목표로 한다. 말하자면 어떤 국면 속에서의, 혹은 한 시대 전체를 점하고 있는 국면들의 변증법 안에서의 어떤 사회구성체가 그 대상이 된다. 혹은 필경 자본론은 구체적인 역사에 관련된 몇개의 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의 노동에 관한 장, 매뉴팩쳐와 대공업,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 등등이 그러하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생산되어지고 설명되어졌다고 여겨지는 경험적 개념들 안에서 작동하는 맑스주의적 역사이론을 그 곳에서 보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장들이 그런 점에서 역사가들을 유혹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맑스주의적인 구체적 역사에 관한 장들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들이 일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역사 안에 가득찬 경험적인 연대기적 묘사와 마치 친형제들처럼 닮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맑스는 우리에게 맑스주의적인 역사에 관한 장으로서가 아니라, 이론적 개념들 -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 자본주의의 비자본주의적 기원 등등의 개념들 - 의 단순한 예증들로서 그것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 역사에 관한 장인 것처럼 보이는 곳(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에서 그가 필요로 하던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가 필요로 하던 것들은 예증하는 것에 할당된 사실들, 즉 경험적 현실들 안에서 (영국에서의 노동과 같은) 하나의 개념들을, 혹은 (대공업으로의 이행 혹은 본원적 축적과 같은) 부분적인 계보학들을 배가시키는 것에 할당된 사실들이다. 잘 드러난 바와 같이3), 그것들은 하나의 구체적 역사를 위한 요소들이고 맑스주의적 역사를 위한 하나, 혹은 몇몇의 원재료들이지만, 맑스주의적 역사에 관한 장들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적인 구체적 역사의 예들을 찾고자 한다면, 합당하게 그것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브뤼메르 18일과 같은 맑스의 저작들 안에서, 혹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1917년에서 1922년에 걸친 수 많은 정치적 분석들과 레닌의 역사적 분석들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론적 개념의 구체적 예증과 맑스주의적 역사 사이의 혼동들이 저지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이다.
D. 마지막 난점 : 이론의 혁명적 독창성
난점에 대한 이 장을 마감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맑스의 어떤 이론적 텍스트는 그것의 대상과 방법론의 이론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는 난점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난점을 포함한다. 이 또다른 난점은 바로 맑스주의적 이론의 혁명적 독창성이다.
우리는 이론적 언설에 의하여 채택되어진 단어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이 단어들이 이론적 개념들로서의 의미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독해는 그 단어들이 일상생활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철저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언설의 대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았다. 그것은 이러한 대상이 형식적-추상적 대상이라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독해는 이 대상이 현실적-구체적 대상인 것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이론적 언어(전문용어)와 이론적 대상의 특수성은 친숙한 "자명성"의 개입에 의하여 환원되고 파괴된다. 이들 자명성은 "일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자명성들, 즉 경험주의 이데올로기의 자명성들이다.
환상을 품어서는 않된다. 맑스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목소리를 높여 맑스주의 이론은 아무런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단 맑스주의의 명백한 적들만이 아니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이론의 자명성이라는 확고히 자리잡은 강력한 "자명성들"을 통해 맑스주의를 "해석"하고 맑스의 텍스트들을 읽을 때의 본래의 맑스주의의 투사들 역시 그러하다. 두가지 예만을 취해보자. 아무런 곤란이나, 주저함 망설임도 없이 진화주의 혹은 "인간주의"의 도식 안에서 자생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읽고, 해석하려 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있다면, 결국 그들은 어쨌든 철학에 있어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과학에 있어서, 이론적 대상들을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러므로 또한 그 대상들의 구조 안에서, 맑스가 아무런 새로운 진실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사상에 있어서의 철학적인 비범한 독창성을 기존의 흔해빠진 "명확한" 사상 형태로, 말하자면 지배적인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맑스주의적 철학과 그 과학적 귀결의 혁명적 독창성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원에 명확하게 저항해야만 하고, 그러한 환원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워야만 하고, 맑스의 사상을 고유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국에는 그 사상으로 하여금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혁명적 사상이게끔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술해야 한다.
