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철학의 ‘정통’과 ‘극한’ : 소비에트 철학과 알튀세르의 철학
이용주 (서울대 사회학 )
1. 머리말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쯤 전에는 우리 모두는 맑스주의자였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우리 모두는 맑스주의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적어도 당시 우리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고, 또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충분하고 열정이 넘친다고 해서 곧바로 모두가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닌의 말처럼, 맑스주의는 과학으로서 ‘학습’되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수십 년 동안의 단절의 역사를 한 순간에 복원해낼 기세로 미친 듯이 학습하였으며,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원전과 교과서들을 독파해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우리를 지도해줄 거장도, 스승도 없었습니다. 학습을 위한 소모임들이 산재해 있었고, 각각의 소모임마다 선배들이 즐비했지만, 그들 역시 맑스주의의 초심자라는 점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 엥겔스, 레닌의 원전들과 소련의 교과서들에 나와 있는 공식적인 입장을 그토록 중시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에겐 판단의 기준과 믿을만한 권위가 필요했었으니까요.
철학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물론 우리는 원전과 교과서 이외의 책들도 다양하게 읽었습니다. 칸트와 헤겔의 독일관념 철학도 읽었고, 루카치도 읽었으며, 수많은 현대의 서구 맑스주의 철학자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저작들이 우리에게 반짝이는 영감을 제공해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철학에서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시 ‘권위’있는 책들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철학사』(녹두), 『철학의 기초 이론』(두레), 『역사적 유물론』(새길), 『맑스주의 철학 성립사』(아침) 등과 같은 책들은 모두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이었으며, 80년대 철학에서 맑스주의자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겐 필독서였던 셈이지요.
우리가 이런 책들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을 ‘학습’하였다는 사실은, 80년대에 우리가 수용한 맑스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은 맑스주의 철학을 대표한다기보다는 맑스주의 철학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경향을 대표하는 책들이었지요. 서구의 다양한 맑스주의 철학자들이 소련의 철학 교과서와는 완전히 다른 맑스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알튀세르를 비롯한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주의의 위기’와 함께 맑스 철학의 공백과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9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강의는 바로 이러한 80년대 식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즉 80년대 우리가 학습했던 소련의 공식 철학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소련의 공식 철학들이 마치 맑스주의 철학에는 아무런 논점도 없는 듯이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체계’로서 맑스주의 철학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는 숱한 철학적 쟁점들과 의문투성이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러한 쟁점들과 의문투성이들을 나름대로 헤쳐나가는 가운데 오늘날 맑스주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함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하나의 ‘극한적’ 사유로서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소개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알튀세르를 경유하면서 비로소 소련의 공식 철학을 비롯한 정통 맑스주의의 문제점들을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알튀세르가 1965년 이래 제기했던 문제제기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2. 소련의 철학 교과서와 맑스주의 철학의 쟁점들
『철학의 기초 이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원래 제목이 『맑스-레닌주의 철학의 기초』인 콘스탄티노프(F. V. Konstantinov) 감수의 1979년판 철학 교과서를 분책한 것입니다. 이 책은 제1부 서론, 제2부 <변증법적 유물론>, 3부 <역사 유물론>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제1부와 제2부를 두레 출판사에서 『철학의 기초 이론』(1986)으로, 제3부는 새길 출판사에서 『역사적 유물론』(1988)으로 분책하여 출판했었습니다.
이 책의 제1부 서론은 「제1장 : 철학의 대상과 위치」, 「제2장 : 맑스주의 철학의 성립과 발전」이라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제1장 : 철학의 대상과 위치」는 다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철학의 대상에 관한 관념의 발전
2. 철학의 근본 문제
3. 변증법과 형이상학
4. 맑스주의 철학의 대상과 다른 과학과의 관계
5. 철학의 당파성
철학의 근본 문제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물음으로서, 이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가 유물론과 관념론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때 유물론이란 물질적인 것이 일차적이라고 보는 견해이고, 관념론이란 반대로 정신적인 것이 일차적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리키지요. 나아가 유물론은 변증법적인 유물론과 형이상학적인 유물론으로, 그리고 관념론은 객관적 관념론(플라톤, 헤겔의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버클리, 마하, 아베나리우스 등의 관념론)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철학의 근본 문제에는 두 번째 측면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세계의 인식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철학적 유물론을 의식적이고 일관되게 옹호하는 사람들은 세계가 인식 가능하다는 원리를 주장하면서 관념들을 객관적 실재의 반영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서, 일부 철학자들은 확실한 객관적 지식의 획득 가능성을 부정하는 ‘불가지론(agnosticism)'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버클리, 마하, 아베나리우스 등의 주관적 관념론자들이나 칸트, 니체 등의 철학자들). 이상의 것이 이 책의 제1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내용들입니다. 