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알튀세: 맑시즘, 구조주의, 인식론
- 맑시즘은 20세기 철학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파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으며, 이후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 그를 이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 전통은 오늘날 네그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맑시즘을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었다. 중국에서는 마오처퉁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 등등이 잇달아 성립했다.
프랑스의 경우 PCF(프랑스공산당)가 성립했으며 이 기관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뚜렷이 대조되는 두 종류의 맑시즘이 전개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대변되는 '실존적 맑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알튀세에 의해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맑시즘'이다. 전자가 맑스를 헤겔과 연계시켜 (교조적 맑시즘에 결여되어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변증법적 성찰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맑스를 헤겔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후기 맑스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에 초점을 맞춘다.
- 알튀세의 저작들: 『『자본』을 읽다』(I․II, 공저, 1965),
『맑스를 위하여』(1967),
『레닌과 철학』(1969),
『입장』(1976)
『자본』의 연구에는 마셰리, 발리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알튀세 학파'를 이루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 알튀세는 실존적 맑시즘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비판하고 맑스를 '과학적으로' 읽기를 원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사상계의 두 가지 주요 성과, 즉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 및 바슐라르-깡길렘의 인식론을 맑시즘과 접맥시키고자 했다.
- 알튀세는 맑시즘 연구에서 당대까지 결여되어 있던 인식론(과학철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곧 맑시즘을 메타과학적으로 재정초하려는 야심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맑시즘 '철학'과 실제 '정치'를 이으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는 특히 '이론(th orie)'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행했다.
- 알튀세에게 '이론'이란 언제나 '이론적 실천'이다. 그에게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의 특수한 한 양상이다. 이론은 이론적 실천인 것이다. 후에 (알튀세의 영향을 받은) 푸코가 '담론'을 그 자체 하나의 실천으로 보았듯이, 알튀세는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레닌의 생각을 발전시킨다. 혁명 주체가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의식화된' 단계에로 이행하는데 이론적 실천은 필수적인 것이다.
- 알튀세에게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다(훗날 푸코, 들뢰즈 등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됨). 이데올로기는 '전(前)과학적 이론'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의 집합'이다. 즉 맑스가 말하는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산물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이 하부구조(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성립한다. 그 점에서 일종의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계급의식이 결여된, 사적 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이 결여된 이전의 사상․철학들은 이런 역할을 해 왔다.
- 이데올로기 즉 일종의 '허위의식'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자아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무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주체요 중심으로 착각하는 것을 '오인(m connaissance)'이라고 했다. 인간은 상징계가 자신의 무의식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상징계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요, 법이다. 라캉에게서 은유적 뉘앙스가 강한 이 개념들이 알튀세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사회 저체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의 무의식적 법칙성을 깨닫지 못한채 스스로를 '주체'로서 세운다. 즉 '사회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의 사유는 한편으로 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을 폭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 및 그 사회를 떠받치는 사상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 '구조'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혁명이론을 제시하려는 사유이다. 여기에서 알튀세 사유의 구조주의적 측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알튀세의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그의 스승인)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짙게 깔려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과 전(前)과학은 날카롭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과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 일상세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표상들, 관념들, 편견들,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이다.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어야 한다(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비교).
따라서 상식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전자가 '이미지들'의 세계라면 후자는 '개념들'의 세계이다. 과학은 경험의 세계와 단절됨으로써만 과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 알튀세는 이런 바슐라르의 입장에 의거해 이데올로기인 헤겔 사유와 과학인 맑스 사유를 구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이 점에서 맑스로부터 헤겔로 나아갔던 프랑크푸르트 학파, 실존적 맑시즘과 대조된다.
- 알튀세는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사이에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다. 초기 맑스는 경험주의 및 헤겔주의의 그늘에 있었고 때문에 그의 저작들에는 '인간 소외'가 중심을 차지한다. 즉 아직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한 감상적인 투쟁이나 '인간 해방'의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45년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및 『독일관념론』을 분기점으로 맑스의 사유는 인식론적 단절을 이룬다. 초기의 '자유주의적 인간주의'는 사라지고 이제 '생산력', '생산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어지며, 이전의 인간주의적 사유들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로서 분석된다. 맑스는 (훗날 바슐라르가 정식화했듯이) 인식이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런 인식론적 통찰 위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을 세울 수 있었다.
