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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스피노자, 대중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2007.09.11 17:32 조회 수 : 925

스피노자, 대중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박상현 (사회학과 석사과정) 97년






1/ 스피노자의 이례성과 현재성


근대의 철학사와 정치사상사에 있어 의심할나위 없이 스피노자는 매우 이례적인 철학자다. 이러한 이례성으로 인해, 그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불충분했고, 근대철학과 정치사상의 계보 속에서 그는 언제나 분류하기 어려운 사상가로 이해되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인간의 이성을 옹호하지만 합리주의자로 분류될 수 없었고, 신과 실체에 대한 매우 장황한 형이상학을 펼쳐보이지만, 결코 관념론자로 파악되지 않았다.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보아도 사정은 동일하다. 그는 대중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자유주의자로 분류될 수는 없었고,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결코 전체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근대의 사유틀 속에서 보았을 때, 그는 매우 모순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례성이 오늘날 스피노자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즉, 스피노자의 이례성을 오늘날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논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푸코'의 현재성이나, '데카르트'의 현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는 이미 동시대성 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는 자명하게도 주류적인 사유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적으로 (재)구성될 필요성과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현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사상이 오늘날 이해되는 것과 다른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을 내포함과 동시에, 그것이 동시대의 지반 속에서 하나의 입장을 취하면서 나름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스피노자의 이례성 자체가 현재성을 운위할 가능성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스피노자의 사상 및 그것의 체계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과 독특함들이 오늘날의 사유지반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논의할 수 있게 만드는 동시대의 사상적 지평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우 다양하고도 포괄적인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를 무릎쓰고 단순화해보자면, 그 것은 근대성의 위기와 비판 나아가 그것의 해체와 재구성의 문제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정치사상'의 영역으로 좁혀보자면, 보수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 정치의 제조류들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과 재구성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역사의 종말'을 거만하게 외쳐되는 '자유주의'와 존재의 가능성이 의문시되는 '맑스주의'라는 작금의 정치사상적 지형에 촛점을 맞추어서 조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자유주의가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는 것은, 그 자신만만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가 그 내적으로 더 이상 어떤 긍정적 생성을 구성해내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정치적 정당화 패러다임'의 위기 나아가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의 위기 등의 진단으로 현상하고 있다. 한편, 맑스주의의 존재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적어도 맑스주의의 정치가 자유주의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하나의 비판적 대안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요컨대, 근대 정치 철학의 주류로서 자유주의가 승리를 확고히 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것의 해체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적 패배자'로서 맑스주의는 어떻게 '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애초에 맑스주의 내에 '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이 부재한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맑스주의는 애초부터 자유주의의 또 다른 변종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지나친 상상과 억측을 제외한다면, 맑스주의를 자유주의의 변종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적어도 맑스주의는 자유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그것의 핵심적 난점들을 파헤치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가장 핵심적으로 맑스주의는 자유주의의 정치적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성과 양심등 특정한 인간의 조건을 충족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계약과 합의에 의해 구성된 대의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사회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리고 맑스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에 직면해서 그러한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반면 맑스주의는, '자율적 개인들의 자율적 합의에 의한 정치'라는 이른바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그것의 허구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의 ensemble이다."고 주장했으며, 자유주의 사상을 철학적으로(그리고 독일적으로) 완성한 헤겔과 대결하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자율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어떤 구조적 힘, 관계적 힘을 강조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맑스주의의 주장은 정치에 외재하는 원인으로서 '경제' 곧 착취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수렴되었다. 즉, 사회적 관계는 곧 자본주의적 관계--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야만 하는, 그리고 이에 대한 잉여가치의 착취를 통해서만 자본은 가치증식할 수 있는 모순적인 사회관계--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의 원인으로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이라는 문제틀을 도입함으로서 맑스주의는 '계급간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서 맑스주의는 자유주의적 계약이론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통한 혁명적 단절과 그 이후의 '자유로운 생산자연합'이라는 새로운 정치학의 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는 '역사적 패배자'가 되었다. 왜 그런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추구가 오늘날 하나의 '현재성'을 구성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여기서는 하나의 답변을 전제한다. 그것은 바로 맑스주의의 강점 자체가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설이다. 즉,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맑스주의적 테마는 것을 '착취를 둘러싼 계급투쟁'으로 대체함으로서, 또다른 형태의 정치를 사유할 가능성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적 강점은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 선험적 통일성을 부당전제하거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외부로부터 주입이라는 지극히 '계몽적 기획'을 도입할 수 있는 소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주의 정치를 비판한 댓가로 자신의 고유한 능동적 정치기획을 하나의 이론으로 구성하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역사적 맑스주의는 결국 자유주의적 정치기획을 뒷문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율적 주체에 의한 자율적 정치'에 대한 비판이라는 맑스주의적 지반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지반--탈주체적 지반--위에서 고유한 정치적 운영원리를 사고할 필요성이 현재적 과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맑스주의적 지반에서 스피노자를 읽는다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 기획 속에서 그 현재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철학과 정치사상의 근본적인 이례성은 바로 주류적인 근대 철학에 의해 배재된 반근대적, 비자본주의적 정치철학의 불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를 '능동적인 유물론적 정치이론'의 계보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철학이 가지는 독특성과 그의 정치이론이 가지는 반자유주의적 성격을 이 글에서는 조망해보고자 한다.




2/ 독특한 유물론?


알튀세르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자본을 읽자]와 [맑스를 위하여]로 대표되는 자신의 초기 저작들에 쏟아진 '구조주의'라는 비판을 논박하면서 "당시에 우리는 스피노자주의자였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훨씬 이후에 이른바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입장속에서 '독특한 유물론'의 전통을 재구성할 때,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그 전통 속에 넣는다. 여기서 그는 '유명론은 유물론의 대기소'라고 했던 맑스의 지적을 극단화시켜서 '유명론은 유물론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한편, 네그리는 [야만적 이례성]에서 스피노자가 유물론을 최고의 형상 속에서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피노자가 '양태적 다원성의 공간으로서, 구성적 역능으로 이해되는 욕망의 구체적 해방으로 유물론의 재정복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 철학의 어떤 요소들이 이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에 앞서 먼저 '왜 철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할 듯하다. 즉, '정치학'을 논하는데 왜 철학, 그것도 형이상학이 필요한가가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1 차적으로 역사적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철학자 및 정치철학자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 속에서 찾아진다. 홉스, 로크를 비롯해서, 칸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 및 정치철학자들은 모두 나름의 세계론과 인간론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인간학과 세계론에 기반해서 그들은 신학의 지평에 종속되어 있는 세계와 인간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인간의 정치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모두에게 철학과 정치학은 체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그가 보이는 이례성과 유물론적 성격이 이들과의 분리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덧붙여져야 한다. 스피노자 해석에 있어 형이상학 부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네그리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매우 강한 정치적 성격의 존재론이다. 한편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모든 신화와 모든 신비화, 모든 미신'에 대한 거부라는 실천적 목표를 가지는 실천철학의 거대한 전통에 속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철학의 새로운 실천'으로서 정치와 철학의 접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스피노자와 윤리-정치학(ethico-politic)의 스피노자가가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그 자체로 실천, 능동성의 사상이며, 철학은 곧 정치인 것이 된다. 따라서 그가 사용했던 개념들의 고유성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철학과 정치학을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에티카]의 서술체계를 보더라도 쉽게 확인된다. [에티카]의 체계는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앞의 부분은 흔히들 '형이상학'으로불리우는 것으로 자연과 세계의 구성에 대해 다루고 있고, 뒤의 부분은 '정치학'으로 불리우는 부분으로 '인간의 자유' 혹은 '해방'에 대한 기획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전반부에서 그가 매우 현실주의적으로 보이는 세계론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후반부에서 이러한 현실주의적 지반 위에서 동시에 해방의 가능성을 연결시켜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의 과정을 통해 그는 결국 현실적 과학(?)과 윤리학의 접합을 통해 '윤리-정치적 유물론'을 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윤리-정치적 사유는 그의 형이상학 및 인과론적 인간학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유물론적이고, 전복적인 성격을 띠면서.