마지막 난점은 바로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왜냐하면 200년동안 서구사상 전체를 지배해온 진화주의, 혹은 "인간주의"와 같은 이론적 이데올로기의 "자명성"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맑스가 헤겔주의자(헤겔주의는 "부자"의 진화주의다)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맑스가 진화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맑스가 이론적으로 "인간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리 쉽지 않다. 그는 헤겔주의자도, 진화주의자도 아닌, 고로 정의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맑스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상가인지 지적하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지적하려고 시도할 때, 그것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제한된 것이라고 해도, 맑스주의의 원칙들을 취급하는 모든 이론적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근저에 이러한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 지배적인 이론적 이데올로기 (그것이 진화주의든, 인간주의든 혹은 관념론의 다른 형태들이든) 의 거짓 "명증성"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한, 그러므로 또한 이론적으로 혁명적인 맑스의 사상의 가장 귀중한 유산들을 저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러한 난점들에 맞부딪쳐야 하고 끊임없이 맑스의 사상을 질식시키고, 환원시키고, 파괴할 목적으로 그것에 위협을 가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것은 상상적인 난점이 아니다. 이는 혁명적 실천의 난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고 객관적이면서도 그 나름대로 현실적인 난점이다. 이 세상에서는 "토대"도 사회도 그 사상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라는 것이 그 "토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혁명 이후에는, 그 새로운 사회를 확립하고, 강화하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엄청나게 길고 어려운 투쟁이 필요하다. 사상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같다. 이론적 혁명 이후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확립하는 사상이 문제가 될 때, 그 새로운 사상을 확립하고, 인정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안에서의 엄청나게 길고 어려운 투쟁이 필요하다. 이 긴 투쟁에서 승리하기 이전에는, 사상에서의 혁명도, 사회에서의 혁명도 하나의 커다란 위험에 놓여진다. 그 위험이란 낡은 세계에 의해 질식되는 것, 그리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것의 법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맑스가 과학과 철학 내에서 실현한 이론적 혁명을 끊임없이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종속시키려는, 즉 그것을 질식시키고 파괴하려는 낡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환기시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론적 저작이 갖는 또한 피해갈 수 없고 필연적인, 그것이 어려운 올바른 이유들 - 설령 오류와 누락, 실수와 한계라는 부정적인 이유들을 고려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 이다. 이러한 이유들은 한편으로는 그 대상과 방법론의 이론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의 사상이 갖는 혁명적 독창성과 관련되어 있다.
Ⅱ. 자원들
그러나 여기서 다른 문제가 떠오른다. 우리가 맑스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정의와 설명들을 시도하려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창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견지하고 분석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정의와 설명을 따를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원칙들이 미리 존재해야만 하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가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맑스가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에 대해 숙고한다. 고로 맑스주의적 이론과 실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원칙들이 존재하는 지점, 즉 맑스주의적 이론과 맑스주의적 실천 안에서 그 원칙들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답은 그것의 단순성 속에서 맑스주의의 원칙들의 특성 자체에까지 관여하는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1) 우리는 우선 맑스주의적 원칙들이 생산되어지고 설명되어진 지점, 즉 맑스와 그의 위대한 제자들의 저작들 속에서 맑스주의의 원칙들을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저작들의 독해가 그 즉시에 많은 난점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 저작들을 조금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난점들 중 첫번째 것은 맑스 자신의 저작과 관련된다. 맑스의 초기 저작들 (이른바 "철학적" 저작들 혹은 "청년기"의 저작들)과 공산당 선언,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등의 후기 저작들 사이에는 실제로 아주 민감한 이론적 난점들이 존재한다. 동일하게, 두가지 유형의 저작들 사이에는 대상들에 관련된 민감한 난점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맑스는 청년기 저작들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풍부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철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하지만, 자본론 안에서는 그것들에 대해 아주 조금 말하거나,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철학 혹은 이데올로기에 관한 맑스주의의 원칙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텍스트들에 의거해야 하는가? 그 시기가 언제이든, 명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는 텍스트들에 의거하는가? 혹은 그것에 대해 아주 조금 말하거나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아주 심각한 불편을 노정하는 후기의 텍스트들에 의거하는가?
맑스의 저작들 속에서 맑스주의의 원칙들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고로 다음과 같은 선결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했어만 한다. 우리가 맑스주의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맑스의 텍스트는 어떤 것들인가?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맑스 자신에게 다름과 같은 간단하고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졌어야만 한다. 언제부터, 어느 저작으로부터, 1840년대의 다른 모든 부르조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관념론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고하던 맑스가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단절하고 자신의 혁명적 이론의 초석을 놓았는가? 만약 우리가 이러한 단절과 혁명 이전의 텍스트들 - 예를 들면 "청년기" 저작들의 관념론적이고 인간주의적인 텍스트들 - 의 내용과 글귀를 맑스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서명의 물신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또한 맑스 저편으로 추락하는 것임은 사실상 명확하다. 하나의 텍스트를 맑스주의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맑스의 서명이 아니라 철저한 의미에서의 맑스의 "사상"이다.