알튀세는 흔히 지적되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니라 맑스 사유에서의 인식론적 단절을 지적함으로써 헤겔과 맑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알튀세의 인식론
- 과학(양자역학, 생화학, 사적 유물론, ... 등등)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구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알튀세는 이 지점에서 '大理論(la Th orie)', '이론 일반', '실천 일반'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다른 이론들(과학들 및 이데올로기들)에 비해 메타차원에 존재하는 대이론을 제시한다. 이 대이론은 곧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변증법)이다. 그렇다면 대이론은 어떤 기준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가? 대이론은 경험주의, 인간주의, 경제주의를 전과학들로서 비판한다.
- 1)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따라 경험주의 및 실증주의를 통박한다. 경험론은 한 개인의 '의식'에 생겨난 '감각자료(sense-data)'를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원자적 개인의 존재, 개인을 '의식'으로 추상하는 태도, 감각자료의 이론중립성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내포한다. 이 지점에서 알튀세는 인식론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이 사실상 밀접하게 묶여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다시 말해, 인식론에 있어 추상적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정치에 있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는 인식의 원질료는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g n ralit I)'이라 본다. 일반성 I은 감각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복합적)관계의 산물'이다. 즉 그것은 한 개인이 '추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식질료가 아니라 '집단표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무수한 사회적 현실이 묻어 있다. 인식이란 추상화된 개인의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에서 출발한다.
- 과학은 인식은 이 일반성 I을 비판함으로써 출발한다. 그 비판은 인식론적 비판인 동시에 정치적 비판이기도 하다. 과학적 인식은 일반성 I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일반성 III에 이른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변모된다.
여기에서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넘어 일반성 I과 일반성 III 사이에 일반성 II를 삽입시킨다. 이것은 깡길렘의 인식론에 기반한 사유이다. 깡길렘은 바슐라르가 인식론적 단절을 강조한 바슐라르와 달리 이전 이론과 이후 이론 사이에 일종의 완충 지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완충 지대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지대로서 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으나 새로운 이론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진화론의 예) 알튀세와 푸코는 깡길렘의 이런 입장을 각자의 맥락으로 변형시켜 받아들인다. 이로부터 알튀세의 '일반성 II' 개념과 푸코의 '지식(savoir)' 개념이 등장한다.
일반성 II는 일상성 I을 가공한다. 여기에서 가공한다는 것은 일반성 I에 섞여 있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을 떨어버리는 과정을 말한다. 일반성 II는 이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재구성(reconstruction)'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일반성 II는 과학사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일반성 I은 이론적 실천의 원질료이고, II는 생산수단이고, III은 생산품이다.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성 II가 바슐라르에서처럼 '천재들'의 놀라운 작업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조주의자인 알튀세는 이런 주체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역사는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이 변해 온 과정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으로서의 일반성 II 역시 이런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역사 역시 일반적인 역사의 지평에서 이해되며, 알튀세의 인식론서에는 '인식 주체'가 소멸하게 된다. 인식 주체 이전에 '문제틀(probl matique)'이 있다. 주체는 이 문제틀 어디엔가 자리잡음으로써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은 과학적 문제틀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적 실천'이 경험적 실천, 기술적 실천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가공하는 과정이다.
- 일반성 III이 경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에로' 내려와야 현실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튀세는 '현실의 구체(le concret-r alit )'과 '사유의 구체(le concret-de-pens e)'를 구분한다.
- 이와 같은 인식론에는 바슐라르 못지 않게 스피노자의 사유가 깔려 있다(그래서 바슐라르는 '진정한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린다). 스피노자에게서 사유는 주체의 행위가 아니다. 주체의 사유 행위가 사유의 한 변양태이다. 그래서 알튀세는 스피노자에 입각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 2) 알튀세는 또한 구조주의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현상학적 인간주의 역시 비판한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이며 주체적 존재라는 생각은 앞에서 보았듯이 환상이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생각이다. 하부구조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고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념론이 인간주의인 것이다.
- 3) 그렇다고 알튀세가 하부구조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경제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에서 경제주의란 교조화된 맑시즘으로서 모든 역점을 경제에 두는 스탈린적 맑시즘이다. 알튀세는 이 경제주의를 또한 '기계주의'라고도 부르며 또 '생산주의'라고도 부른다. (스탈린이 그랬듯이) 생산력의 증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생각, 그리고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이고 단선적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서의 단순함과 역사철학에서의 선형성을 전제한다. 알튀세는 이런 생각을 '통속적 맑시즘'이라고 부르며 이 맑시즘이 강조하는 '경제 결정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 역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심금들(instances)' 중에서 경제적 심급이 '최종 심금'임을 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모순'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 termination)에 의한 모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모순과 중층결정
- 알튀세가 교조적 맑시즘의 경제결정주의를 비판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알튀세는 어떤 인과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 termination)'을 제시한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해 논한다. 헤겔에게서 세계는 '정신(Geist)' 또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이다. 즉 궁극적 실체는 절대정신이며 그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조금씩 전개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개는 밋밋한 펼쳐짐이 아니라 (오늘날의 개념으로 하면) 특이성들을 내포하는 즉 마디들을 내포하는 전개이다. 그 마디들을 헤겔은 '계기(Moment)'라 부른다.