요컨대 소련의 79년판 철학 교과서는 철학사 전체를 유물론과 관념론, 변증법과 형이상학, 유물론과 불가지론 등의 두 진영으로 분할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2부인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에서는 물질과 그 기본적 존재형태, 고도로 조직된 물질의 성질로서의 의식, 보편적인 변증법적 발전 법칙(보편적 연관과 발전의 법칙, 양질 전화의 법칙,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유물론적 변증법의 범주(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 원인과 결과, 필연성과 우연성, 가능성과 현실성,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현상), 인간 인식의 본성, 인식과정의 변증법, 과학 연구의 방법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3부인 <역사적 유물론>은 과학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 사회 생활의 토대로서의 물질적 생산, 경제적 사회구성체, 계급과 계급투쟁, 인류 공동체의 역사적 형태, 사회의 정치적 조직, 사회 혁명, 사회적 의식의 구조와 형태, 사회 생활에서의 과학의 지위와 역할, 사회와 개인, 역사에서의 대중과 개인의 역할, 역사적 진보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단지 79년판 철학 교과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역시 콘스탄티노프가 감수한 1958년판 철학 교과서인 『맑스주의 철학의 기초』도 서론,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 유물론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론의 「제1장 : 철학의 대상」에서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소련 철학계 내에서도 몇 가지 논쟁은 존재했었고, 또한 직접적으로는 철학 교과서의 구성과 관련한 문제제기도 존재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즉 철학이 세계관이냐 아니면 또 하나의 과학이냐 하는 논쟁이 그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틀에서는 대체로 이러한 구성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과서들은 한두 명의 철학자가 쓴 개인적 저작이 아니라 당의 공식 이론가들이 공동 집필한 집단적 저작입니다. 또한 이들 교과서의 구성과 내용을 둘러싸고 대개는 당의 이론가들 및 철학자들 사이에서 집단적인 토론이 전개되곤 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철학 교과서들을 통해 소련의 철학자들이 맑스주의 철학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이들 교과서에서 맑스주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이라는 두 개의 분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은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역사 유물론은 사회와 역사의 구성 및 발전 법칙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의 한 분야가 됩니다. 물론 『역사적 유물론』의 제1장 제목은 ‘과학’으로서의 역사 유물론인데, 그러나 이는 소련 철학 교과서의 절충성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역사 유물론이 철학이냐, 과학이냐 하는 문제는 역사 유물론의 지위와 관련하여 중요한 쟁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는 역사 유물론을 맑스가 창시한 ‘새로운 과학’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차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가 사회와 역사에 확장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역사적 유물론』의 첫 페이지에는 역사적 유물론이 “철학적 유물론의 원칙들을 사회 생활과 역사의 연구에 적용”한 것이라면서, 이 점이 맑스의 유물론과 그 이전의 유물론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Konstantinov, 1991 : 13). 그래서 순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이 역사 유물론보다 먼저 나옵니다. 원리가 적용되고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역사 유물론의 중심 개념인 ‘물질적 생산력’이란 변증법적 유물론의 ‘물질’ 개념을 사회와 역사에 대한 개념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와 역사의 구성 및 발전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인은 관념의 형태나 종교, 민족적인 공동체 의식 등과 같은 사회적 의식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력이라는 역사 유물론의 테제는 물질이 의식에 선행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장 내지는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변증법적 유물론 내에서 다시 ‘변증법’과 ‘유물론’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의 기초 이론』에서 「물질과 그 기본적 존재형태」를 다루고 있는 제3장과 「고도로 조직된 물질의 성질로서의 의식」을 다루는 제4장은 ‘유물론’에 대한 설명이며, 「보편적인 변증법적 발전 법칙」을 다루는 제5장과 「유물론적 변증법의 범주」를 다루고 있는 제6장은 ‘변증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변증법에 대한 설명과 유물론에 대한 설명이 분리되어 있을 뿐, 양자의 통일체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는 엥겔스가 최초로 사용한 것인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용어는 “철학사를 통틀어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어법에 어긋나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플레하노프와 베른슈타인에서 루카치에 이르는 계승자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성찰 속에서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오갔다는 것이지요(Althusser, 1996b : 127).
소련의 철학 교과서는 스탈린주의의 유산입니다. 즉 그 구성과 내용이 철저하게 스탈린 식의 맑스주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저작들을 보면, 방금 말한 철학 교과서들의 특징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칙들의 확장, 사회 생활의 현상들, 사회와 그 역사의 연구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칙들의 적용”(Stalin, 1990 : 124)이라고 명시하고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변증법과 유물론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변증법’을 상호 관련 및 의존, 운동 및 발전, 양질 전화, 내적 모순 등 4가지 테제로 정리하고, ‘유물론’을 세계의 물질성,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세계의 인식 가능성 등 3가지 테제로 각각 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구성이 스탈린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스탈린은 엥겔스와 레닌의 철저한 주석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스탈린은 주로 『반듀링론』,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자연 변증법』 등의 엥겔스의 저작과 『칼 맑스』,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구성요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등의 레닌 저작들을 전거로 삼아 맑스주의 철학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엥겔스와 레닌의 철학이 바로 이런 내용과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탈린은 단지 이것을 도식적으로 정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80년대 우리가 ‘학습’한 맑스주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이 책들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의 주요 개념과 범주들을 익혔고, 맑스주의 철학의 공식적인 견해들을 확인했으며, 맑스주의 철학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맑스의 원전이나 ‘서구 맑스주의자들’의 저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사고하고 옹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이런 책들이었던 것입니다.