전 맑스주의적 텍스트들과 맑스주의적 텍스트들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 두가지 부류의 텍스트들을 잘 구분하는 것, 그것은 바로 맑스의 저작 자체에 대한 비판의 작업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필수불가결한 비판의 작업은 이미 개시되었다.4)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모든 이론적 언설은 이러한 선결적인 비판의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이 선결적인 작업을 수행한다면 그 작업은 다음과 같은 두번째 질문에 대해 게속해서 대답할 능력이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맑스의 맑스주의적 텍스트들(예를 들면 자본론)로부터 그 텍스트들이 직접적으로도, 명확하게도, 취급하지도, 서술하지도 않는 몇몇 맑스주의적 원칙들을 도출해 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어떠한 권리로, 그리고 어떠한 방식을 통하여 그것을 할 수 있는가? 한 예로 철학의 맑스주의적 개념화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청년기"의 저작들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철학이 폭넓게 문제시되지만 자본론 안에서는 아주 조금, 혹은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맑스의 청년기 저작이 "맑스주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철학에 대한 그 저작들 속에서의 정식화를 맑스주의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는 그것들을 견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맑스주의적 철학을 정의할 만한 것을 찾아 자본론 안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론은 우리에게 맑스주의적 철학의 원칙들을 그것들 자체로서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론이 다루는 것은, 과연 이 저작의 대상이 아니었던 철학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맑스주의 철학은 진정으로 자본론 안에서 "실현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주의 철학이 그 안에서 작동 중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말할 것이고, 맑스주의 철학은 자본론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은 자본론의 이론적 실천 안에서, 더 정확하게는 자본론의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 그것의 대상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방식, 그 문제들을 취급하고 해결하는 방식 안에 현존한다고 말할 것이다. "실천적인 상태"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어서는 안된다. 이 경우에, 그 표현은 하나의 과학적 저작, 하나의 이론적 실천 안에서의 철학의 존재양식, 즉 이론적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지 조금전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고로 용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실천적인 저작 안에서의 존재양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론 안에서의 "실천적인 상태"로의 맑스주의 철학의 존재는 자본론의 대상의, 문제들의, 과학적인, 따라서 이론적인 방법론의 고유한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철학이 자본론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맑스주의 철학의 내용이 자본론 안에 분명히 현존하지만, 그것이 그 이론적 형태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유물론 (맑스주의 철학) 은 자본론 안에서 역사적 유물론 (역사에 관한 과학) 과는 독립적으로 자신을 구별하면서 그 자체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을 분석하는 역사적 유물론의 장 안에서, 그 장에 의하여, 그 장을 통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자본론에서 철학에 대한 맑스주의적 개념화를 권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자본론 안에서 "실천적 상태"로 맑스주의 철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자본론 안에 맑스주의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철학의 맑스주의적 개념화를 도출해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맑스주의 철학이 거기에 내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형태로서, 즉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현존한다면, 우리가 굳이 거기에서 철학에 대한 맑스주의적 개념화를 "도출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론적인 상태(형식)가 아닌 "실천적인 상태"(내용)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용에 적합한 형태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 내용을 명확히 해야하고 그 내용에 그에 일치하는 형태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이론적 노동이다. 그것은 경험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추출, 추상의 작업일 뿐만 아니고, 커다란 노력들을 요구하는 전환과 생산이라는 정교화의 작업이다. 어쨌든 우리는 맑스주의 철학이 그 형태, 고로 그 이론적 정식화와는 독립적으로 실천적인 상태로, 현실태로서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이 작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가능성을 확인할 때 우리는 ("그러하다"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고 맑스주의 자체의 하나의 기본적 원칙, 즉 최후에는 철학과 과학의 관계,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관련된 원칙을 확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원칙이란 바로 철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이전에 우선 과학의 실천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맑스주의 철학의 원칙들에 대하여 방금 논의되어진 것이 맑스주의의 수 많은 다른 원칙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정교화, 전환, 이론적 생산이라는 커다란 작업을 통해 "실천적 상태" - 맑스와 그 계승자들의 텍스트 안에서 우리에게 원칙이 제시되는 것은 이러한 상태에서이다 - 로부터 그 원칙들을 도출해야 하는 필연성에 직면하게 된다. 몇몇의 본질적인 원칙들(예 : 철학, 이론과 실천의 통일 등)에 해당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명백하게 그것의 결과들에 해당한다. 맑스는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의 학자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직 종교만이 "모든 것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의 과학적 이론은 정의상 항상 또다른 말할 것들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론은 문제들의 해결책 안에서 조차 그것이 해결한 것과 동일한 만큼의, 아니면 그것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하는 한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빈번하게 몇몇 맑스주의적 개념들과 그들의 결과를 정의하기 위해 맑스와 그 계승자들의 저작들로부터 그 문제들을 도출해내고 이론상에서의 정교화와 이론적 생산의 복잡한 노동을 통하여 그 효과를 확장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어렵고 필수불가결한 작업은 다른 곳에서 초보적인, 고로 불완전한 형태로 개시된 바 있다.5) 그러나,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모든 언설은 이러한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대개의 경우에 맑스에 의하여 놓여진 "초석"(레닌)들을 그대로 옮겨오거나 개작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당연히 결정적인 지적인데, 잘 알다시피 우리는 맑스의 저작들, 그리고 자본론과 홀로 마주하고 있지 않다. 내가 방금 암시한 정교화의 작업은 오래전부터 시도되어졌고, 맑스의 위대한 제자들의 이론적 저작들 안에 그 결과들이 담겨있다. 우리는 일례로 엥겔스와 레닌의 저작들 안에서, 자본론 안에서 "실천적 상태"로 남아 있는 원칙들 중 몇몇에 명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만한 것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반 뒤링론, 자연변증법 그리고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우리에게 더 더욱 명확한 표현으로 자본론에서 암시적으로 남아있는 맑스주의 철학의 본질, 이론과 실천의 통일 등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역사적 유물론에 속하는 다른 원칙들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예로 사회구성체의 개념, 전체 사회구성 속에서의 몇가지 생산양식의 결합의 개념을 들 수 있는데, 레닌은 엄밀한 이론적 가공을 통하여 맑스로부터 이 개념들을 도출해 내는 동시에 그것들을 정식화했다.