2-1/ 실체와 양태 :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


스피노자에게 있어 각각 고유성들을 가지는 존재론적 범주는 실체와 양태이다. 실체는 '자기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해 사유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신(God)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정한(infinite) 존재이며,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은 자신을 무한히 변용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실체의 변용(affection)으로써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해 생각되는 것이 바로 양태(Mode)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거나 또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에티카 1장 정리15 증명)

본성상 자기의 변용에 앞서는 실체는 자기원인적, 자기발생적 존재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신 안에서만 존재하며, 신은 양태의 존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작용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즉, 신은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사물의 존재의 운동인일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의 운동인이기도 하다.(1부 정리25) 이러한 언명은 마치 개별성에 대한 보편성의 절대적 우위, 양태에 대한 실체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 있어 실체와 양태의 관계는 헤겔적인 보편과 개별의 관계인가?

양자의 관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거나, 목적론적으로 배치되고 지양되는 관계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은폐되어 있었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개진한다. '신은 개별적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유한하며 제한된 존재'(2부 정의 7)인 '개별적(singular) 사물은 단지 신의 속성의 변용 혹은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에 지나지 않기'(1부 정리25)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개별적 사물 또는 유한하고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각각의 사물은,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특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다른 원인에 의해 존재와 작용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도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1부 정리28) 요컨대, 신의 속성들의 변용인 양태 혹은 그러한 양태들의 결합체인 양태체는 고유한 존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태계'라고 표현 할 수 있는 이러한 계열 속에는 '신의 본성'이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적 사물들이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양태들은 상호 운동 및 상호 교통의 원인임과 동시에 상호파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즉, '사물의 산출과 운동'은 내적 원인 혹은 외적 원인에 기인하는데, 이중 전자의 것이 신의 변용이며, 신 안에서 결정되는 몫이라면, 후자의 것은 양태들 간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그것이 실체의 본질에 참여하는 한에서, 적어도 최소한의 원인으로서의 역능을 지니고 있으며, 적어도 그것이 이러한 역능을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 그것은 '자기원인적인 것'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양태들은 신의 절대적인 본성에의 참여에 의해서만 자기원인적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실체와 양태의 문제는 결국 정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역능(potentia : puissance)'의 문제를 매개로 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유와 필연, 결정과 예속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으로나 또는 구속되어 있다고 한다.'(에티카 1부 정의 7)고 정의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실체와 관련된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와 관련된' 우연성은 지성의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개별개별의 사물이 신의 본질인 역능을 발휘할 때,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것이 된다.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 그것은 예속되어 있는 것이며, 우연적인 것이 된다. 양태들간의 외적 관계는 우연적일 수 있으며, 상호파괴적일 수 있는 것이다.


2-2/ 공통형식으로서 속성과 지성의 제한성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 있어 '존재론'의 우월성은 많은 해석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그의 주요 개념들은 모두 존재론적으로 정식화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론적 개념들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과 사유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은 실체와 관련된 '속성'이라는 고유한 개념을 매개로 한다. 그는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은 '속성'이라고 정의한다. 속성은 실체 및 그것의 변용과 인간의 지성을 매개시켜준다. 그에 따르면, 실체는 그 자체로서 무한히 변용(affection)하며, 또한 무한한 속성으로 지각된다. 또한 고유하게 '인간'이라는 양태와 관련된 지성은 사유의 양태이다. 사유는 신의 무한한(infinite) 속성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속성' 개념의 이해를 둘러싸고 일정한 논쟁이 있어왔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편지들에 대한 독해 속에서 '속성은 실체와 같은 사물이지만, 지성과 관련해서 하나의 차이가 진술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에티카]에 두 명의 스피노자가 있으며, 하나는 네덜란드적인 자본주의적 시장의 출현에 조응하는 부르조아적 철학의 극한 즉, 혁명적 유토피아를 표현하며, 다른 하나는 이를 뛰어넘어 자유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미래철학'의 성격을 띤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속성'은 실체와 동일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욕망의 자생성 위에 전설되며, 집단적 상상에 의해 조직된 구성적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잔여'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즉, 속성은 그의 초기저작에 있어 '실체의 형용사적 표현' 이었으며, 에티카의 진행 속에서 축소된다는 것이다. 반면 들뢰즈는 속성은 실체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실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여기서 '표현'이라는 관념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니라 동사적인 것 역동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들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스피노자가 '각각의 속성이 실체의실재성'을 표현하며,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에티카 1부 정리11)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연장된 사물(res extens)과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는 신의 속성이거나 신의 속성의 변용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연장'이라는 속성과 '사유'라는 속성은 서로 질적으로 구분되며 환원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신의 본질은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 외에도 환원불가능한 '무한정한' 속성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속성은 서로가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인, 실체의 형식적 본질들을 의미한다. 신은 속성들이라는 질적인 형식들을 통해 실행되는, 즉 그것들을 통해 무한한 사물들을 무한한 방식으로 생산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능이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속성은 개별의 사물들이 존재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공통적인 형식들 없이, 신은 개별적 사물을 생산할 수 없으며, 그러한 형식들 속에 참여하지 않은 채 개별적 사물들은 활동하거나 실존할 수 없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성은 속성을 매개로 하지 않고, 실체에 대해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 실체와 양태에 대해 사유할 때, 그것은 실체를 속성을 통해 인식하는 '지성'의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복잡한 도식들 구상했을까? 그것은 스피노자가 고안한 고유의 철학적 전략 때문이다. 그것은 곧 지성의 제한성의 전제 위에서 데카르트적 의식철학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에 따르면, 지성의 절대적 자율성이나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개인 등은 일종의 미신과 편견이며, 이로 인해 인간은 자기 의식의 진정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정동적 예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성은 결코 실체 그 자체를 파악 할 수 없으며, 오직 '속성'이라는 공통의 형식 속에서만 신의 역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의 제한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테마는 초기의 [신과 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소론]에서부터 일관되게 등장한 테마다.[에티카]에 와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지성은 현실적으로 유한하든, 무한하든간에 의지, 욕망, 사랑 등과 같이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 아니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에 포함된다고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1부 정리31) 그리고 여기서 능산적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해 파악되는 것, 아니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곧 자유로운 원인으로 고찰되는 신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소산적 자연은 신의 본성이나 신의 각 속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 곧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성은 신의 사유 속성의 양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성은 신적 본질을 물질계에 매개하는 데카르트적 의식이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2-3/ 내재적 인과율과 목적론 비판 : 맑스적 인과율?