그런데 이 계기는 다름 아닌 모순들이다. 역사의 원동력은 '모순(Widerspruch)'이다. 두 개의 모순이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고 그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도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절대정신을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렇게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펼치는 과정(Geschehen)이다.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사유를 비판하며 특히 그 '총체성' 개념이 비판된다. 헤겔에게서 시간과 모순이 강조되지만 절대정신 속에 이미 새겨져 있는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시간과 모순은 진정한 시간과 모순이 아닌 것이다. 헤겔에게 세계는 절대정신이 '외화'되고 '소외'된 것이며(따라서 헤겔에게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마이너스로 표상된다. 기독교와 비교), 따라서 세계의 전개는 적극적인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회복의 성격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계기들과 모순들을 그들 자체로서 다루어지기보다는 이미 짜여진 실타래의 매듭들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모순론과 맑스의 모순론을 다르다고 본다. 우선 헤겔에게서 실재는 정신/이성이며 정신/이성의 운동이 역사이다. 그러나 맑스에게서 실재는 물질이며 물질의 운동이 역사이다(이 때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분할 것). 헤겔이 실재로 본 것은 맑스에게서는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헤겔의 총체성은 결국 사회와 역사를 등질화하고 단순화한다. 때문에 알튀세는 사회적 복수성(multiplicit )과 복합성(complexit )을 자체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알튀세는 이런 맥락에서 '구조화된 사회 전체(un tout social structur )'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사회 전체'라는 말은 '명목적' 의미를 가진다. 즉 헤겔의 총체성과 다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구조화된'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한 사회가 여러 계열들/심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계열들/심급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을 상세히 파헤쳐야 함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개인과 사적 소유 개념 역시 비판한다. 근대 정치철학에서의 '개인' 즉 소유권을 가진 경제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그릇된 개념이다. 각각의 개인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된다는 근대 주체철학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는 한편으로 헤겔적인 총체성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사회와 역사는 형이상학적 총체성이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된, 여러 계열들/심급들이 일정한 관계들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사회는 여러 결정성들(d terminations)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총체이다. 알튀세는 여기에 복수성과 복잡성 외에 '비동등성(in galit )'을 도입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불평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계열들/심급들의 위상이 동등하지 않음을 뜻한다. 때문에 각 심급들에서의 모순 역시 동등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모순은 복합적-구조적-비동등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마오처뚱은 '주모순(主矛盾)'과 '부모순(副矛盾)'을 나누었으나, 알튀세는 이런 구분을 좀더 다원화고 좀더 역동화한다. 사회의 여러 모순들은 때로 역할을 바꾸고, 또 때로 교차함으로써 응축되기도 한다. 알튀세는 이를 라캉을 따라 '변위(d placement)', '응축(condensation)'이라 부른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한다. 왜 맑스의 예상과 달리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는가?
헤겔적 총체성의 거부와 비동등성, 복수성, 복잡성의 원리에 따라 알튀세는 당대 러시아가 여러 가지 형태의 '실천양식들'로 분절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양식', 혁명가들의 '정치적 실천양식', 사제들의 '종교적 실천양식', 지주들의 '봉건적 실천양식'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실천양식들이 중층적 모순을 형성하고 중층결정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낳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알튀세는 실천양식들, 심급들, 계열들의 복수성, 그리고 맥락에 따라 변하는 비동등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최종 심급'은 경제적 심급이라고 말한다. 즉 경제중심주의의 단순한 인과는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인 심급은 역시 경제적 심급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심급은 어떤 방식으로 최종 심급으로서 작동하는가? 경제는 다른 심급들에 단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이트에서 성욕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꿈이나 '착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듯이, 경제도 복잡한 중층결정을 통해서 우회적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조적 인과를 알튀세는 '환유'로 묘사한다. 이런 환유적 인과는 말하자면 '부재하는 원인의 효과', '결과들 속에서의 원인의 내재'이다. 결과들 속에는 경제적 심급이 눈에 보이지 않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의 내재적 인과론과 비교할 만하다.