맑스주의적 이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우리가 맑스와 그 계승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성과들을 잘 구분하고 기입하는 것을 통하여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여야 한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맑스의 계승자들의 저작에 이론적인 "추출, 정교화"의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이론적 내용들에 일치하는 이론적 형태들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 저작들 안에서 "실천적 상태"로 존재하는 이러 저러한 이론적 요소들을 그렇게 추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만약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추출"이 아니고 하나의 진정한 정교화라면, 그 작업은 이미 완전히 준비된 내용을 짝지우기에 적합한, 치수에 맞추어진 형태의 생산에 제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고객의 치수에 따라 상의를 선택하듯이 그것에 일치하는 형태를 연달아 부여하기 위해 이미 정확한 내용을 감정하는 것만이 문제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사실상 충분하지 않다. 순수한 내용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내용은 어떠한 형태 안에서 항상 미리 주어져 있다. "실천적 상태"로 존재하는 이론적 내용에 일치하는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거의 언제나 두가지의 결합된 작용을 전제한다. 유일하고 동일한 과정 안에서의 낡은 형태의 비판적인 정정과 새로운 형태의 생산이 그것이다. 그것은, 더욱 일치하는 새로운 이론 형태의 생산이란 낡은 형태의 비판, 즉 그 불일치와 그 불일치의 원인들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것, 하나의 이론적 언설 내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이론적인 내용을 대상으로 할 때 조차도 이론적인 정교화 작업은 실천적인 상태로 주어진 것의 비판적인 정정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울 것이 없다. 이론적 분야 전체가 그 발전 속에서 전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이다. 그것이 혁명적일지라도, 한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철학은 항상 어느 곳에선가, 기왕에 존재하는, 즉 역사적, 이론적으로 규정된 어떤 말과 개념의 세계 안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혁명적일지라도 모든 새로운 이론이 그 근본적인 독창성을 사고하고 표현할만한 것을 구하는 것은 바로 처분가능한 용어들, 개념들과의 관련 하에서이다. 낡은 사상체계의 내용과는 반대로 그것을 생각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모든 새로운 이론은 그 자신이 곧 전복시킬 기왕에 존재하는 이론체계의 몇몇 형태들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내용을 사고해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맑스도 그의 후예들도 모든 이론적 생산의 변증법을 지배하는 이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맑스의청년기 사상에서의 전 맑스주의적 내용들을 기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원칙 체계의 논리와 일관성의 이름으로, 그 내부에서 새로운 내용이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몇몇 형태들을 비판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물론 맑스의 성숙기 저작과 그 후예들의 저작 안에서의 맑스주의의 이론적 원리들의 "실천적 상태"로의 몇몇 존재 형태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실천적인 상태"의 이론적 내용에 대한 적합한 형태의 생산 전체가 결국 동시에 그 형태 하에서 그 내용이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낡은 형태의 비판적인 정정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잘 파악해야만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 정정의 작용은 맑스와 그 후예들의 저작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저작들의 그 자체에 대한 적용과 투사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용이란 아주 정확하게는 덜 가공된 형태들 위에 더욱 잘 가공된 형태들을 적용하는 것이고, 더 나은 표현을쓰자면, 덜 가공된 개념들 위에 더욱 잘 가공된 개념들을 적용하는 것, 혹은그 언설들의 몇몇 표현들 위에 그들의 이론적 체계를 적용하는 것 등등이다. 이러한 적용은 곧바로 정정이 감소시킬 수 있는 "빈칸"들, "속임수"들 그리고 공백들과 불일치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든 작업은 동시에 이루어져야한다. 가장 잘 가공된 개념들과 형태들, 이론적 체계 등을 명확히 함에 의해서 마침내 이러한 정정은 수행되어지는 것이며, 그 대상을 고정시키는 형태들과 개념들 그리고 체계들에 명확성을 부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바로 그러한 정정이다. 그것의 실례들을 제시해야 하는가? 44년 수고와같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의 개념 체계에 대한 자본론의 개념 체계의 적용을 통하여 비로소 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이론적 단절이 가시화된다. 