맑스에게 있어 역사의 인과율은 명확히 '내재적 인과율'이다. 즉, 그에게 '역사' 외부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 '내적 모순'에 의해 운동하며, '관념들'은 그 운동들 속에서 생성된다. 나아가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와 [자본]에서 그러한 관념들이 스스로--자기발로--서는 메카니즘까지도 역사내재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와 동일하게 스피노자는 '필연적인 것'에 대해 사유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에티가 1부 정리15)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에티카 1부 정리18)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은 이른바 데카르트 식의 타동적 인과율과 헤겔식의 표출적 인과율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데카르트적 인과율에 따르면, 물질계의 운동은 다른 외재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다른 외재적 원인은 또 다른 외재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사물의 외재적 원인을 밝히는 타동적 인과율은 결국 무한한 환원을 통해서 최초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신은 모든 운동의 제1원인이 된다. 결국, 초월적 원인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제1원인으로서 신(God)의 관념을 거부한다. 그는 물질적 세계가 상위의 이질적인 윈리의 개입없이 자기 자신에만 기초하는 하나의 자연적 질서임을 논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데카르트적 인과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인과율에 일정한 제한을 가함으로써,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라는 초월적 원인을 거부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적인 타동적 인과율은 오직 상호 외적 원인이 되며, 상호간의 역능의 증진으로 작용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상호 파괴적일 수도 있는 '양태들'의 세계에서만 적합하다. 반면에, 실체와 관련된 필연적인 원인은 오직 내재적인 원인으로서만 파악되어야 한다. 신은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기 때문에. 한편, 헤겔의 인과율과 구별되는 스피노자의 인과율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독특한 본질 개념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것이 주어지면 사물이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사물이 필연적으로 없어지는 것, 또는 그것이 없으면 사물이 그리고 반대로 사물이 없으면 그것이 있을 수도 생각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을 나는 어떤 사물의 본질이라고 한다'(2부 정의2)고 정의한다. 이러한 본질에 대한 규정은 헤겔의 그것과 질적으로 구별된다. 즉, 스피노자의 본질은 헤겔식의 '구체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유일한 추상적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사물의 특정한 현동적 존재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들)인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는 '크기가 같거나 다른 물체 두어개가 따른 여러 물체의 압력을 받아서 서로 접합하거나, 아니면 두어 개의 물체가 같은 속도로 또는 다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자신의운동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우리는 그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물체 또는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물체의 이러한 합일에 의해 다른 물체와 구분된다고 말한다. 이 때, 어떤 것들이 분리되어 나가도 그 물체의 본성이 유지된다면, 그것들은 이 물체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본질론에 기반해서 소위 '구조적 인과성'을 도출했다. 즉, 어떤 요소들, 운동하는 본질들의 관계들, 알튀세르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인과율에 입각해서 그는 목적론적 역사관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욕이나 충동을 의식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충동이나 의욕에 사로잡히게끔 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목적을 위하여, 곧 그들이 요구하는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취된 것에 관하여 항상 목적인만을 알려고하며, 그것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그러한 수단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들은 그러한 수단을 자기들의 사용을 위하여 마련해 준 어떤 다른 것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은 자신에게 아무런 목적도 설정하지 않고 또한 목적인은 인간의 상상에 지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 곧 '이 목적에 대한 이론은 자연을 전적으로 전도시킨다. 왜냐하면이 이론은 원인인 것을 결과로 고찰하며, 또 그 반대로도 고찰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이론은 선행하는 것을 후행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여긴 이후에', '이로부터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하여선, 악, 질서, 혼란 등과 같은 개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자유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로부터 곧 칭찬과 비난, 죄와 공적 등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니체의 계보학을 선취하여, 칸트와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폭로한 것이 된다. 즉,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환상과 선악의 분류 자체가 역사 내재적인 '환상의 생산메카니즘'에 따른 것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2-4/ conatus의 존재론 및 그것의 윤리-정치적(ethico-political) 함의


[에티카]는 매우 분명하게도 존재양식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데카르트적 존재양식이 하나의 환상임을 밝힘과 동시에 또 다른 존재양식을 제시한다. 그의 존재의 내재적 양식에 의한 설명 모델은 초월적 가치들을 의지적 노력(recourse)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적 존재양식에 있어 핵심적인 개념은 'conatus'가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관념은 conatus라는 개념을 통해서 스피노자의 전(全)저작들을 관통한다. 그에 따르면 '각각의 사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에티카] 3부 정리 6 강조는 인용자) 또한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 지속하려는 노력은 유한한 시간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한다.(에티카 3부 정리 8) 왜냐하면, 만일 이 노력이 사물의 지속을 결정하는 유한한 시간을 포함한다면, 그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역능 자체에서 그것이 한정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존재하지 못하고 소멸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정리 8 증명) 즉, 역능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코나투스는 그러한 면에서 무한한 시간을 포함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자기보존의 노력 즉, conatus는 홉스에게서 처럼 수동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이나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띰을 알 수 있다. 즉, 사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비례하여, 능력이 있는 만큼,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 만큼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무능력이고 반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역능이다. (에티카 1부 정리 11, 또 다른 증명)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신의 역능은 신의 본질 자체(에티카 1부 정리 34)이며 이러한 역능은 모든 개별적 사물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인간들 속에서도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특히 개별적 '인간'에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conatus에 촛점을 맞춘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독창적인 유물론이 집약되는 곳은 우리의 육체와 자기의식적 정신의 존재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 이론이다. 코나투스는 정신과 관련될 때는 의지(voluntas)이며 정신 및 신체와 관련될 때는 욕동(appetitus)이다.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동이다. 즉, 욕망은 개별적 사물과 동일한 개별 인간의 '코나투스'에 대한 인간적 의식인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러한 Conatus는 존재의 힘, 사물의 현동적 본질, 무한한 지속시간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의식한다. 요컨대, 인간에게 코나투스는 곧 욕망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며, 그것은 개별개별의 인간 각각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개별개별의 인간이 이러한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질 때, 그는 더 큰 활동성을 획득하고 더 큰 역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덕(virtu)은 곧 역능(potentia, puissance)이다.'(에티카 4부 정의7)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별성' 자체 내에 어떤 '압축할 수 없는 최소한'의 conatus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코나투스는 통치체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정치론]은 통치체의 코나투스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신학-정치론]에서 그는 '인간은 시민적 국가에 대해 자연적 욕구를 갖고 있고 이 국가는 완벽하게 파괴될 수 없다. 공화국 속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갈등과 소요는 체제의 변동에 의해서만 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다면, 국가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국가의 이행만을 초래한다.([신학-정치론] 6장 1-2절)'고 적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압축할 수 없는 최소한의 개별성으로서 코나투스가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무정부주의 적인 인민혁명의 영향 아래에서조차 똑같이 압축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의 존재론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문제 나아가 개인성과 사회성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독창적인 시각을 제시해준다. 헤겔적인 의미의 보편성-개별성의 관계가 아닌 다른 형태의 보편-개별의 관계가 그것이다. 알튀세르는 '세계는 발생하는 일 전체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논거로 삼아서, 개별적인 하나의 '발생'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conatus를 매개로 해서 개별자는 개별자임과 동시에 그것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도 보편자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개인성과 사회성의 문제로 치환하면, 개인성의 증대 속에서 상호 역능을 증대시키는 사회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져야 한다. 그것은 이 양자-개인성과 사회성-가 어떤 '억압할 수 없는 최소'로서 모든 현실적 상황들 속에 내재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항상적인 가능성으로 주어진 개별성이 상호 교통을 통해서 어떻게 상호 증진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구성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3/ 자유주의의 인간학을 넘어 : 탈주체의 인간학?