-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알튀세의 분석은 현대 사상에서 매우 소중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맑시즘을 절대시하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또 (복수성과 복잡성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거의 스피노자의 신의 자리에 해당하는)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알튀세의 분석을 충분히 습득하되, 사상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즉 처음부터 맑스를 전제하지 않고 - 그러나 맑스가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보다 다원적이고(즉 분석의 단위를 '界'로 잡는 것 - 그러나 계급 개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동적인(보다 최근의 존재론들을 동원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과 주체의 문제
알튀세가 현대 사상에 남긴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공헌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개념이며, 이 개념을 매개한 주체론이다. 이 이론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알튀세는 국가론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즉 추상적인 권력 개념이나 사법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실질적인('material'이라는 말의 모든 뜻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이것은 후에 등장하는 푸코의 '전략들'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들'과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국가는 지배를 위해서 기구들/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기구들에는 억압 기구들과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억압 기구들에는 군대, 경찰, 법 등이 있고,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는 공장, 병원, 학교, 교회, 언론, 정치, 감옥, ... 등등이 있다. 억압 기구들은 무력에 기반해 있지만,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하 '이데올로기 기구들'로 약함)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다.
- 1) 몇 가지 기초적인 사항들의 점검.
- 헤겔의 '총체성'과 맑스의 '사회적 전체'를 구별하기
-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경제적 토대이며, 상부구조는 법률-정치(법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종교, 윤리, 정치, 문화, ... )로 구성된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의 '건물의 비유'는 부적절하다. → 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특징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관점에 입각해서이다.
재생산의 관점이란 곧 생산 조건들의 관점이다. 여기에서 생산 조건들은 곧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건들이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 국가는 억압적 장치이다. 경찰, 재판소, 감옥, 군대, 내각과 행정부 등이 모두 억압 장치들이다.
국가권력과 국가기구들을 구분하자. 국가권력은 계급투쟁의 대상이지만, 국가기구들은 또 다른 분석의 대상이다. 국가권력만으로는 사회와 역사를 분석할 수 없다.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한다.
국가기구들은 억압기구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고려해야 한다.
- 이데올로기 기구들(AIE)은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기구들과 다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종교 AIE, 교육 AIE, 가족 AIE, 법률 AIE, 정치 AIE, 조합 AIE, 매체 AIE, 문화 AIE.
알튀세는 가족-기구와 법률-기구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한다. 가족-기구는 생산과 소비의 '단위'의 역할을 하며, 법률은 한편으로 억압기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기구이다.
- 하나의 억압기구가 존재하는 반면, 다수의 이데올로기 기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억압기구가 공적이라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사적이다. 억압기구가 폭력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한다.
그럼에도 두 기구들은 상보적이다. 억압기구는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동반하며,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억압기구를 동반한다. 폭력과 이데올로기는 항상 함께 작동한다. 무게중심이 다를 뿐이다.
- 한편으로 다양한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결국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계급도 이데올로기 기구들 위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헤게모니를 행사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레닌의 예)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기구들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계급투쟁은 하부구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 2) 이데올로기 기구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은 생산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생산력의 재생산은 다시 노동력의 재생산과 생산수단들(원료, 고정설비, 생산도구 등)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이 문제를 상세하게 파헤친 것이 맑스의 공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튀세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더 이상 공장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며 다른 국가기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학교는 대표적이다. 즉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야만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여기에서 고전적인 경제적 분석들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이 분석은 곧 생산관계의 재생산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역할에 관한 분석이다.
- 알튀세는 (서구)전통 사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기구가 가족 기구와 교회 기구였다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는 가족 기구와 교육 기구라고 생각한다. 정치 기구가 계속 바뀌어도 오히려 이 기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교육 기구는 '노하우들'(언어, 산수, ... )과 지배 이데올로기(도덕, 국민윤리, ... )의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역할들'을 가르친다. 피착취자의 역할, 착취의 대리자 역할, 억압의 대리자 역할, 이데올로기 전문가 역할 등등.
- 3) 이데올로기는 결국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呼名)한다.
주체는 각 개인들에 의해 '자명한' 것으로 인지되는데 이 자명함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지하지만 과학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적 인지는 결국 '오인'에 불과하다.
대주체, 국가기구들은 사람들을 소주체로 부른다. 이것을 라캉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과 비교할 수 있다.
- 맑시즘은 20세기 철학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파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으며, 이후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 그를 이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 전통은 오늘날 네그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맑시즘을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었다. 중국에서는 마오처퉁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 등등이 잇달아 성립했다.
프랑스의 경우 PCF(프랑스공산당)가 성립했으며 이 기관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퍼져나갔다. 프랑스에서는 뚜렷이 대조되는 두 종류의 맑시즘이 전개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대변되는 '실존적 맑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알튀세에 의해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맑시즘'이다. 전자가 맑스를 헤겔과 연계시켜 (교조적 맑시즘에 결여되어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변증법적 성찰로 나아갔다면, 후자는 맑스를 헤겔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후기 맑스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에 초점을 맞춘다.