3. 맑스주의 철학 성립사의 쟁점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 즉 엥겔스가 최초로 정식화했으며, 레닌이 계승하고 스탈린이 도식적으로 설명한 이 철학을 우리는 ‘엥겔스주의 철학’, ‘레닌주의 철학’ 혹은 ‘스탈린주의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맑스주의 철학’이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작 맑스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맑스가 이런 식으로 철학 책을 썼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맑스는 물론 철학자였습니다.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젊은 시절 헤겔 좌파의 일원이었으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에 대해 혜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정치경제학 비판에 몰두하던 시절에도 맑스는 결코 자신의 철학적 소양을 버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엥겔스가 정리했던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철학 책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맑스의 철학적 저작들은 대단히 논쟁적이거나(『헤겔 법철학 비판』, 『철학의 빈곤』 등), 미완성의 초고들이거나(「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독일 이데올로기』 등), 아니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나 『자본』과 같이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련되어 있거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같이 정치적인 글들과 관련되어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맑스는 철학자였지만, 정작 철학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조차 맑스는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알튀세르가 이야기했듯이, 맑스가 1858년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변증법에 관해 20여개 페이지 정도 분량의 짤막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밝혔으나, 결국 맑스는 죽을 때까지 그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엥겔스가 『반듀링론』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옹호하고 있을 때, 맑스는 변증법에 관해 겨우 20여 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글도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철학을 가리켜 ‘맑스주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에 대해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이 설명하는 방식은 명쾌하기조차 합니다. 맑스와 엥겔스 사이에는 ‘이론적 분업’이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이저만(T. I. Oizerman)의 『맑스주의 철학 성립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청년 맑스는 정치적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였고 철학적으로는 헤겔 좌파에 속해 있었는데, 포이에르바하를 접하면서부터 맑스는 유물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전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2~43년 무렵에 이르면 맑스는 정치적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철학적으로는 헤겔적인 관념론자에서 포이에르바하적인 유물론자로 이행했다는 것이지요(예를 들어 『독불 연보』의 글들, 『경제학․철학 수고』 등). 그러나 이 시기의 맑스는 아직 새로운 인식과 철학에 걸맞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고, 대신 헤겔이나 포이에르바하의 개념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이후 대략 『공산당 선언』을 집필할 무렵에 이르러 맑스와 엥겔스는 비로소 새로운 철학 사상에 걸맞는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가 물질적 생산력의 문제가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규정하는 토대라는 역사 유물론의 전제를 인식하면서부터 맑스는 이제 철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에 전념하게 되고, 맑스가 『자본』의 집필 준비에 들어간 것도 대략 이 시기부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맑스가 결코 철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요. 맑스와 엥겔스는 지속적인 상호관계와 공동 작업을 통해 ‘이론적 분업’을 실행하였는데, 말하자면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에, 엥겔스는 철학에 각각 전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반듀링론』은 맑스가 한창 『자본』의 집필에 몰두해 있을 때 엥겔스가 쓴 책입니다. 당시 듀링이라는 독일의 분별없는 수학자가 맑스에게서 표절한 관념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결국에는 이제 막 형성된 독일 맑스주의 당의 통일성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맑스와 엥겔스는 듀링으로부터 자신들의 철학적 사상을 방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맑스는 나이가 들었고, 정치경제학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던 터였으며, 더군다나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따라서 듀링으로부터 자신들의 철학과 정당을 방어할 임무는 엥겔스에게 맡겨졌고, 맑스는 엥겔스의 책 서문에서 이 책이 “우리들의 공동 입장”이라며 그 원리를 승인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비록 엥겔스가 집필하긴 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맑스와의 공동 저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맑스주의 철학 성립 및 맑스와 엥겔스 사이의 ‘이론적 분업’에 대한 소련 철학 교과서들이 보여주는 인식 방법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점을 설정할 수 있는데, 이는 맑스와 엥겔스 이후 맑스주의 철학 내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논점은 『반듀링론』을 통해 정식화된 엥겔스의 철학 저작들과 한 번도 정식화되어본 적이 없는 맑스의 철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처럼 ‘이론적 분업’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이론적 분업’은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두 번째 논점은 청년기의 맑스와 장년기의 맑스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철학 교과서들에서는 맑스와 엥겔스가 우선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적 토대를 먼저 구축한 후에, 그에 기초해서 정치경제학 비판에 착수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이 보여주고 있는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방식,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 먼저 나오고 역사적 유물론은 그것을 사회와 역사 연구에 적용한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으로 청년기 맑스와 장년기 맑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 논점은 헤겔과 맑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맑스는 헤겔을 비판하고 그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바꾸었지만, 헤겔의 변증법은 맑스 철학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견해인데요, 그렇다면 맑스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헤겔과 단절한 것인지,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헤겔을 흡수한 것인지의 문제가 남게 됩니다.