아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외된 노동" 개념의 그리고 결국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소외" 개념의 이데올로기적이고 비과학적인 성격이 가시화되는 것은 (44년 수고에서 나타나는) "소외된 노동"의 개념에 대한 (자본론에서나타나는) "임금노동" 개념의 적용에 의해서 이다. 같은 방식으로, 자본론 자체 내부에서도, 단독으로 사용되어진) 노동 개념이 자본론 안에서단지 하나의 단어, 고전 정치경제학과 헤겔철학의 개념 체계에 속하는 낡은형태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역시 자본론 안에 존재하는)노동 개념에 대한 노동과정, 노동력, 구체노동, 추상노동, 임금노동 등등의양호하게 정의된 개념들의 적용에 의해서이다. 부언하면, 맑스는 자본론안에서 그러한 낡은 형태를 이용하였지만, 그것은 이 개념을 무익하게 하고,그것에 대한 비판을 구성하는 새로운 개념들에 가 닿기 위해서였다. 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맑스주의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우리가그것의 수많은 예들을 보았듯이 노동의 철학, "인간에 의한 인간 창조"의 철학, 인간주의 등과 같은 맑스주의의 관념론적이고 유심론적인 해석들을 그위에 세우고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다. 어디에서맑스주의 원칙들을 파악할 것인가? - 맑스와 그 후예들의 이론적 저작들 안에서. 우선 맑스의 저작들 중에서 맑스주의적인 저작들을 잘 선별했다는 조건 하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맑스주의적 원칙들은 혹은 직접적으로, 일관적인 이론적 형태 안에서, 혹은 다른 형태로, 즉 실천적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 결국에 가서는 맑스와 그 후예들의 저작들 속에서 맑스주의의 몇몇 원칙들 -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실천적인 상태로 있을 때 - 을 "도출"한다는 것은 종종 비판적 정정작업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 정교화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조건 하에서그러하다.
2)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맑스주의의 고전적인 이론적 저작들에만 관계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맑스주의의 실천적인 저작들에 대해서, 즉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자운동의 결합과그 결과들로부터 도출된 계급투쟁의 조직이라는 정치적 실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맑스주의적 원칙들이 맑스주의의 이론적 저작들 안에서 "실천적인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제 그 원칙들이 맑스주의의실천적 저작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한다.
공산당들의 정치적 실천은 실제로 기왕에 존재하는 이론적 분석 안에서는보이지 않는 몇몇의 맑스주의적 원칙들과 몇몇의 그 이론적 성과를 실천적인상태로 포함할 수 있다. 이론적 내용 그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계급투쟁의조직이라는 정치적 실천은 따라서, 어떤 경우에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또한종종 매우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이론에 앞서있는 채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그것이 포함하는, 그리고 기왕에 존재하는 이론의 상태를 앞지르는 이론적 요소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실천이라면 - "자생적인" 실천까지도 포함하여 - 무엇이라도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직과 행동을 맑스주의적 이론에 기반하고 있는 혁명적 정당들의 실천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잘 알다시피,맑스주의적 이론에 기반한 실천들 자체에 있어서도 아무 실천이든지 문제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맑스주의적 이론과 맺고 있는 관계가 정당하다고여겨지는 실천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6) 이러한 이중의 유보조건 하에서 혁명적 정당의 정치적 실천, 그 당의 조직 구조, 목적, 행동, 계급투쟁의 지도, 역사적 결과 등등은 결정된 현실적-구체적 조건들 속에서 맑스주의적 이론의 실현을 구성한다. 그 원칙들은 이론적이기 때문에, 만약 그 실현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론적 가치를 갖는 효과들을 산출한다. 이러한 결과들 중의 몇몇은 단순히 이미 알려지고 이론에 의해 이미 서술된 이론적 원칙들의 적용을 나타내지만, 반대로 다른 몇몇은 이론의 현재 상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이론적 요소들, 효과들 혹은 새로운 이론적 원칙들 조차도표현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방금 언급된 조건들 하에서,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정당들의 정치적 실천이 실천적인 상태로 기왕에 존재하는 이론에 선행하여 이론적인 요소, 효과, 혹은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어디에서 맑스주의의 원칙들을 찾을 것인가? - 맑스주의의 고전적인 이론적 저작들과 공산주의 정당들의 실천적 저작들 안에서 동시에. "실천적 저작" 혹은 공산주의 정당의 정치적 실천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자.