- 알튀세의 저작들: 『『자본』을 읽다』(I․II, 공저, 1965),
『맑스를 위하여』(1967),
『레닌과 철학』(1969),
『입장』(1976)
『자본』의 연구에는 마셰리, 발리바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알튀세 학파'를 이루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 알튀세는 실존적 맑시즘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인간주의적' 맑시즘을 비판하고 맑스를 '과학적으로' 읽기를 원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대 사상계의 두 가지 주요 성과, 즉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 및 바슐라르-깡길렘의 인식론을 맑시즘과 접맥시키고자 했다.
- 알튀세는 맑시즘 연구에서 당대까지 결여되어 있던 인식론(과학철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곧 맑시즘을 메타과학적으로 재정초하려는 야심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맑시즘 '철학'과 실제 '정치'를 이으려 했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는 특히 '이론(th orie)'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행했다.
- 알튀세에게 '이론'이란 언제나 '이론적 실천'이다. 그에게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의 특수한 한 양상이다. 이론은 이론적 실천인 것이다. 후에 (알튀세의 영향을 받은) 푸코가 '담론'을 그 자체 하나의 실천으로 보았듯이, 알튀세는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레닌의 생각을 발전시킨다. 혁명 주체가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의식화된' 단계에로 이행하는데 이론적 실천은 필수적인 것이다.
- 알튀세에게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이다(훗날 푸코, 들뢰즈 등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됨). 이데올로기는 '전(前)과학적 이론'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의 집합'이다. 즉 맑스가 말하는 상부구조이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산물이다. 이데올로기란 표상과 관념이 하부구조(경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성립한다. 그 점에서 일종의 '환상'이다. 그리고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계급의식이 결여된, 사적 유물론 및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이 결여된 이전의 사상․철학들은 이런 역할을 해 왔다.
- 이데올로기 즉 일종의 '허위의식'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알튀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자아가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무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주체요 중심으로 착각하는 것을 '오인(m connaissance)'이라고 했다. 인간은 상징계가 자신의 무의식의 언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상징계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요, 법이다. 라캉에게서 은유적 뉘앙스가 강한 이 개념들이 알튀세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사회 저체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의 무의식적 법칙성을 깨닫지 못한채 스스로를 '주체'로서 세운다. 즉 '사회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의 사유는 한편으로 이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을 폭로함으로써 부르주아 사회 및 그 사회를 떠받치는 사상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 '구조'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혁명이론을 제시하려는 사유이다. 여기에서 알튀세 사유의 구조주의적 측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알튀세의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그의 스승인) 바슐라르의 인식론이 짙게 깔려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과 전(前)과학은 날카롭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과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 일상세계 속에서 가지게 되는 표상들, 관념들, 편견들,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이다.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어야 한다(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비교).
따라서 상식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전자가 '이미지들'의 세계라면 후자는 '개념들'의 세계이다. 과학은 경험의 세계와 단절됨으로써만 과학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 알튀세는 이런 바슐라르의 입장에 의거해 이데올로기인 헤겔 사유와 과학인 맑스 사유를 구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이 점에서 맑스로부터 헤겔로 나아갔던 프랑크푸르트 학파, 실존적 맑시즘과 대조된다.
- 알튀세는 초기 맑스와 후기 맑스 사이에는 결정적인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고 말한다. 초기 맑스는 경험주의 및 헤겔주의의 그늘에 있었고 때문에 그의 저작들에는 '인간 소외'가 중심을 차지한다. 즉 아직까지도 자본주의에 대한 감상적인 투쟁이나 '인간 해방'의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45년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및 『독일관념론』을 분기점으로 맑스의 사유는 인식론적 단절을 이룬다. 초기의 '자유주의적 인간주의'는 사라지고 이제 '생산력', '생산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이어지며, 이전의 인간주의적 사유들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로서 분석된다. 맑스는 (훗날 바슐라르가 정식화했듯이) 인식이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런 인식론적 통찰 위에서 자신의 정치경제학을 세울 수 있었다.
알튀세는 흔히 지적되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니라 맑스 사유에서의 인식론적 단절을 지적함으로써 헤겔과 맑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알튀세의 인식론
- 과학(양자역학, 생화학, 사적 유물론, ... 등등)과 이데올로기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구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알튀세는 이 지점에서 '大理論(la Th orie)', '이론 일반', '실천 일반'의 개념을 제시한다. 즉 다른 이론들(과학들 및 이데올로기들)에 비해 메타차원에 존재하는 대이론을 제시한다. 이 대이론은 곧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변증법)이다. 그렇다면 대이론은 어떤 기준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가? 대이론은 경험주의, 인간주의, 경제주의를 전과학들로서 비판한다.
