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8운동의 철학과 보건의료운동
68운동은 현대사에 있어 독특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운동이라 할 것이다. 68운동은 운동의 규모와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주체세력들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혁명의 폭발이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번진 것처럼, 혁명 직후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급속한 쇠잔(衰殘)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68운동은 그 자체로 말하자면 실패한 혁명임에도 불구하고 68운동은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기존의 사회구조 속에서 관심사로 등장하지 못했던 여성운동, 인종운동, 동성애운동 등을 폭발적으로 촉발시켰으며 일상생활과 세계관에 있어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다.
우리 나라의 사회운동이 68운동의 영향을 집적적으로 수용하게되는 것은 짧지 않은 시간의 격차가 있었다. 사회운동에서 68운동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라 하겠다. 특히 우리에게 68운동의 영향은 68이후 등장한 철학들, 포스트주의라 불릴 만한 각종 철학사조를 통해 걸러진 형태로 받아 들여졌다. 물론 68운동을 이런 틀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이유나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흡수한 현실적인 68운동의 영향이 여기에 집중하여 있기에 이번 강좌는 이런 시각의 68운동을 중심으로 68이 보건의료(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보건의료(운동)의 발전을 위해 68운동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를 주로 다루려 한다.
2. 68혁명의 개괄
68혁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아닌 운동이라 할 것이다. 68년을 전후한 서구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였다. 물론 이것이 세계적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아프리카는 이제 막 제국주의적 침략에서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기 시작했고, 베트남에서는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간의 첨예하고 처절한 적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구라파와 미국 등의 선진국들을 본다면, 달러에 의한 세계체제 즉 팍스 아메리카나의 붕괴징후가 읽혀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호황이 계속되었던 오히려 호황의 정점에 있던 시기이다. 계속되는 호황으로 자본의 축적은 원활했고, 실업률은 최저의 수준 이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노동조합)들의 단결력도 어느 때보다 높았으나 역으로 이런 토대가 오히려 노동자와 자본가 및 국가간의 협약에 입각한 포드주의적 축적체계를 공고히 했고, 소비에 있어서도 보편주의적 복지국가의 강화로 사회적 갈등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68혁명은 “때아닌” 운동이었던 것이다.
68운동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뿐만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동구권, 미국, 멕시코와 중국, 일본을 관통하는 세계적 운동이다. (그러나 이를 모두 다루는 것은 하나의 강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이므로) 여기서는 프랑스의 예를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3월 22일 다니엘 콩방디를 비롯한 8명의 학생이 낭테르 대학 학부장의 집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는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하여 American Express Bank를 습격하다 체포된 3명의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2천명 정도의 소수파 집단이 조직한 이것이 이후 전세계를 뒤흔든 운동의 시초였다. 점거 6일만에 경찰에 의해 캠퍼스는 봉쇄되었고 낭테르 대학 폐쇄에 반발한 학생들은 5월 3일 소르본에서 시위를 계속한다. 드디어 10일에는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다 경찰과 유혈충돌이 일어난다. 11일 경찰은 철수하고 체포된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교육부로부터 자율성을 선언하고 대학들을 접수한다.
한편 2주정도 늦게 13일 총파업에 돌입한로 노동자들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공장을 점거한다. 연속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해 천만명의 노동자가 파업하는 등 사회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른다. 27일 퐁피두 수상은 최저임금 35%인상, 노동시간 단축, 더 많은 노동조합의 권리 등을 담은 '그르넬 협약'을 노동조합과 맺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한다. 혁명은 이제 임박한 듯 했다. 그러나 29일 드골이 파리를 떠난 후 그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자 드골 지지 시위가 잇달았다. 6월 5일 시위는 막을 내리고 드골 정권은 6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에서의 68혁명은 진압된 것이다.
그러나 68운동은 프랑스의 것만이 아니었다. 68운동은 70년대 초반까지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를 뒤흔들었고, 학생들의 대학 점거와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줄을 이었다.
유럽
독일: 68년 4월 학생운동가 두치게의 암살 미수로 30만이 시위, 이후 독일 보수언론<스프링거 프레스>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학을 점거하고 수십만이 파업을 하였다.
이태리: 67년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이 68년 거의 모든 대학을 점거하여 자주관리체가 채택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68년 두브체크의 등장이후 학생과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휴머니즘’과 ‘자주관리’를 주장하자 8월 소비에트의 체코침략으로 프라하에서만 20만 이상이 사망하였다.
북미
미국: 70년 닉슨의 캄보디아 침공과 함께 발생한 반전시위에 400만과 35만의 교수진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대학 점거가 있었으며 5월 군인의 무력진압으로 6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멕시코: 68년 여름부터 시작된 학생시위가 수십만에 육박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자 10월 “비탄의 밤”에는 군인과 경찰의 무력진압에 의해 400여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아시아
일본: 68년 동경대 의학부에서 시작된 대학 점거 투쟁이 다음해 1월 수천 명의 경찰에 저항한 무력투쟁으로 막을 내렸다.