3-1/ 자유주의의 정치적 주체 : 자율적 주체의 인간학


자유주의의 정치적 세계는 계약에 기반한 시장과 국가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것은 먼저 그 전제로서 '계약하는 주체'를 필요로 한다. 계약하는 주체가 없는 계약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와 로크는 매우 상이한 인간관과 매우 상이한 논증방식을 사용하고 있기만, 기실 그들은 정치적 행위를 선험적인 인간/주체로부터 도출해낸다. 즉, 그들에게 '계약' 이전에 계약의 주체가 선험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에서 출발한다.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이미 '이성과 양심을 가진 주체로서 인간'이라는 특정한 인간학을 저변에 전제한다. 이러한 식의 선험적인 인간학은 루소의 역사적 인간학에 의해 비판된다. 루소가 보기에 이들이 상정했던 자연상태의 인간은 진정한 자연상태의 인간이 아니며, 특정한 사회적 관계들과 역사적 조건들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다.([인간불평등 기원론])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홉스와 로크는 역사의 특정한 상황이 전제된 인간의 속성을 일반론적인 인간으로 이상화한 것이 된다. 이러한 기획의 차이는 매우 심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홉스나 로크의 경우 선험적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그들이 상정한 인간적 속성 외의 것들을 배제하는 효과를 가지지만 반대로, 루소의 경우 역사 속의 인간을 사고함으로써 인간적 속성들을 결정하게되는 인간의 역사적 존재형식을 문제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홉스와 로크는 각각 인간적 속성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각각 논지들을 요약해보자.

홉스는 '정념에 지배받으며, 이성을 활용하는 원자로서의 주체'에서 그의 모든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주체성의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운동은 다른 운동에 의해서만 일어나며', 인간의 '감각은 외부 물체의 움직임이나 압력으로 인하여 생기는 환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고 주장한다.(리바이어던 1부 1장) 또한 그에 따르면, 동물의 운동에는 '생명적 운동'과 '동물적 운동'이라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그런데, 생명적 운동은 혈액, 맥박, 호흡 등의 신진대사를 의미하고 '동물적 운동'은 의지적 운동이다.(리바이어던 1부 6장)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 정념은 모두 '의지적' 운동, 즉 '욕구와 혐오'의 운동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러한 욕망 중에서 제1의 운동은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스스로의 운동을 지속하려는 욕망, 곧 conatus다. 이러한 Conatus의 존재론은 스피노자의 그것과 형식상 동일하다.

그러나 그는 Conatus를 스피노자와 달리 어떠한 교통도 없는 원자론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관의 핵심적인 문제는 '나의 욕망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며, 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나의 욕망이 결코 개인적이며 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되지 않고, 집합적이고 외재적인 힘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조작된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어떤 자유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의 서두에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사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심한 노예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소가 결국, 소상품 생산자의 사회와 인민의 풍습 교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후퇴한 반면, 스피노자는 보다 근본적으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기실 인간은 결코 원자적 주체가 아니며, 원자적 주체가 본질적으로 어떤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특수한 '개별성의 정치철학' 만의 전제인 것이다. 개별자 혹은 개인의 사유가 사회적 관계망들에 의해 구성된다면, 나아가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정동적 예속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면, 홉스의 기본적인 전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일종의 환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편, 로크는 이성적,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을 계약의 당사자로써 상정한다. 신이 인간에게 이성과 양심을 주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이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로크에게는 '인간 이하의 인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이나 '광인' 좀더 나아가면 '무산자'나 '노동자', '여성' 들이 그들이다.(6장 부권에 대하여) 따라서 모든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인간만-이성과 양심의 인간-이 인간일 수 있으며 계약에 참여하고,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개인이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판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문제를 로크는 얼버무린다. 그는 그것은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라고 지적한다.(6장 '부권에대하여') 그리고 덧붙여 그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은 국가에 의해 공인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증의 논리적 모순-사회상태이전에 국가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을 공인해줄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계약이 가능한가?-은 차치하고서라도, '계약하는 주체'를 규정하는데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는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들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들 중에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비교해 볼 때, 결정적인 것은 '왜 이성과 양심만이 인간의 조건인가?'라는 문제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는 더욱 본질적으로 '왜 원자적인 인간을 선험적으로 상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요컨대, 로크나 홉스가 자신들의 정치철학의 전제를 특정한 '선험적 인간'에서 출발했던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기실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계약론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선험적 개인(홉스 : 욕망의 주체, 로크 : 이성과 양심의 주체) ---> 계약 ---> 사회" 여기서 개인은 그 속성이 무엇이건, 모든 권리의 출발점이자, 의무의 귀결점이다. 따라서 여기서 '집합적 주체'나 '집합적 권리'는 이차적인 것이 되며, 개인성의 구성과정 및 그것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파악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탈주체의 인간학이라는 관점에서 스피노자를 읽어 내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3-2/ 스피노자 :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parallelism)


앞에서 살펴본 실체와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이라는 개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개별적 사물로서 인간의 본질은 필연적 존재-곧 신-을 포함하지 않는며,(에티카2부 공리1)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의 존재가 속하지 않거나 또는 실체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2부 정리10)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어떤 양태에 의해 곧 사유의 양태에 의해 구성된다(2부 정리11)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본질에는 신체 존재한다. 신체는 모든 물체와 마찬가지로 신의 본질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이다.(2부 정의 1) 따라서 사유가 신의 속성인 것처럼 연장도 신의 속성이다.(2부 정리2) 그리고 그것이 신의 속성인 한,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하는 실체는 동일한 실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런 속성으로 파악되'며 (2부 정리7)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은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단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2부 정리7 보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독특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것은 신의 무한한 속성들이 그러하듯이, 사유속성과 연장 속성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상호 결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속성은 실체와의 관계에서만 필연적으로 '결정'될 뿐, 상호간에는 어떤 결정성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속성은 평행하다.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외부 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한다'.(2부 정리26) 그리고 정신이 외부 물체를 표상하는 경우-현존하지 않으나 정신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 관념하는 경우- 그것은 외부물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지 않는다. 또한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2부 정리19) 신은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경우가 아니라, 매우 많은 다른 관념으로 변용하는 경우에만 인간의 신체의 관념을 가지거나 인간의 신체를 인식한다.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자기자신을 인식한다'(2부 정리23) 인간 정신은 인간의 신체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즉 인간 신체의 인식은 신이 인간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경우에 한에서는 신과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한에서는 신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신체는 정신을 사유로 결정할 수 없으며, 정신도 신체를 운동이나 정지로 그리고 다른 어떤 것으로 결정할 수 없다." (에티카 3부 정리 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유 자체가 존재-외양-의 근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하고, 또 이를 생각하고 ...이처럼 무한히 반복될 뿐이다. 따라서 사유의 속성의 무한한 변용이 있을 뿐, 이는 연장 속성과는 아무런 관련도 맺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사유의 양태로 고찰되는 한 전체 자연의 질서나 원인의 연결은 오직 사유의 속성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되며, 사물이 연장의 양태로 고찰되는 한 전체 자연의 질서 역시 오직 연장의 속성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정리7 주석)

들뢰즈는 이러한 평행론이 칸트적 의미의 의식에 의한 신체의 지배를 비판하는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신체와 욕망의 문제를 특권화시킨다. 한편 알튀세르는 이러한 평행론 테제를 맑스의 '정치경제학 방법'과 연결시키면서, 지식 생산의 고유한 메카니즘이 있음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사유의 과정 속에서 생산되는 '사유구체'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현실구체'는 명확히 구별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들뢰즈나 알튀세르의 주장들- 모두는 '사유하는 주체'의 자명성을 허문다. 그리고 사유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즉, 사유가 외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촬영'과 '모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유 및 지식 생산에 어떤 고유한 메카니즘이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관념-그것이 적합한 것이건, 그릇된 것이건- 생산의 고유한 메카니즘이 문제가 된다.