- 1)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따라 경험주의 및 실증주의를 통박한다. 경험론은 한 개인의 '의식'에 생겨난 '감각자료(sense-data)'를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원자적 개인의 존재, 개인을 '의식'으로 추상하는 태도, 감각자료의 이론중립성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내포한다. 이 지점에서 알튀세는 인식론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이 사실상 밀접하게 묶여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다시 말해, 인식론에 있어 추상적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정치에 있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는 인식의 원질료는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g n ralit I)'이라 본다. 일반성 I은 감각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복합적)관계의 산물'이다. 즉 그것은 한 개인이 '추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식질료가 아니라 '집단표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무수한 사회적 현실이 묻어 있다. 인식이란 추상화된 개인의 감각자료가 아니라 일반성 I에서 출발한다.
- 과학은 인식은 이 일반성 I을 비판함으로써 출발한다. 그 비판은 인식론적 비판인 동시에 정치적 비판이기도 하다. 과학적 인식은 일반성 I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일반성 III에 이른다. 즉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변모된다.
여기에서 알튀세는 바슐라르를 넘어 일반성 I과 일반성 III 사이에 일반성 II를 삽입시킨다. 이것은 깡길렘의 인식론에 기반한 사유이다. 깡길렘은 바슐라르가 인식론적 단절을 강조한 바슐라르와 달리 이전 이론과 이후 이론 사이에 일종의 완충 지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완충 지대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지대로서 한 이론의 한계가 드러났으나 새로운 이론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진화론의 예) 알튀세와 푸코는 깡길렘의 이런 입장을 각자의 맥락으로 변형시켜 받아들인다. 이로부터 알튀세의 '일반성 II' 개념과 푸코의 '지식(savoir)' 개념이 등장한다.
일반성 II는 일상성 I을 가공한다. 여기에서 가공한다는 것은 일반성 I에 섞여 있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을 떨어버리는 과정을 말한다. 일반성 II는 이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재구성(reconstruction)'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일반성 II는 과학사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일반성 I은 이론적 실천의 원질료이고, II는 생산수단이고, III은 생산품이다.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성 II가 바슐라르에서처럼 '천재들'의 놀라운 작업을 통해서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조주의자인 알튀세는 이런 주체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역사는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이 변해 온 과정이며, 따라서 생산수단으로서의 일반성 II 역시 이런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역사 역시 일반적인 역사의 지평에서 이해되며, 알튀세의 인식론서에는 '인식 주체'가 소멸하게 된다. 인식 주체 이전에 '문제틀(probl matique)'이 있다. 주체는 이 문제틀 어디엔가 자리잡음으로써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은 과학적 문제틀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론적 실천'이 경험적 실천, 기술적 실천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가공하는 과정이다.
- 일반성 III이 경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에로' 내려와야 현실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알튀세는 '현실의 구체(le concret-r alit )'과 '사유의 구체(le concret-de-pens e)'를 구분한다.
- 이와 같은 인식론에는 바슐라르 못지 않게 스피노자의 사유가 깔려 있다(그래서 바슐라르는 '진정한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린다). 스피노자에게서 사유는 주체의 행위가 아니다. 주체의 사유 행위가 사유의 한 변양태이다. 그래서 알튀세는 스피노자에 입각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 2) 알튀세는 또한 구조주의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현상학적 인간주의 역시 비판한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이며 주체적 존재라는 생각은 앞에서 보았듯이 환상이며,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생각이다. 하부구조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고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념론이 인간주의인 것이다.
- 3) 그렇다고 알튀세가 하부구조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경제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에서 경제주의란 교조화된 맑시즘으로서 모든 역점을 경제에 두는 스탈린적 맑시즘이다. 알튀세는 이 경제주의를 또한 '기계주의'라고도 부르며 또 '생산주의'라고도 부른다. (스탈린이 그랬듯이) 생산력의 증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생각, 그리고 경제적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일방적이고 단선적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과율에서의 단순함과 역사철학에서의 선형성을 전제한다. 알튀세는 이런 생각을 '통속적 맑시즘'이라고 부르며 이 맑시즘이 강조하는 '경제 결정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알튀세 역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심금들(instances)' 중에서 경제적 심급이 '최종 심금'임을 말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모순'이 반드시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 termination)에 의한 모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게 된다
모순과 중층결정
- 알튀세가 교조적 맑시즘의 경제결정주의를 비판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알튀세는 어떤 인과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알튀세는 '중층결정(surd termination)'을 제시한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해 논한다. 헤겔에게서 세계는 '정신(Geist)' 또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이다. 즉 궁극적 실체는 절대정신이며 그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조금씩 전개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개는 밋밋한 펼쳐짐이 아니라 (오늘날의 개념으로 하면) 특이성들을 내포하는 즉 마디들을 내포하는 전개이다. 그 마디들을 헤겔은 '계기(Moment)'라 부른다.