소련의 철학 교과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의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예를 들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나 『경제학․철학 수고』와 같은 청년 맑스의 저작에서 맑스 사상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이뽈리트(J. Hyppolite),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사르트르(J. P. Sartre) 등의 프랑스 인간주의 철학자들을 비롯해 루카치(G. Lukács), 마르쿠제(H. Marcuse), 코르쉬(H. Korsch) 등의 이른바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소련의 철학 교과서 식의 맑스주의 철학 성립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 사이의 ‘이론적 분업’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합니다. 특히 코르쉬나 루카치 같은 철학자들은 노골적으로 엥겔스의 후기 저작들(『반듀링론』,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자연 변증법』 등)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면서 맑스의 초기 철학 저작들 속에서 ‘정통 맑스주의’의 흔적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경제학․철학 수고』에 나오는 맑스의 인간주의적 개념들, 예를 들어 ‘유적 존재’라든지 ‘소외된 노동’ 같은 개념들이지요.
결국 소련의 공식적인 맑스주의 철학은 그 자체로서 완전 무결한 것도 아니고, 완성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대의 맑스주의 철학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80년대에 맑스주의 철학을 ‘학습’할 때, 이런 논쟁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원전과 교과서를 읽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80년대에 맑스주의 철학을 학습한다는 것은 맑스주의 철학의 논점과 공백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위’있는 공식적인 입장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맑스주의 철학을 통해 비판적 안목을 기른다기보다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해 안되면 외우기라도 해서” 내용을 습득해야 했지요.
특히 이런 태도가 횡행했던 것은 80년대 후반의 일이었는데, 80년대 후반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이론적으로 맑스주의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습니다. 맑스주의의 주요 원전들과 위에서 말했던 소련의 교과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 이 시기였고, 젊은 인문․사회과학도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모든 점에서 ‘맑스주의의 과잉’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상황이었지요.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나라에서 맑스주의가 가장 왕성했던 이 시기가 국제적으로는―특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맑스주의가 결정적인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시작된 사회주의 나라들의 변화가 결정적이었지요. 소련에서의 개방과 개혁은 소련의 공식적인 맑스주의 이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불러일으켰고, 그 여파는 스탈린주의 비판과 레닌주의 비판을 거쳐 급기야는 맑스 사상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우리 나라에서는 맑스주의 원전들과 소련의 교과서들이 이제 막 번역되던 시기에, 따라서 그것의 논쟁사적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기도 전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고 ‘맑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처할 만한 이론적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당시의 ‘위기’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맑스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이론적 지형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지요. 요컨대 우리에게 맑스주의는 왕성했던 80년대에나 위기에 봉착했던 90년대에나 제대로 토론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서 소련의 철학 체계와 문제점을 사고할 수 있게 해주고,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중에서 루이 알튀세르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맑스주의가 왕성했던 시기에는 맑스주의의 엄밀한 과학적 성격을 환기시켜준 철학자로서, 그리고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정세에서는 맑스주의의 한계와 공백을 사고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할 수 있게 해준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알튀세르의 철학적 개입
우리에게 알튀세르가 다시 소개된 것은 대략 88년 무렵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라고 말한 이유는 80년대 초에도 알튀세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알튀세르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무시되어버렸지요.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알튀세르가 소개된 것은 8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알튀세르의 거의 모든 저술들이 번역됩니다.
처음에 읽었던 것은 알튀세르가 1965년에 펴낸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 등이었습니다. 이 책들을 통해 우리는 소련 교과서들의 한계를 사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맑스주의를 보다 엄격한 ‘과학’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알튀세르와 맑스주의는 우리가 그동안 ‘학습’했던 맑스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고,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공식 철학의 좁은 우물 속에서 갇혀 있다가 갑자기 넓은 세상을 구경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맑스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모순과 중층결정』을 읽을 때의 충격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과연 이 충격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발표한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두 개의 맑스주의가 있었습니다. 한편에는 사르트르, 이뽈리트, 메를로-퐁티가 주도하는 실존주의적․현상학적 맑스주의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프랑스 공산당(P.C.F.)의 맑스주의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의 맑스주의란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이론가들이 내놓은 공산당의 공식적인 맑스주의였고, 그것은 소련의 교과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맑스주의였습니다. 반면 실존주의적․현상학적 맑스주의는 프랑스 공산당 외부에 포진하고 있던 맑스주의였는데, 소련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적인 맑스주의에 반대하여 ‘인간’, ‘인간의 본질’, ‘소외’ 등의 주제에 이끌리고 있었던 일종의 철학적 인간주의, 주관주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이론적 정세였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자 또한 대학에 몸담고 있던 지식인으로서 알튀세르는 우선 맑스주의를 인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적 경향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지요. 알튀세르는 당시의 인간주의적 조류들이 맑스의 과학적 발견, 특히 『자본』에서의 과학적 문제틀의 의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라 보았으며(그래서 책 제목도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는다』였지요), 이러한 인간주의적 조류들에 맞서 스스로를 기꺼이 ‘반(反)인간주의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인간주의적 조류들에 대해 비판했다고 해서 알튀세르가 곧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와 공식적인 맑스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았습니다.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바로 이러한 이중의 전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알튀세르는 한편으로는 청년 맑스를 절대화하는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투쟁과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 식의 맑스 철학의 속류화에 대한 투쟁이라는 이중의 전선 속에서 당시의 이론적 정세에 개입하였습니다.