3-3/ 인식의 쟝르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식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자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관념의 고유한 생산 양식 속에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적합한 인식, 곧 신의 관념과 결합된 인식이 있으며 동시에 정동적으로 예속된 관념, 부적합한 관념들의 효과로서의 인식이 있다. 스피노자는 이를 구분하여, 인식의 쟝르를 3가지로 나눈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그것은 1종의 인식, 2종의 인식, 3종의 인식이다.

1종의 인식은 감각을 통하여 손상되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지성에 나타나는 개물들로부터 오거나, 아니면 기호들로부터 오는, 예컨대 어떤 낱말을 읽거나 듣거나 하여 그것이 지칭하는 사물을 상기하는 것에서 오는 인식이다. 이러한 1종의 인식은 의견 또는 표상이라고도 불리우며,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사물의 성질에 대하여 공통관념과 타당한 관념을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인식을 이성 혹은 2종의 인식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며 부분에서나 전체에서나 똑같은 것은 결코 개물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에티카 2부 정리38) 하지만, 모든 것에 공통적이며 부분에도 있으며, 그리고 전체에도 똑같이 있는 것은 타당하게 파악될 수 있다.

(에티카 2부 정리 38) 이러한 파악이 바로 2종의 인식이요, 이성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종의 인식으로서 그는 '직관지'를 규정한다. 3종의 인식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써, 신의 한두 가지 속성인 형상적 본질의 타당한 관념에서 사물의 본질의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세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에티카 5부 정리25) 또한 우리들은 우리가 세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즐기며,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하게 된다.(에티카 5부 정리32)

1종의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며, 2종과 3종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1종의 인식은 감각이나, 말, 표상 등에서 온다. '말과 표상의 본질은 사유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신체 운동에서만 형성'된다.(에티카 2부 정리 49) 이에 따르면, 1종의 인식은 결국, 신체의 변용 및 그것에 대한 관념인 '정동'에 의해 예속된 인식인 것이다. 연장 속성의 변용으로서 개별개별의 신체들은 상호간에 외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외적관계들은 그자체로 고찰될 때, 우연적 관계이다. 사물을 과거와 아울러 미래에 관하여 우연으로 고찰하는 것은 오로지 표상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신이 무한한 변용 역능에 비추어 볼 때, 개별적 사물은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선다. 따라서, 신의 역능과 관계하지 않는 정동적 예속과 이에 따른 '가상화'가 곧 1종의 인식인 것이다.

반면, 타당한 관념은 대상을 떠나서, 정신의 개념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2부 정의4)이다. 그리고, 사물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은, 표상이나 정동이 아니라 이성의 본성에 속한다.(에티카 2부 정리44 참조) 그리고 정신안의 타당한 관념에서 정신 안에생기는 모든 관념 역시 타당하다. 이 경우 신은 무한한 한에 있어서, 신이 매우 많은 개체의 관념으로 변용하는 경우가 아니라, 신이 단지 인간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경우에만 신의 지성 안에 신이 원인인 관념이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는 공통개념이 필연적으로 참일 수 있는 근거로 그것들이 신의 관념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스피노자가 지적하는 인식의 메카니즘은 명료해진다. 1종의 인식으로 표현되는 '가상'(illusion), '환상'은 감각, 기호, 표상 등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의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유는 연장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독자적인 신의 속성이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1종의 인식은 정동적 예속 상태를 의미한다. 정동적 예속은 신체의 변용과 그에 대한 관념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2종의 인식 곧 이성은 공통개념의 형성으로부터 온다. 공통개념은 모든 개별적 사물들에 공통적이며 부분에도 있으며, 그리고 전체에도 똑같이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God)에 대한 관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에 대한 관념이다. 이렇게 정리한다면, 이제 문제는 분명해진다. '어떻게 1종의 인식에서 이성으로 이행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문제는 결코 순수한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이러한 문제는 신체와 욕망과 기타의 정동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한한 양태들이 어떻게 정동적 예속과 이에 따른 가상(illusion)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윤리-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정치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필연적 인 존재적 조건인 정동과 가상의 발생 메카니즘을 파악해야만 한다.


3-4/ 정동(affect)의 인간학 : 예속과 해방의 변증법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이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려는 개인의 노력(Conatus)과 동시에 이 노력에 대한 고유하게 인간적인 의식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의지'(voluntas)와 구분되면서 정동의 일부를 이룬다. 정동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다.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정동은 욕망과 기쁨 및 슬픔이다. 이중 기쁨과 슬픔의 정동은 그 자체로는 수동적(passive)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기쁨은 그것에 의해 정신이 보다 커다란 완전성으로 옮겨가는 수동이요, 슬픔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옮겨가는 수동일 뿐이다. 반면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정동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또한 연장 속성과 사유속성이 동일한 실체의 변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일치한다. 신체가 이 대상이나 저 대상의 표상을 자신 안에 만들기에 적합함에 비례해서 정신도 이 대상이나 저 대상을 고찰하기에 적합하다.(3부 정리2 주석)