그것은 구체적 상황의 정치적 분석일 수 있고, 당의 노선을 결정하는 결단, 노선을 정의하고 논평하는 정치적 언설들, 정치적 결정들을 확인하는,혹은 그 결정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슬로건들일 수 있고, 그것은 시도된행동들, 그 행동들이 얻어낸 결과와 마찬가지로 그 행동들이 행해진 방식일수 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조직형태들, 계급투쟁의 상이한 수준들 간의구분, 그에 대응하는 서로 다른 조직들 간의 구분일 수 있고, 그것은 계급투쟁에 있어서의, 그리고 대중과의 연합에 있어서의 지도방법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의 문제, 지도와 기층 사이의 문제, 당과 대중 사이의 문제 등등을해결하는 방식일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여기에서 모두 다 공산당들의 정치적 실천의 형태들이다. 그것들은 이론 자체에 있어서 아직은 부재한 원칙들을 "실현"할 수 있고, 고로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요소들과 효과들을 실천적인 상태로 포함할수 있는 형태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요소들을 단지 정치적인 언설, 분석, 결정들 안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역시조직의 형태 안에서, 계급투쟁의 지도방법론 안에서도 찾아져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맑스주의의 이론적 원칙들의 발전을 레닌의 이론적 저작안에서 찾는 것은지극히 정상이다. 누구나 레닌이 그의 제국주의 이론을 통하여 노동자 운동에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운동에 그 이상을 주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 이후에 일어난 가장 커다란 이론적 사건들의 궤적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레닌의 이론적 텍스트 안에서보다도 그의 정치적 텍스트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레닌의 가장 심오하고도 풍부한 이론적 발견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적 텍스트들, 즉 그의 정치적 실천의 "요약"을 구성하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 단 한가지만의 예를 들자면, 레닌의 정치적 텍스트들 - 정세와 그 변동들의 분석, 취해진 결정들, 그리고 그 효과들의 분석 등등 - 은 너무도 집요하게 아주 중요한 이론적 개념을 우리에게 실천적인 상태로 부여한다. "현 시점"의 개념, 국면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레닌이 맑스주의적 정당 활동 속에서 그 투쟁을지도하기 위해서 생산했던 이 개념 (혹은 원칙)은 단지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 번에 제시할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맑스주의의 원칙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왕에 존재하는 맑스주의 이론에서 숨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 새로운 이론적 개념이 결정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을인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역으로 역사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론의 속성에, 경제에 의한 최종심급에서의결정의 기초 위에서의 사회적 구조 내부에서의 지배의 다양한 형태들 위에,고로 역사적 시기구분(역사가들의 "십자가")위에 밝은 빛을 비추기만 하는것이 아니고, 처음으로 하나의 이론을 서술할 수 있도록, 즉 "자유"와 "필연"의 거짓된 이율배반 (국면 속에서의 다양한 지배의 게임)으로부터 벗어난정치적 행위 가능성의 진정한 사상을, 그리고 정치적 실천에 그 대상("현 시점"의 투쟁 안에 삽입된 계급간의 힘관계)을 부여하면서 그것의 현실적 조건들을 서술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은 아니며, 심급들의 중층결정된 효과들의결합이 국면 속에서 읽혀질 수 있는, 서로 다른 심급들의 접합을 사고할 수있도록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역시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론과 실천의통일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문제는 비단 정치적 실천의 영역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론적 실천의 영역 안에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장 심도있는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론적 국면은 그것의 비이론적인 국면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국면 전체와 맺고있는 관련 속에서, 이론적 실천의 본질을 "게임"의 필연성 내부에서 생각할수 있도록 하는 그들 사이의 연관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론적인 풍부함과 중요성을 갖는 원칙이 1917년에서 1923년 까지의 레닌의 정치적인 분석과 개입들 안에 실천적인 상태로 포함되어 있다는것은 반박 불가능한 사실이다. 이 원칙이 레닌의 정치적 저작으로부터 그것을 "도출"하려는 조망없이 실천적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 역시 불행하게도사실이다. 그 이론적 보고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곳, 즉 레닌의정치적 저작들 안에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것은 불모지로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 선포된 실천의, 그리고 정치적 실천의 우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정치적 저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들을 고취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것으로부터 공산당들의 거대한 교훈들이 도출되었지만,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제문제를 제외하면 레닌의 정치적 원칙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적 저서는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레닌의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개념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고 레닌의 정치적 실천을 통하여 생산되어진 이론적인 게다가 철학적인, 중차대한 발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적 저서는 출현하지 않았다. 같은 방식으로,수 많은 이론적 개념들이 맑스 자신의 저작들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가 오늘날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이러한 유감스러운 상황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노동운동의정치적 과제들의 긴박함에서 기인한다. 적대 계급은 노동운동에게 평화로운연구라는 여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이 현실적 실천에 몸담고 있던지, 이론을 생산하는 실천에 몸담고 있던지 간에, 그들의 정치적인 충실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운동의 위대한 저작들인 고전적인 위대한 텍스트들의 위에 그들이 투영하는 경험주의, 진화주의, 인간주의, 실용주의 등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차단되어 버린 "노동자계급의 지식인"들이 맑스주의에 대해서실행하는 개념화에도 기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되었던, 이러한 상황은우리 앞에 명확한 과제를 묘사한다. 맑스와 레닌 그리고 위대한 공산주의의지휘자들로부터 그들이 그들의 이론적 저서들 안에서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저작들이 이론적 발견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이 저서들이 실천적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도출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긴급한 과제이다.