이 이중 전선 속에서 알튀세르는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합니다. 첫 번째 논점은 맑스의 ‘청년기’ 저작과 ‘장년기’ 저작(대표적으로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대답은 『자본』의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나 『경제학․철학 수고』의 맑스와는 개념과 ‘문제틀(problématique)'에서 완전히 다른 맑스라는 것입니다. 청년 맑스가 아직 독일 관념철학의 관념론적이고 주관론적인 전통 안에 머물러 있던 맑스라면, 『자본』의 맑스는 지금까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과학‘, 즉 역사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창시한 맑스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청년기 맑스를 ’이데올로기적 문제틀‘로, 장년기의 맑스를 ’과학적 문제틀‘로 각각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두 맑스 사이의 ’단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슐라르(G. Bachelard)의 인식론에서부터 ’인식론적 단절(coupure épistémologique)'이란 개념을 빌려옵니다.
두 번째 논점은, 첫 번째 것과 연관된 것으로서, 헤겔과 맑스 사이의 논점입니다. 청년기 맑스의 저작들이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어떤 점에서 그것이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관념론적인지를 헤겔과 맑스의 관계를 통해서 밝히고자 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알튀세르는 헤겔의 모순 개념과 맑스의 모순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의 변증법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구별은 결국 맑스 이론과 철학적 주관론 사이의 구획선을 긋는 것이며, 맑스주의 이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서로 다른 실천들의 구별, 이론적 실천의 특수성의 증명, 관념론적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 사이의 완전한 구별 등의 문제로 진전됩니다.
(1) 인식론적 단절
첫 번째 논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맑스의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840~44 : 청년기 저작
1845 : 단절기 저작
1845~57 : 성숙기 저작
1857~83 : 완숙기 저작
첫 번째 시기는 1840년부터 1844년까지의 ‘청년기’인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작들로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신성 가족』,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등이 있습니다. 1845년에 맑스에게서 ‘단절’이 일어나는데, 그 단절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경과하면서 맑스의 사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1845년 이전 저작들과 이후 저작들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시기는 ‘성숙기’로서, 『공산당 선언』, 『철학의 빈곤』,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자본』 초고 등의 저술들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완숙기’의 맑스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는 1857년 이후의 저작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1845년의 ‘단절’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맑스 저작들을 ‘이데올로기적 문제틀’에 따른 것으로, 그리고 그 이후의 저작들을 ‘과학적 문제틀’에 따른 것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을 직접 겨냥한 것입니다. 즉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곧잘 참조하는 『경제학․철학 수고』나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같은 저작들은 비록 맑스가 쓰긴 했지만 맑스주의의 과학적 저작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저작들은 맑스가 아직 전(前)과학적인 단계, 즉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저작들일 뿐이며, 맑스의 진정한 저작은 1845년 ‘단절’ 이후의 저작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과의 대결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닙니다.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단절’ 개념은 앞서 설명했던 소련의 공식 입장과도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인데, 그 차이를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소련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맑스는 청년 시절에 헤겔 좌파에 속해 있었는데, 1841년에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의 본질』을 출판하자 맑스는 포이에르바하를 통해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포이에르바하의 관조적인 유물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 비변증법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을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과 결합시켜서 비로소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맑스가 변증법과 유물론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소련의 공식적인 철학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맑스가 한 번도 헤겔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1840~42년 당시 『라인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 맑스는 오히려 칸트-피히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를 읽으면서 맑스는 비로소 자유주의자에서 공동체주의자로의 전환을 고민하는 포이에르바하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1843년의 저작들, 즉 『헤겔 국가철학 비판』, 『헤겔 법철학 비판』, 『신성 가족』, 『유태인 문제』 등은 포이에르바하의 헤겔 비판을 되풀이한 것으로서, 그 저작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예를 들어 ‘소외’, ‘유적 존재’, ‘총체적 인간’ 등)뿐 아니라 문제틀 또한 포이에르바하적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포이에르바하적인 윤리학적 문제틀을 인간 역사의 이해에 적용시키는 것, 즉 소외라는 ‘인간 본성’의 이론을 정치학과 인간의 구체적 행위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이 시기의 맑스가 철학적으로는 포이에르바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공동체주의적인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청년기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맑스가 헤겔의 입장에서 변증법을 취하고 포이에르바하의 입장에서 유물론을 취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소련 공식 철학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지요.
두 번째로, 소련의 공식 철학에서는 맑스와 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완성한 뒤에, 그것을 사회와 역사에 적용하여 ‘역사 유물론’을 완성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변증법적 유물론이 역사 유물론에 우선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폅니다. 맑스는 역사 유물론을 기초함으로써 동시에 그의 이전의 이데올로기적인 철학적 의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역사 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맑스가 순수한 철학적 직관을 통해 헤겔을 비판하고,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했다기보다는 역사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에 대해 인식하면서 비로소 “과거 의식의 잔재들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독일 이데올로기』)는 것이지요.
여기서 소련의 공식 철학과 알튀세르 사이의 세 번째 차이점에 주목할 수 있게 됩니다. 소련의 공식 철학에서는 (그 절충성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역사 유물론을 ‘철학’의 한 분야로 위치지우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맑스의 역사 유물론이 과학, 그것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아직 도달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과학’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역사 유물론은 단지 변증법적 유물론의 명제들을 사회와 역사에 적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서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맑스는 단지 이론의 주춧돌만을 세웠을 뿐이라고 알튀세르는 강조합니다. 즉 세상이 새로운 지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가 “단지 사물들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 진리를 반복”한다면 “맑스주의는 역사에 뒤쳐질 수 있고, 자기자신에게 뒤쳐질 수 있다”(Althusser, 1991b : 165)는 것입니다.