한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정신은 신의 속성인 사유의 양태이다. 그리고, 정신의 본질은 적합한 관념과 적합하지 않은 관념으로 구성된다. 정신의 능동은 오직 적합한 관념에서만 생기지만, 수동은 적합하지 않은 관념에만 의존한다.(에티카 3부 정리3) 따라서 기쁨과 슬픔은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지 않은 관념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에 있어서는 수동인 것이다. 그리고 타당하지 않은 관념은 정신 자체의 무능력을 표상한다. 그리고 이처럼 정신은 자기의 무능력을 표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슬픔을 느낀다. (에티카 3부 정리55)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정신이 적합하지 않은 관념을 가질 때, 정신은 이로 인해 슬픔을 느끼며, 이러한 슬픔으로 인해 더 작은 완정성, 더 작은 활동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동의 고착, 모방, 전이 등이 발생하며, 개별적 인간들은 상호간에 미움과 질시에 빠지고,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동 그 자체에 대해 정신은 무능력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정신을 사유로 결정할 수 없으며, 정신도 신체를 운동이나 정지로 그리고 다른 어떤 것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에티카 3부 정리 2) 이성 또한 정동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참다운 인식은 그것이 참인 경우 어떠한 정동도 억제할 수 없고, 그것이 정동으로 간주되는 경우에만 정동을 억제할 수 있다." (에티카 4부 정리 14) 그리고 '정동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동,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정동 보다 더 강한 정동에 의하지 않고서는 제거될 수도 억제될 수도 없다.'(에티카 4부 정리7) 예컨대, 어떤 슬픔의 정동은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정동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동의 인간학'은 정신이 육체를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신' 혹은 '영혼'의 특권적 지위를 파괴시킨다. 또한 이성이 정동을 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성의 특권적 지위를 허물어뜨린다. 따라서 이제, '정신이 정동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할 수 있는 과정을 제시하고자 했던 그 유명한 데카르트'(에티카 3부 서문)는 논박당한다. 나아가, Kant적 의미의 실천이성에 의한 도덕의 형이상학에 대해 정동은 어떤 복종의 의무도 없음이 증명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이성의 법칙에 의해 질서 잡힌 현상적 세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 이성의 법칙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성의 정동에 대한 절대적 통치의 가능성을 논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동의 인간학은 홉스적 인간으로의 복귀인가? 결국 남는 것은 강자의 원리고 상호 파괴의 원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정동'은 교통(communication)을 전제로 한 개념이며, 이러한 사회적 교통을 통해서 정신은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 공통 개념에 대한 인식(이성)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동의 인간학 내에는 예속과 해방의 고유한 변증법이 구성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동은 신체의 변용 및 그것의 관념이다. 그리고 신체는 신의 양태적 변용으로서 신의 연장(extension)이다. 주지하다시피, 모든 양태는 상호 교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통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능동과 수동의 정동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교통은 상호파괴적일 수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에 인도되는 욕망이 존재할 가능성 또한 존재론적 사실이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가 다른 물체와 공통으로 갖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정신은 더욱더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은 인간의 육체와 본성상 일치하는 것에 대한 인식에서 기쁨을 느끼며, 그에 따라 그러한 것을 좀더 많이 인식하려고 한다. 따라서 활동적인 변용작용들은 그것들이 발생할 때, 필연적으로 즐거운 것들이다. 모든 슬픔은 우리의 활동역능의 감소이기 때문에, 활동적인 슬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수동적인 기쁨과 욕망 이외에 우리가 활동하는 한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기쁨과 욕망의 다른 정동이 존재한다.(3부 정리58)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신은 적합한(adequate) 관념을 파악하는 한, 즉 활동하는 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정신이 활동하는 한 정신에 관계되는 정동에는 기쁨이나 욕망에 관계하는 것밖에 없다.(3부 정리59) 나아가, 우리들이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사물에 대한 정동은 다른 사정이 같을 경우, 우연적인 것에 대한 정동 보다 더 강하다.(4부 정리11) 또한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을 경우,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하다.'(4부 정리18) 요컨대, 초개인적인 교통속에서 존재하는 코나투스는 적합성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요약해보자. 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들은 가상작용과 동시에 이성 속에서 생활한다. 모든 인간 속에 이미 이성, 즉 진리적 관념들과 기쁜 정념들이 있는데, 이는 부분적일지라도, 그가 그 자신의 유용성, 그의 고유한 유용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든 인간 속에 아직 가상작용이 있는데, 이는 모든 외부적 원인들을 지배하기에는 그의 역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스피노자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육체의 행위 역능을 증가시키는 정동들을 경향적으로 지배하는 연쇄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정신의 영역에도 해당하므로 우리의 정신의 사유 역능을 증가시키는 정념들을 인식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사물의 적합한 원인을 파악해야 하며, 동시에 관념의 적합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즉, 공통개념에 기반한 이성적 인식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들이 슬픔의 원인을 인식하는 한에서 슬픔은 수동이기를 멈춘다. 즉, 그러한 한에서 슬픔이기를 멈춘다.'(에티카 5부 정리18)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이성은 정동에 대해 무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들을 원인에 의해 적합하게 인식할 때라도, 우리가 정동성으로부터 절단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기쁜 정념(passion)들'의 방향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화의 과정이 '이성에 입각한' 과정은 아니다. 만약 어떤 이성의 지시에 따라 어떤 정념이 생산될 수 있다면, 이는 결국 이성에 의한 정동의 지배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의 정동으로의 전화는 '이성'의 정동적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관념을 사고의 영역에서 실천의 영역으로 이행시키기 위해서 그것에게 사후적으로 어떤 특별한 의지적 행위 또는 어떤 특별한 감정의 효과를 추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관념은 항상 이미 어떤 정동을 수반하고 또 역으로 모든 정동은 하나의 표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4/ 자유주의의 정치적 세계를 넘어 : 유물론적 정치학과 반계약론?


4-1/ 자유주의의 정치적 세계 : 이성적 규범과 계약의 세계


과학혁명에 의해 '자연'에 대한 신의 지배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지만, 인간 세계에 대한 신의 지배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갈릴레이가 '우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던지고 나서 150년이 지나서야 Kant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선구자들이 가장 손쉽게 사고할 수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반은 바로 '계약'이라는 관념이었다. '계약'이라는 관념은 중세의 성립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성립기에 활용된 영주-제후-기사 간의 계약이라는 형식적 틀은 중세의 전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신학적 자연권 이론에서는 신과 교황과의 계약이나, 신과 왕과의 계약 등의 모티브들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했다. 물론 도시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이라는 제도에 대한 상상물들 또한 '계약'이라는 표상을 재구성해낸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사회세계를 인간들 간의 계약으로 구성된 것으로 논증해냈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자연법 이론의 틀 속에서-그것을 형식적으로만 차용한 루소를 포함하여- 사회상태를 '자연상태' 이후의 상태로서 파악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자연상태는 어떤 의미에서건, 사회상태와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들은 공히 자연상태에서 '계약'을 거쳐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논리체계를 구성한다.

('자연상태 --> 사회계약 --> 사회상태'의 형식적 틀)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 내용은 매우 상이하며, 매우 심각한 이단점들을 형성한다. 여기서는 '왜 계약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들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계약'이 사회 혹은 질서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이 없다면 사회도 없다. 먼저 홉스의 '계약'에 대해 살펴보자. 홉스는 그 자신의 인간관과 사회관 속에서 '신'의 그림자를 사실상 지워버렸다. 그는 신의 섭리나 신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독자적인 인간의 형상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것은 소위 자연학이 신학을 공략했던 논리를 차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홉스의 계약 모델은 자연상태에 대한 두 가지 전제위에서 구축된다.

⑴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⑵만인은 평등하다.