거대한 이론적 사건은 고로 항상 이론 안에서만 배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아니다. 그것은 역시 정치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이러한 것에 비추어볼 때 정치적 실천은 그것의 몇몇 부분에서 이론을 앞질러 갈 수도 있다. 또한 이론은 자신의 공식적이고 인정된 장의 외부에서 일어난 이론적 사건들- 그것들이 자신의 고유한 발전을 위해 결정적이고 많은 관련 하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 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7)
만약 우리가 (조르쥬 깡길렘에 의해 갈릴레이에게 적용된) 하나의 탁월한정식을 재도입하여, 이론의 속성은 "말한다"는 단어의 철저한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진실을 분리해내고, 정의하고, 서술하고, 이론적 논증을 통해, 즉 맑스가 원하던 것처럼 엄격한 "진술순서"에 종속된 언설 안에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진실을 말하는"상태에 있지는 않으면서 "진실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한다. 이러한 구분은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비단 진실을 "말할" 때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의 일관된 이론적 형태, 그것의 "말하는" 형태, 혹은 그 이론적 언설의 형태를 생산하는 것 없이 "실천적인 상태"로 이론적인 내용을 생산할 때 역시 우리는 "진실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 그 자체 안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그렇게 진실 안에 있을 수 있다는것을 보았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맑스주의 철학이 자본론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자본론은 맑스주의 철학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엄격한 언설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맑스주의 철학안에 훌륭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금 정치적인 실천 안에서 이론적언설의 철저한 의미에서의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진실 안에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진실 안에 있는 가능성, 실천적 상태에 있는 이론적 내용과 이론적 상태에 있는 이론적 내용 사이의 구분, 이러한 모든 명제들은 하나의 진술의 수사법과 같은 기교나 편의들이 아니다. 그 명제들은 맑스주의에 그것들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명제들이다. 왜냐하면 그명제들이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문제삼기 때문이고, 그 명제들이 이론과 실천 안에서 동시에 "실천의 우위"를 확인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한, 일차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으로서, 그 명제들이 옳은 관계와 거짓 관계의 양 극단사이에서 동요할 수 있는 이 관계의 변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만약 새로운 이론적 내용이 맑스주의 이론 안에서 혹은 공산당들의 실천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그러한 지점들 안에서 "실천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론적 가치를소유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실천"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진실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하기로" 결정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즉 이론적 과정의 언설을 취한다는 사실하나 만으로, 이론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진실 안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일찍이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경우에는 아마도 모든 수다장이들이 학자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쁜 이론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수 있는 것과 같이 나쁜 실천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이론적 질서 안에서 처럼 실천적 질서 안에서 그것의 유명한 예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레닌이 우리에게 올바르게 깨우쳐준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수정주의이다.
이러나 이 예 자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의 이론적 질문을 다시제기한다. 정치적 실천 안에서 처럼 맑스주의의 이론적 실천 안에서, 이론과실천의 정당한 통일을 보장하기 위해, 즉 자신을 위협하는 일탈들에 대항하는 이러한 통일을 보장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론과 (동시에 이론적 실천의 장과 정치적 실천의 장 안에서의) 실천의 통일에 관한 일반 이론에, 그리고 이러한 두가지 실천의 장의 접합에 관한 이론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론은 이러한 통일이 갖는 변환의 양극단 (정당한 통일, 거짓된 통일)에 관한 이론을 그 안에 포함한다는조건 하에서만 일반적 일 수 있는 이론이다. 이러한 어렵고도 긴급한 문제를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무기가 없지만은 않다. 우리는 이데올로기 투쟁 (이론적 교조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항한 엥겔스와 레닌의 투쟁)과 공산당들의 정치투쟁 (정치적 교조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항한 투쟁)의 경험 전체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다시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실천적 상태로, 가장 고귀한 이론적인 중요성을 갖는 역사적 범례들을 포함하는 경험을 이용할 수 있다. 이 작업에 착수하기만 하면 된다.