(2)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의 변증법
『자본』 2판 서문에서 맑스는 “헤겔에게 있어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 신비적인 외피 안에 있는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려면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한 번 뒤집어야 한다”고 헤겔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전거로 해서, 맑스의 철학은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취하고, 관념론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철학 교과서의 설명방식이 나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위의 인용에서 ‘합리적 핵심’이란 변증법 그 자체를, ‘신비적인 외피’란 사변 철학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맑스의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적인 ‘방법’을 취하고 헤겔의 ‘체계’를 버림으로써 성립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문제를 제기하는 또 하나의 지점입니다. 하나의 철학 사상이 마치 과일의 씨앗처럼 가운데 핵심이 있고 그 주변에 껍질이 둘러싸여 있어서, 껍질만 벗겨내면 그 속에서 씨앗을 고스란히 추출할 수 있는 것일까요? 즉 하나의 철학 사상이 엥겔스의 말처럼 ‘방법’과 ‘체계’로 구분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헤겔로부터 ‘체계’를 버리고 ‘방법’만 가져왔다는 맑스의 말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대부분의 소련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하였다는 신화에 반대합니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헤겔에게서 ‘신비적인 외피’란 맑스의 생각처럼 ‘사변 철학’을 의미하거나, 혹은 엥겔스의 생각처럼 그것의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적인 외피’란 오히려 방법론 그 자체, 즉 변증법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증법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방법론이 정신 세계에 적용되면 헤겔 식의 관념론이 되고, 물질 세계에 적용되면 맑스 식의 유물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변증법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즉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의 변증법의 특수한 구조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하나의 중심을 상정하는 변증법입니다. 즉 절대정신이 있고, 역사적 세계의 구체적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예를 들어 경제적․사회적․정치적․법적 제도들로부터 관습, 윤리, 예술, 종교, 철학, 전쟁, 전투, 패배 등의 역사적 사건들에 이르는 모든 요소들은 이러한 절대정신이 외화된 결과로서 하나의 내적 통일서으이 원리로 환원됩니다. 말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중심이 하나밖에 없는 총체성, 즉 동심원 구조의 단순한 모순 개념이 그려지는 것이지요.
반면 맑스의 변증법에서는 헤겔처럼 동심원 구조의 단순한 모순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과 같은 구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대란 더 이상 헤겔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절대적 중심이 아니며, 또한 상부구조가 토대라는 하나의 단순한 내적 통일성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상부구조는 결코 하나의 내적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들로서, 제각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 여러 개의 심급들입니다. 따라서 맑스의 모순 개념은 헤겔과 달리 절대적인 중심을 상정하지 않는 모순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알튀세르의 저 유명한 ‘중층결정(surdétermination)' 개념이 나옵니다. 헤겔에게서 결정은 단순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맑스에게서 결정은 헤겔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순은 그것이 핵심으로서 심급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결정을 하지만 또한 하나의 동일한 움직임 속에서 결정되고, 모순이 활성화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층위들과 심급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두 개의 사회, 즉 국가와 시민사회가 존재합니다. 이때 시민사회의 본질은 국가에 있게 되지요. 왜냐하면 헤겔에게 시민사회란 경제, 즉 물질적 삶을 가리키는 것이고 국가란 정신적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의 ‘정신현상학 체계’에서는 물질적 삶의 본질이 정신적 삶에 있으므로 당연히 경제적인 시민사회의 본질이 정신적인 국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모델은 헤겔의 국가와 시민사회 도식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한 것이 아닙니다. 즉 상부구조의 본질이 토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맑스에게는 ‘본질’이라는 관념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주장은, 맑스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는 완전히 다른 변증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을 단순히 ‘전복’하는 것, 즉 헤겔의 국가와 시민사회 도식을 유물론적으로 전복하여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본질이 물질(경제)에 있다고 보는 것은 경제주의 혹은 기술주의에 불과한 것으로서, 헤겔과 동일한 문제틀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는 헤겔을 전복하여 경제주의를 세운 것이 아니라 문제틀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알튀세르는 이렇게 헤겔 변증법과 맑스 변증법의 차이를 드러내보임으로써 맑스의 변증법이 주체와 대상의 이원론적 범주에 기초한 근대의 철학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주체가 대상을 전유하는 ‘재현’으로서의 지식 이론을 거부하고 새롭게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라는 철학의 정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역사과정을 단일한 하나의 내적 원리로 환원시키는 역사주의에 대해서도 명확한 분리의 선을 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튀세르의 반(反)역사주의, 즉 “역사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사실은 이러한 반(反)헤겔적 입장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5. 극한에서 철학하기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발표한 이후 알튀세르는 초기의 입장을 끊임없이 정정해 나갑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있었던 이른바 ‘자기 비판’, 70년대 말의 ‘맑스주의의 위기’의 선언, 그리고 80년대의 ‘우발성의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는 단 한 차례도 자신의 과거 주장 속에 안주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알튀세르의 입장들이 서로 모순적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발본적인 부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변화가 사실은 맑스주의의 진정한 강점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의 이론적 변화는 결국 맑스주의가 도그마가 아니라는 것을, 맑스주의 이론이 폐쇄적이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아가 알튀세르의 모순과 한계는 사실상 맑스주의의 모순과 한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즉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스스로 극한에 서서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철학, 과학,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정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발표한 이후에 알튀세르는 자신의 입장이 ‘이론주의적 편향’이었다고 ‘자기 비판’합니다. 『맑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는 철학을 ‘이론적 실천의 이론’, 즉 ‘이론의 이론’ 혹은 ‘과학의 과학’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이는 곧 맑스주의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이 맑스주의 과학(역사 유물론)의 유효성을 보장해주는 인식론적 준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 정의는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역사 유물론의 우위성이라는 알튀세르 자신의 초기 입장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역사 유물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장 내지는 적용으로 바라보는 스탈린 식의 소련 철학의 입장과 친화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철학을 ‘이론의 이론’으로 정의한 초기 입장을 철회하고, 대신 철학이란 ‘이론과 비(非)이론 사이의 관계를 지정해주는 실천’이라고 새롭게 정의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철학자는 정치가이며 또한 모든 정치가는 철학자인데, 이때 철학자의 정치란 철학자들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구성하고 강화하고 방어하거나 혹은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철학이란 순수하게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한 영역으로 존재하게 되므로, 결국은 ‘최종 심급에서 이론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철학은 이제 과학을 인식론적으로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이론에서 계급적 입장’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요.