그런데 이 계기는 다름 아닌 모순들이다. 역사의 원동력은 '모순(Widerspruch)'이다. 두 개의 모순이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고 그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도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절대정신을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렇게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펼치는 과정(Geschehen)이다.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사유를 비판하며 특히 그 '총체성' 개념이 비판된다. 헤겔에게서 시간과 모순이 강조되지만 절대정신 속에 이미 새겨져 있는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시간과 모순은 진정한 시간과 모순이 아닌 것이다. 헤겔에게 세계는 절대정신이 '외화'되고 '소외'된 것이며(따라서 헤겔에게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마이너스로 표상된다. 기독교와 비교), 따라서 세계의 전개는 적극적인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회복의 성격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계기들과 모순들을 그들 자체로서 다루어지기보다는 이미 짜여진 실타래의 매듭들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 알튀세는 이런 헤겔의 모순론과 맑스의 모순론을 다르다고 본다. 우선 헤겔에게서 실재는 정신/이성이며 정신/이성의 운동이 역사이다. 그러나 맑스에게서 실재는 물질이며 물질의 운동이 역사이다(이 때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분할 것). 헤겔이 실재로 본 것은 맑스에게서는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헤겔의 총체성은 결국 사회와 역사를 등질화하고 단순화한다. 때문에 알튀세는 사회적 복수성(multiplicit )과 복합성(complexit )을 자체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알튀세는 이런 맥락에서 '구조화된 사회 전체(un tout social structur )'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사회 전체'라는 말은 '명목적' 의미를 가진다. 즉 헤겔의 총체성과 다르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구조화된'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한 사회가 여러 계열들/심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계열들/심급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을 상세히 파헤쳐야 함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는 자유주의/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개인과 사적 소유 개념 역시 비판한다. 근대 정치철학에서의 '개인' 즉 소유권을 가진 경제적 주체로서의 개인은 그릇된 개념이다. 각각의 개인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된다는 근대 주체철학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는 한편으로 헤겔적인 총체성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사회와 역사는 형이상학적 총체성이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 구조화된, 여러 계열들/심급들이 일정한 관계들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사회는 여러 결정성들(d terminations)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총체이다. 알튀세는 여기에 복수성과 복잡성 외에 '비동등성(in galit )'을 도입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불평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계열들/심급들의 위상이 동등하지 않음을 뜻한다. 때문에 각 심급들에서의 모순 역시 동등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모순은 복합적-구조적-비동등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마오처뚱은 '주모순(主矛盾)'과 '부모순(副矛盾)'을 나누었으나, 알튀세는 이런 구분을 좀더 다원화고 좀더 역동화한다. 사회의 여러 모순들은 때로 역할을 바꾸고, 또 때로 교차함으로써 응축되기도 한다. 알튀세는 이를 라캉을 따라 '변위(d placement)', '응축(condensation)'이라 부른다.
- 알튀세는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한다. 왜 맑스의 예상과 달리 후진국인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는가?
헤겔적 총체성의 거부와 비동등성, 복수성, 복잡성의 원리에 따라 알튀세는 당대 러시아가 여러 가지 형태의 '실천양식들'로 분절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양식', 혁명가들의 '정치적 실천양식', 사제들의 '종교적 실천양식', 지주들의 '봉건적 실천양식'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실천양식들이 중층적 모순을 형성하고 중층결정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을 낳았다는 것이다.
- 그러나 알튀세는 실천양식들, 심급들, 계열들의 복수성, 그리고 맥락에 따라 변하는 비동등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최종 심급'은 경제적 심급이라고 말한다. 즉 경제중심주의의 단순한 인과는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인 심급은 역시 경제적 심급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심급은 어떤 방식으로 최종 심급으로서 작동하는가? 경제는 다른 심급들에 단적으로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이트에서 성욕이 직접 나타나지 않고 꿈이나 '착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듯이, 경제도 복잡한 중층결정을 통해서 우회적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조적 인과를 알튀세는 '환유'로 묘사한다. 이런 환유적 인과는 말하자면 '부재하는 원인의 효과', '결과들 속에서의 원인의 내재'이다. 결과들 속에는 경제적 심급이 눈에 보이지 않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의 내재적 인과론과 비교할 만하다.