이 작업 안에서 자원들은 난점들을 훨씬 능가한다. (서용순)
<주>
* 출전 : La Pens e,132,1967/4. 이 논설은 그 중요성이 회피될 수 없고우리가 그 발전을 보기를 강력히 희망하는 기고로서 출판하였다.
1) 우리는 <잠정적>으로 <경험적 개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이후에 그 표현을 더욱 적절한 방식으로 대체하게 될 것이다.
2) 구체적인 혹은 경험적인 역사, 경험적 사회학 그리고 공산당들에 의하여 수행된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가공 작업의 예를 제공한다.
3) 발리바르, 자본론 읽기 2부
4)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 참조. 이 책들 속에서는 맑스주의의전통에 의하여 전달된 구분들이 발전되어지고 다시 취해졌다.
5)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 참조.
6) 예를 들어, 20세기 초의 제2인터내셔널에 속한 정당들의 정치적 실천을들 수 있다. 그것이 맑스주의와 맺고 있던 기계적이고 경제주의적이고 진화주의적인 관계는 본질적으로 <거짓된> 것이다. 고로 그 지점에서는 '실천적인 상태'의 긍정적인 <이론적 효과>들이 아닌 부정적이고 퇴행적인 효과들만이 발견된다. 이러한 효과들의 이론적 검토는 풍부한 결과를 가져올 수있지만, 그것은 이 검토를 역사적인 <병리학>의 형태에 대한 검토로 이해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러하다.
7) 다른 하나의 예를 취하자면, 맑스주의 이론이, '소비에트'의 슬로건을 재도입하는 레닌의 결단 안에 포함된 이론-실천, 지도-대중의 변증법으로부터, 그리고 혁명적 시기의 전환 단계에 대한 그의 분석으로부터, 그것이빚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론적 노동에 대하여 : 난점과 자원들 /루이 알튀세르 2004.01.04 14:29
http://cafe.naver.com/socialist/24/
http://cafe.naver.com/sinzigun/626/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2 |
스피노자에 관한 세미나 - 질 들뢰즈
![]() | 청 | 2007.09.21 | 924 |
41 |
10월 혁명의 교훈 - 레온 트로츠키
![]() | 청 | 2007.09.21 | 884 |
40 |
이행강령 - 레온 트로츠키
![]() | 청 | 2007.09.21 | 798 |
39 |
대중파업론 - 로자룩셈부르크
![]() | 청 | 2007.09.21 | 924 |
38 |
왜 지금 다시 {페다고지}를 읽어야 하는가?
![]() | 청 | 2007.09.21 | 855 |
37 |
스피노자, 대중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 | 청 | 2007.09.11 | 926 |
36 | 월간말 2007. 3월호 기획 : 87년 그리고 2007년 학생운동 | 멍청이 | 2007.04.18 | 904 |
35 |
가치론에 관한 읽을거리
![]() | 멍청이 | 2007.04.08 | 792 |
34 | 네그리 강의록 / 저자 미확인 | 멍청이 | 2007.04.08 | 691 |
33 | Negri-후기 알튀세르의 사고 전개에 관한 노트 | 멍청이 | 2007.04.08 | 914 |
32 | 구조주의란 무엇인가-시리즈 : 알튀세르 강의안/이정우 | 멍청이 | 2007.04.08 | 950 |
31 |
화폐와 허무주의 / 이진경 / 진보평론
![]() | 멍청이 | 2007.02.14 | 2965 |
30 | NAM에 대하여 / 가라타니 고진 / 녹생평론 | 멍청이 | 2007.02.14 | 785 |
» |
이론적 노동에 대하여 : 난점과 자원들 / 루이 알튀세르/ 서용순 역
![]() | 멍청이 | 2007.02.06 | 710 |
28 |
교양학교 둘째날 자료입니다.
![]() | 인학련 | 2007.02.01 | 785 |
27 |
교양학교 자료들 올립니다.
![]() | 인학련 | 2007.02.01 | 935 |
26 |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 멍청이 | 2007.01.30 | 854 |
25 | 맑스주의 논쟁사 커리 | 멍청이 | 2006.10.06 | 922 |
24 | 자본론의 세계 학습 첫번째 [1] | 멍청이 | 2006.09.19 | 969 |
23 | 전쟁을 통한 이익, 평화배당금 _ 심숀 비클러와 죠나단 닛잔 | 멍청이 | 2006.09.08 | 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