철학의 정의를 정정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초기의 ‘인식론적 단절’ 개념도 새롭게 정정할 수 있데 됩니다. 『맑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오류와 진리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더 이상 순수하게 이론적인 문제도 아니고, 또한 철학에 의해 그 진리성을 보증받을 수도 없는 것이므로, ‘이데올로기=오류/과학=진리’라는 대당은 이제 지탱될 수 없는 것이지요.
60년대의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역사 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전제 없는 결론”(스피노자)이었습니다. 즉 당연한 것이었지요. 예를 들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는 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라는 레닌의 명제를 자주 인용하면서 역사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70년대에 이르러 알튀세르는 더 이상 ‘역사 유물론 =과학’의 등식을 “전제 없는 결론”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레닌의 명제가 오히려 파멸적이라고 경고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의 역사 유물론이 ‘새로운 과학’인 이유는 단지 그것이 새로운 대상을 개척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과학관에서 견지하고 있던 ‘과학적 발견의 조건’을 완전히 변경시켰다는 점 때문이며, 또한 과학적 지식을 보편적인 합리적 지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 그 자체가 계급투쟁의 무기라는 점에서 분파적이고 갈등적인 지식임을 분명히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맑스의 이론은 세계에 관한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는 순수한 과학이 아니라는 것, 현실의 구체적인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계급의 입장―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과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맑스가 역사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정초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철학적 직관의 결과나 이론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먼저 ‘쁘띠부르주아적 입장’에서 ‘공산주의적(프롤레타리아적) 입장’으로의 정치적 입장의 단절이 있었고, 이러한 정치적 입장의 변화에 조응하는 이론적 단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론이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계급의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이론이 언제나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대중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존재할 때에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고 현실의 노동 운동과 결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중의 물질적․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조응해야 하기 때문이며, 만일 이론이 현실의 노동 운동과 결합할 수 없다면 그러한 이론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알튀세르가 초기에 사용했던 이데올로기 개념의 변화가 불가피해집니다. 이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오류나 전(前)과학적 지식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각 개인들이 현실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상상적으로 표현해주는 사회적․물질적 힘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대중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와 실천과 투쟁을 바라보고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진리의 대립물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장소’가 된다고 알튀세르는 보았습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는 계몽주의자들처럼 진리를 설파하고 이념을 전파하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사고는 언제는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당’이라는 관념을 낳게 되고, 결국은 대중에 대한 당의 지배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카우츠키와 레닌의 유명한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명제, 즉 노동계급의 의식성은 노동계급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결국 당과 대중의 분리만을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하나의 이론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속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부에서 실천적 이데올로기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이러한 관념들과 결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어떠한 혁명도 당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백만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대중 운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구분하고 후자를 전자의 적용으로 바라보는 소련의 공식 철학과 알튀세르 사이의 정치적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2) ‘맑스주의의 위기’와 철학의 전화
그러나 알튀세르가 1977년에 갑자기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가!」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입장 변화에 견준다면 철학, 과학, 이데올로기 개념의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차라리 사소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가!」, 「오늘의 맑스주의」, 「철학의 전화」, 「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 등 7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일련의 글을 통해 알튀세르는 이제 맑스주의의 난점과 공백과 모순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알튀세르의 주장들은 『맑스를 위하여』나 『자본론을 읽는다』에서의 주장들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입증하려 시도했었다면, 이제 알튀세르는 서슴없이 맑스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폐기됩니다. 『맑스를 위하여』에서 ‘단절기’ 저작으로 꼽았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는 철학사 전체에 대한 맑스의 오해를 보여주는 정점으로 평가 절하됩니다. ‘성숙기’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았던 『공산당 선언』은 온통 헤겔적인 모순과 부정의 원리에 따라 쓰여진 역사철학적 저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과학’으로서의 역사 유물론의 최대 걸작으로 꼽혔던 『자본』에서조차 헤겔 변증법으로의 끊임없는 회귀가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맑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고 확신에 차서 주장했던 「모순과 중층결정」과 달리, 알튀세르는 이제 맑스에겐 변증법에 관한 이론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는 맑스가 “변증법에 관한 20여 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글”을 쓰려 했지만 끝내 쓰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자신의 변증법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데서 겪었던 난점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보았듯이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후기 저작들, 즉 『반듀링론』이나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그리고 『자연 변증법』 등의 저작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된 것입니다. 소련의 공식 철학에서는 이를 ‘이론적 분업’으로 설명한다고 했었지요. 그러나 알튀세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바라봅니다.