이 두가지 전제없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홉스가 논증하는 사회계약의 필연성은 자기보존과 평화의 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라면, 위의 두 가지 상태가 사실상 '무권리상태'를 의미함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인은 권리의 동시적 포기 및 주권자(군주)에게로의 이양이라는 자연법-이것은 홉스에게는 유일한 자연법이지만 사실상 자연법이 아니다-을 따르게 된다. 여기서 특히 두번째 전제는 사실 무시되어 왔지만 매우 중요한 전제이다. 그는 [Leviathan]의 1부 13장에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적으면서, 아무리 약한자도 강한자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논지를 역으로 전개해본다면, '사회계약'의 전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만약 특정한 개인이 나 집단이 지배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타인들보다 월등한 지적/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하여 타인들이 그를 죽일 수 없다면, 사회계약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런 사람이 한명이 있을지라도, 만인의 사회계약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사회상태는 존재하지 않고, 양육강식의 자연상태는 지속된다. 따라서 이경우 사실상 홉스가 말한 '인민의 합의로서 제도화된 국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2가지 전제들은 또 다른 문제들을 낳는다. 만인이 평등한데, 왜 특정한 1인이 주권자(군주)가 되어야 하느냐-왜 지금 존재하는 왕이 주권자가 되어야하는가?-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인간들 '모두를 두렵게 하는 공통의 힘'으로 논리적으로 비약한다. 따라서 이제 단지 중요한 것은 '만인의 공포'가 된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전쟁상태에 대한 만인의 공포와 군주에 대한 만인의 공포만 있다면 사회계약은 성립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불합리해 보이는 "공포에 의해 강요된 신약은 유효하다"(리바이어던 1부 14장)는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해보면, 홉스는 애초의 '전쟁상태와 평등'이라는 전제가 아니라, '전쟁상태'에 대한 홉스 자신과 대중의 공포로 부터, 현재 존재하는 군주에 대한 맹약을 도출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공포'라는 현실적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한편 로크에게 있어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할 계약'을 맺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그의 '자연상태'는 홉스의 자연상태처럼 '전쟁상태'가 아니라, 이성적 '자연법'에 의해 구속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자연상태는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통치론 2장 자연상태에 대하여)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상태가 변화없이 지속될 수만 있다면, 사실 계약은 필요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로크에게 사회계약이 필요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소유권'의 비밀에 있는데,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징후적 독해가 필요하다. 그는 [통치론] 1장에서 4장까지를, 그 자신의 '자연상태'가 홉스적 전쟁상태나 노예상태와 다르다는 것을 논증하는데 쓰고 있다.(1장 서론, 2장 자연상태에 대하여, 3장 전쟁상태에 대하여, 4장 노예상태에 대하여) 여기까지에서는 사실상 사회상태로의 이행이 필요없는 자연상태가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5장 소유권에 대하여'를 지나고 나서 정치사회는 필요한 것으로 논증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의 논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소유권'은 무엇인가? 로크는 자연상태-시초상태-에서 인간이 '신이 주신 공유물'에 스스로의 소유물인 신체의 노동을 가함으로서 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신의 의지에 따라 이러한 소유권에 제한이 가해져 있음을 덧붙인다. 즉, 타인도 노동을 가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을만큼 자연물이 남아 있어야 하며, '썩을 만큼' 소유하는 것은 성경에 나온 것 처럼 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화폐의 사용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 이후, 인간은 무한한 소유와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된다. 그는 인간이 "화폐를 발명하고 묵시적 합의를 통해서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들이 대규모의 재산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재산에 관한 동일한 규칙, 곧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소유해야 한다는 규칙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5장 소유권에대하여) 따라서 이제서야 인간들은 자신들의 소유권이 상호 충돌함을, 그리하여 홉스식의 전쟁상태와 유사한 상황의 발생가능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들-보다 정확하게 는 부르조아들-은 그들간의 소유권 충돌을 조정하고, 여타의 세력들로부터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법률을 제정하게 된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최고의 권력은 입법권이 되며, 입법은 인민-정확하게는 입법의 주체인 재산소유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산 보호를 위한 공동체와, 공통의 심판관으로서 국가(commonwealth)는 '만인의 공포의 대상'으로서 주권자 보다 훨씬 느슨하며, 시장사회에 더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결정적으로 재산을 갖지 않은 자는 단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거나, 사회구성원 전체가 아닌 '일부'--로크는 계약과 입법에 있어 과반수론을 주장-만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부'일 뿐만 아니라 '자율적 주체의 계약'을 통한 규범적 동의라는 점이다.


4-2/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정치학?


'유물론적 정치학'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적어도 유물론적 정치학이 소위 '사회경제적 조건' 혹은 자본축적의 조건으로의 '환원'--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의 집중된 형태라는 레닌의 주장과 같은 환원 혹은 그 역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제3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유한 인과적 분석의 논리를 세움과 동시에 고유한 정치학의 대상을 제기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물론적 정치학의 방법으로서 그의 고유한 사회심리학적이고 이데올로기론적 접근을 살펴보고, 그것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대중의 양가성(ambivalence)'과 국가의 현실적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에티카] 4부(인간의 예속 또는 정동의 힘에 대하여)에서 스피노자는 '국가(Civil state)'의 이중적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성에 인도되는 욕망에 따라 생활할 경우, 사람들은 덕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덕을 따르는 사람들 각자는 자기를 위하여 욕구하는 선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욕구할 것이며, 그가 갖는 신에 대한 인식이크면 클수록 더 많이 욕구할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37) 왜냐하면 덕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고의 선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에티카 4부 정리36) 이처럼 사람들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어 그들의 고유한 유용성을 추구할 경우, 국가는 이성안에서 기초지워진다. 이것이 국가의 이성적 기원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운동의 하나의 이상적 계기일 뿐이다. 현실운동의 또 다른 계기 속에는 정동의 집단적 가상화 메카니즘--예를 들면 정동의 모방, 전이 등등--이 존재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필연적으로 여러 정동에 종속된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그 자체로서는 정동에 대해 무능하다. 따라서 이성의 인도를 받는 정동이 필요한데, 이는 [에티카]의 결론처럼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인간은 열정적 정동에 사로잡히는 한 본성상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그러한 한 동일한 인간조차도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은 열정적인 정동에 사로잡힐 때 서로 대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때, 인간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바로 대중(multitude)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대중은 그들이 고통받고 자연력이나 폭력에 의해 더욱 위협받을 때, 그리고 이번에는 스스로가 전제적 권력처럼 극단적이어서 사실은 그들 자신 앞에서 불가사의한 당혹감을 느낄 때, 그들은 더욱 공포에 가득차고 '분격'의 상태에 이르게되어 통제불능의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희망없는 공포나 공포없는 희망은 있을 수 없으며, 대중의 정동은 본질적으로 양가적(ambivalent)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은 하나의 정신-신체로서 '통치체'를 구성하는 기본적 소재가 된다. 즉, 스피노자에게 진정한 정치의 소재이자, 정치학의 대상은 규범적 계약이 아니라, 현실적 대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양가성'을 띠는 고유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서 대중은 양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질적 의미에서 국가의 분석에서 규정적 개념이 된다. 스피노자에게 대중(mass)은 그것이 최종 분석에서, 주어진 해결을 향하도록 정치적 실천을 방향짓는 우연들을 결정하는, 역사적 국면에 따르는, 그리고 정념들의 체계(economies of passion)나 체제(regimes)를 따르는 각기 다른 존재양식이기 때문에, 하나의 분명한 이론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중운동들 그 자체 속에서의 국가적 힘의 인민적 기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제 대중의 양가성이라는 현실의 지평위에서 다시 세워진다. 계약론의 정당성 논의는 재정식화된다. 국가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영속할 수 있는가?

[정치론]은 국가의 현실적 기원에 대해 다룬다. [정치론]의 서론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연구 방법을 밝힌다. 그리고 그 연구방법은 정확히 마키아벨리의 노선을 따른다. 즉, 그는 현실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것이다. 그는 [군주론]에서의 마키아벨리처럼 철학자들의 '정당성' 논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가 보기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당위적으로 논변하려는 것이다. 즉, 철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하는 인간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재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론이 아니라, 가공론이라 할 수 있는' 유토피아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현실적인 영속가능성을 밝혀내지 못한다.