- 모순과 중층결정에 대한 알튀세의 분석은 현대 사상에서 매우 소중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맑시즘을 절대시하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고, 또 (복수성과 복잡성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거의 스피노자의 신의 자리에 해당하는)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알튀세의 분석을 충분히 습득하되, 사상적으로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즉 처음부터 맑스를 전제하지 않고 - 그러나 맑스가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사상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보다 다원적이고(즉 분석의 단위를 '界'로 잡는 것 - 그러나 계급 개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동적인(보다 최근의 존재론들을 동원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과 주체의 문제
알튀세가 현대 사상에 남긴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공헌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개념이며, 이 개념을 매개한 주체론이다. 이 이론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알튀세는 국가론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즉 추상적인 권력 개념이나 사법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실질적인('material'이라는 말의 모든 뜻에서) 기구들을 분석한다. 이것은 후에 등장하는 푸코의 '전략들'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들'과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국가는 지배를 위해서 기구들/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기구들에는 억압 기구들과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억압 기구들에는 군대, 경찰, 법 등이 있고,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는 공장, 병원, 학교, 교회, 언론, 정치, 감옥, ... 등등이 있다. 억압 기구들은 무력에 기반해 있지만,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하 '이데올로기 기구들'로 약함)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다.
- 1) 몇 가지 기초적인 사항들의 점검.
- 헤겔의 '총체성'과 맑스의 '사회적 전체'를 구별하기
-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경제적 토대이며, 상부구조는 법률-정치(법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종교, 윤리, 정치, 문화, ... )로 구성된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의 '건물의 비유'는 부적절하다. → 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특징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관점에 입각해서이다.
재생산의 관점이란 곧 생산 조건들의 관점이다. 여기에서 생산 조건들은 곧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건들이다.
- 고전적인 맑시즘에서 국가는 억압적 장치이다. 경찰, 재판소, 감옥, 군대, 내각과 행정부 등이 모두 억압 장치들이다.
국가권력과 국가기구들을 구분하자. 국가권력은 계급투쟁의 대상이지만, 국가기구들은 또 다른 분석의 대상이다. 국가권력만으로는 사회와 역사를 분석할 수 없다.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한다.
국가기구들은 억압기구들로 환원되지 않으며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고려해야 한다.
- 이데올로기 기구들(AIE)은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기구들과 다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이 있다: 종교 AIE, 교육 AIE, 가족 AIE, 법률 AIE, 정치 AIE, 조합 AIE, 매체 AIE, 문화 AIE.
알튀세는 가족-기구와 법률-기구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한다. 가족-기구는 생산과 소비의 '단위'의 역할을 하며, 법률은 한편으로 억압기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기구이다.
- 하나의 억압기구가 존재하는 반면, 다수의 이데올로기 기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억압기구가 공적이라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사적이다. 억압기구가 폭력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한다.
그럼에도 두 기구들은 상보적이다. 억압기구는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을 동반하며,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억압기구를 동반한다. 폭력과 이데올로기는 항상 함께 작동한다. 무게중심이 다를 뿐이다.
- 한편으로 다양한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결국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계급도 이데올로기 기구들 위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헤게모니를 행사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레닌의 예)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기구들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계급투쟁은 하부구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 2) 이데올로기 기구들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들의 재생산은 생산력의 재생산과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생산력의 재생산은 다시 노동력의 재생산과 생산수단들(원료, 고정설비, 생산도구 등)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이 문제를 상세하게 파헤친 것이 맑스의 공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튀세는 노동력의 재생산이 더 이상 공장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며 다른 국가기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학교는 대표적이다. 즉 노동력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야만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여기에서 고전적인 경제적 분석들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이 분석은 곧 생산관계의 재생산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역할에 관한 분석이다.
- 알튀세는 (서구)전통 사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기구가 가족 기구와 교회 기구였다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는 가족 기구와 교육 기구라고 생각한다. 정치 기구가 계속 바뀌어도 오히려 이 기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교육 기구는 '노하우들'(언어, 산수, ... )과 지배 이데올로기(도덕, 국민윤리, ... )의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역할들'을 가르친다. 피착취자의 역할, 착취의 대리자 역할, 억압의 대리자 역할, 이데올로기 전문가 역할 등등.
- 3) 이데올로기는 결국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呼名)한다.
주체는 각 개인들에 의해 '자명한' 것으로 인지되는데 이 자명함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지하지만 과학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적 인지는 결국 '오인'에 불과하다.
대주체, 국가기구들은 사람들을 소주체로 부른다. 이것을 라캉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과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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