엥겔스가 확신에 차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철학 책을 썼던 것과 달리, 맑스가 겨우 20여 페이지짜리 글조차 쓸 수 없었던 것은, 철학에서 체계를 세우는 것의 효과에 대해 맑스가 두려워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엥겔스가 『반듀링론』을 쓰고 맑스가 이를 승인했던 것은 두 사람의 ‘정치적’ 조건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즉 듀링으로 인해 자신들이 다져놓았던 철학이 훼손당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막 새로이 태동한 독일의 맑스주의 정당을 사수하기 위해 그들은 불가피한 선택을 한 셈이지요. 따라서 엥겔스는 자신들의 철학을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하나의 저작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맑스와 엥겔스는 정치를 고려해야 하는 혁명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의 원리를 수립하는 것이고, 이제 세상은 이 철학적 원리에 적응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철학에서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철학을 과학보다 우위에 놓고(소련의 공식 철학을 상기해보십시오!), 철학이 세상의 ‘진리’를 담지하므로 단지 문제는 철학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낳게 하며(소련의 과학이 얼마나 편협하고 피폐한 것이었는지를 상기해보십시오!), 결국 정치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편에 가담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소련에서 맑스주의가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화한 역사를 상기해보십시오!). 물론 맑스에게도 이러한 ‘체계화’의 유혹이 언제나 뒤따라다녔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20페이지짜리 짤막한 글을 쓸 수 없었던 데에는 바로 이러한 효과에 대해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이란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맑스주의 철학이 하나의 철학으로 생산되자마자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맑스주의 철학은 하나의 철학으로서 생산되어서는 안되며 과학 속에서, 정치 속에서, 문화 속에서 ‘계급적 입장’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맑스주의 철학은 ‘비(非)철학’이라는 것입니다.
(3) 본질의 유물론과 우발성의 유물론
그렇다면 이제 맑스주의 철학에서 무엇이 남을까요? 맑스주의 철학이 아직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70년대 후반에 알튀세르의 저작들을 읽으면 당연히 이러한 의문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80년대에 발표한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테제입니다.
알튀세르는 80년대에 썼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나 「맑스주의적 사고에 대하여」 등과 같은 미발표 초고들 속에서 철학사 속에 거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하나의 유물론적 전통이 실존한다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는 에피쿠르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맑스, 하이데거, 데리다 등에서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이 유물론적 전통을 ‘우발성의 유물론’ 혹은 ‘마주침의 유물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어떠한 기원이나 목적, 법칙과 본질에도 얽매이지 않는 유물론입니다.
“즉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철학이 하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철학 없는 철학, 개념도 모순도 없는 철학이라는 것, 이 철학은 긍정적인 사실들의 필연성의 수준에서 작용하지 부정적인 것의 수준이나 개념의 원리들의 수준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모순과 역사의 목적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부정성 및 거대한 발전과 마찬가지로 혁명조차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실천적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달리 사고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Althusser, 1996 : 117~18).
우발성의 유물론은 알튀세르가 보기에 합리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모든 유물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합리주의적 전통의 유물론은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이자 본질의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관념론의 변형되고 위장된 형태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 존재했으나, 결국에는 본질의 유물론에 의해 억압되어왔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나 맑스가 쓴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노동일’에 관한 부분들에서는 어떤 철학적 개념이나 법칙에도 얽매이지 않고서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공산당 선언』이나 『자본』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오로지 독일 관념철학의 내용들, 즉 부정의 변증법과 헤겔적인 역사철학의 틀 속에서 구체적인 분석을 해소시켜버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알튀세르는 맑스와 엥겔스에게 공존하고 있는 이 두 개의 유물론을 구분하면서 결국 우리가 맑스주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문제를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물질이 우선이냐, 의식이 우선이냐 하는 이른바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을 묻는 관념론적 질문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 또한 헛된 것입니다. 세계의 작동방식을 몇 개의 법칙과 테제로 정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관념론적이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미 생산된 마주침들의 구조적 효과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요소들 사이의 우발적인 만남들이며, 어떤 선험적 원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구체적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구체적인 개입의 지점들을 밝히고 실천하는 지난하고 끝없는 과정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만이 오늘날 맑스주의의 생명력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알튀세르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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