반면, 스피노자는 '국가가 영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라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느냐 감정에 따라서 하느냐를 불문하고 결코 배신적이거나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나라 일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국가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국가개념, 즉, 정치학의 탈신비화를 이루어낸다. 국가는 이성적 계약에 의해 수립되는 것도 아니고,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국가는 경험적으로 볼 때, 공통의 정동에 기반해서 세워지며 개인들 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신민은 국가의 힘 또는 위협을 두려워 할 때와 국가상태를 사랑할 때, 자기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권리 아래에 있다.(정치론 3-8) 즉, '대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대중은 두려운 존재가 되는'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자기의 권리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공포와 존경과의 원인을 유지하도록 구속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는 이미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법률은 정동을 억제할 수 없는 이성이 아니라, 형벌의 위협에 의하여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덧붙인다. '.... 다시 신민을 학살한다든지, 약탈한다든지, 처녀를 농락한다든지, 그밖에 이런 비슷한 일들은 공포를 격분으로 바꾸어 놓게 되고 국가 상태를 적대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을 격분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국가의 권리가 거의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 고, 국가 자체가 자기보존을 못하고 다른 형태로 변형될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민주적 국가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국가 상태는 항상적인 자기파괴의 계기를 가지는 것이다.


4-3/ 스피노자의 반계약론적 기획 : 자연상태 없는 자연권?


주지하다시피, 홉스에게 있어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하나의 원자로서의 개인은 자기보존의 욕구를 갖는다. 그리고 자연권은 이러한 욕구로부터 도출된다. 이러한 기획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보존의 욕구(conatus) 때문에, 스스로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사회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계약'이다. 그러나 결국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계약은 허구적인 것이며 자연상태는 현재의 사회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목적론적으로 배치된 것에 불과하다.

이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명백히 반계약론의 전략을 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것은 대체로 야만인이건 문명인 이건 불문하고 어느 곳에서나 모두 서로 결합하고 있어 어느 정도 국가 상태(civil state)를 이루고 있다."(정치론 1장 7절) '인간이란 공동의 법(general law)을 가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정치론 2-3) 따라서 국가상태-혹은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계약은 불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상태는 이성적 계약이 아니라 공동의 감정에 의한 것이다. 아래의 지적을 보자.

"인간은 ... 이성보다는 정동으로 인도되는 것이므로, 대중(multitude)이 일치하여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한 것과 같이 인도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이성의 인도에 의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무엇인가 공동의 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즉 공동의 희망이나 공포에 의하든지 또는 무엇인가의 공동의 손해에 대해 복수하려고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누구나 고립해서는 자기를 보호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고 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고립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본성에서 국가 상태(Civil)를 욕구하고 있으며, 인간은 국가 상태를 아주 해소해 버린다고 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정치론 6장 1절)

즉, 인간 자체가 정동적 교통 속에서 구성된 사회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민사회 또는 국가에 앞서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상태는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과 폭력적 상황의 논리적인 극한상황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또한 시민사회, 즉 인간들의 상호관계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상태에는 자연권이 없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인류에 고유한 것으로서의 자연권은 인간이 공동의 권리를 가지고 살고 일구어 놓은 땅을 서로 같이 지니고 자기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의지에 따라서 생활할 수 있을 때만 생각하게 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사회상태 내에서의 자연권이다.

사실상 '인간은 자연상태에 있어서나 국가 상태에 있어서나 자기의 본성의 법규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어떤 계약도 계약자들이 그로부터 도출하는 유용성 이외의 타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회상태 내에서도 지속되는 '자연권에 따라 자기의 재판관인 그 자신이 그가 약속한 것이 자신에게 의롭지 못하고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자기의 재량으로 약속을 파기하기로 결의하고 자연권에 따라 이를 파기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법) 속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거나 행위하는 역능을 가지는 만큼 권리를 가진다. 권리는 개물이 행하는 것외의 어떤 것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역능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정 속에서 모든 권리는 제한되지만, 그러한 그 한계들은 현실적 역능의 한계일뿐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금지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은 의무의 지배가 아니라, 역능의 규범(norm), 권리의 통일체(unity), 그리고 그것의 실행이다. 즉, 자연법은 Kant에게서 처럼 의무가 아니라, 권리인 것이다. 여기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인 '권리와 의무의 호혜성'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는 의무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능 만큼의 권리를 가진다는 자연법에 기초하여 스피노자는 현실의 국가 상태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자기유지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국가상태를 해소하지 않으며, 오직 변화가능한 것은 최고권력(supreme authority)이 누구에게 부여되는가 곧 통치권(dominion)의 형식인 것이다. 그는 통치권과 최고권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통치체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대중(Multitude)의 힘으로 규정된 사람들의 공통의 권리-자연권-는 보통 통치권(dominion)이라 불린다. 이 통치권은 최고권력(SupremeAuthority)의 수중에 절대적으로 장악된다. 이러한 최고권력에 속하는 권리는 마치 하나의 정신에서 인도된 것 같은 대중의 힘에 의한 자연권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법률을 제정하고 그것에 관하여 싸움이 생길 때에는 그 각개의 안건에 관하여 이것을 해석하고 당해 안건이 적법인가 위법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는 최고권력에만 귀속한다. 그리고 최고권력의 배려가 전체 민중으로 성립된 회의체에 속할 경우, 이 통치를 민주정치라 부르게 된다. 또 그 회의체가 약간의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때 이를 귀족정치라고 부른다. 끝으로 국사에의 배려 즉, 통치권이 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이를 군주정치라고 부른다. 오직 현실적으로 변화가능한 것은, 이러한 통치권의 형식이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각각의 통치(dominion)의 상태를 국가 상태(Civil)라고 하고, 통치의 전체 범위를 국가(Commonwealth)라고 부른다. 국가는 경험에서 보듯이, 개인보다 크다. 따라서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상태는 원래 공포와 불행을 배제하기 위하여 세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상태의 목적은 생활의 평화와 안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평화와 안전을 홉스의 그것과 세심하게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신의 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최선의 국가는 신체와 같은 여러 기능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이성과 진정한 정신력과 정신생활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간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것과 같은 경우'에 확실히 국가의 안전은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의 국가는 법률들은 이성의 규제에 따라 설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법률 그 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지속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하나의 메카니즘이다. 아래의 글을 보자.

"어떠한 국가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 한번 정당하게 정해진 여러 법률이 침범당하는 일이 없이 유지되는 그러한 국가가 아니면 안된다. 법은 바로 국가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법은 이성과 인간의 공통적인 감정(commom human emotion)에 의하여 지지되는 경우에만 파괴되지 않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이성의 도움에 의해서만 지지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무력하고 용이하게 파괴되는 것이다." (정치론 10장 9절)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인간들에게 계몽의 세례를 퍼붓는 것이 아니다. 대중정치 속에서 국가는 그 영속성을 위해서, 이성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감정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의 개별성을 억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국가든지 그것의 멸망은 외적 원인 보다는 내적 원인 즉 대중이 격분하게 되는 일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대중정치의 메카니즘이고, 그것은 '절대 국가' 곧 지속적 민주화를 지향하지 않으면 구축될 수 없는 것이다.




5/ 자유화와 민주화 : 정치적 교통(communication)과 대중의 역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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