중국: 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모택동의 지지를 받으며 관료와 지배층에 대한 계급투쟁을 중국의 지배구조를 혼란에 빠트렸다.
작게 보았을 때 68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68은 정권을 실각시키지도, 권력을 획득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크게 보았을 때 68혁명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는, 사회나 정치에서 전복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68 당시 이것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못하였다. 68운동의 극단적인 행동파 일부는 테러조직으로 변모해갔다. 독일과 일본의 적군파, 붉은 여단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70년대에 활발한 활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90년대 이후 해체를 공식화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68세대는 80년대부터 녹색당 등의 건설로 직접적인 의회정치에 참가하여 정치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68세대의 지도이론이라면 비판이론이나, 마르쿠제, 루카치 등이었고, 더 나아간다면 체 게바라나 모택동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로는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등의 68의 슬로건들을 제대로 해석하기가 힘들다. 또한 68운동의 세대가 서서히 영향력을 드러내어 90년대 서구 정치지형에서 현실적 역량이 되었지만, 이를 통해 등장하는 변화의 방향 역시 당시의 이론들과는 다른 문제들을 제기한다.
68운동이 제기하는 새로움은 일상성(미시성), 자율성, 신체성, 다양성에 있다. 무엇보다 68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거시적 권력의 문제와는 다른 미시적 권력의 문제, 일상생활에 파고든 미시적 권력을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68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체계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가부장제를 통한 억압, 일상화된 성차별의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특히 푸코의 경우 전략으로서의 지식-권력이 어떻게 일상에서 주체를 훈육하는가의 문제를 의학의 영역에서 세밀히 관찰하였다.
68운동은 거시적 권력의 주체를 다른 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68운동은 운동의 과정에서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보다는 자발적 참여와 대중적 토론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대학과 공장의 검거는 자주관리로 이어졌고, 막바지 공산당의 퇴각 요청도 대중들은 거부했었다.
또한 68운동은 이성의 억압에서부터 신체의 해방, 욕망의 분출을 요구했다. 성적 욕구를 왜곡하였던, 과거의 좌파와 우파 모두가 신성시하던 이성의 도덕성에 대항하여 68운동은 성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혁명의 문제로 전화하였다. 여성의 억압과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은 이제 혁명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성의 가벼움이 자유를 구가했다.
68운동은 획일화시키는 동일성의 구도에 대항하여 다양성, 차이의 인정을 요구하였다. 지배가 옳고 그름을 통해 배제를 생산해 내었다면, 68운동은 다름을 통해 상호의 인정과 연대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68운동은 다양한 소수자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68운동의 성격은 이렇게만 규정할 수는 없다. 68운동은 무엇보다 반전을 외치는 국제적 연대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보건의료(운동)의 변모를 중심으로 다루기에 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생략하려 한다.
3. 68운동에 의한 보건의료의 변모
보건의료에 있어 68의 영향은 무엇보다 권력의 미시적 전략, 지식으로서의 권력이 창출하는 억압의 문제를 환자-의사의 관계가 가지는 전문주의에 대한 극복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환자-의사의 모델을 미시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의사는 전문주의적 도덕성과 지식 및 기술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고, 환자는 “환자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일탈(질병)을 치유한다는 기능주의적 모텔이다. 환자-의사의 기능주의적 모텔은 의사의 전문주의를 너무 피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질병을 환자의 외부의 것, 즉 생의학적 질병관을 전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안정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68운동 이후의 철학을 대표한다 할 푸코가 지적하는 것은 환자-의사 모텔이 지니고 있는 권력의 측면, 지식으로서의 권력이 일상생활마저도 통제하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일상적 주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권력은 군주에 귀속되는 주권적인 것이 아니라 전 인구의 몸에 지식의 형태로 귀속되는 감시적 권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그런 감시적 권력이 판옵티곤(panopticon)이라는 원형감옥의 모델과 시선의 문제로서 의학을 통해 설명한다.
의학의 전문주의가 가지는 권력은 노골적이며 이념적인 억압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의사는 환자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책임을 지고, 결정하게 한다. 그러나 의학적 담론은 개인의 몸에 대한 의학적 검사와 분석의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전문지식을 통해 개인을 객체화시켰다. 또한 의학 담론이 가지는 양자간의 불균등한 구조와 잠재력 등은 환자의 표면적 결정력 속에서 의학의 지식-권력이 환자를 훈육시킴으로써 의사-주체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푸코의 시각은 미시적으로 분산된 전략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다. 그렇지만 후기 푸코는 지식-권력의 자기 구성적인 면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이제 담론이 권력의 감시적인 것에서부터 벗어나 자기의 배려, 자신의 삶을 양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푸코의 자기의 배려,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고무된 부분이 자가치료와 대체의학이다. 물론 대체의학이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 의학의 권위들에 대한 반발이 68운동이후 70-80년대를 거치며 대체의학의 활성화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체의학은 기존 의학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 제기하는데, 하나는 생의학적 모델이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과 치료에 있어 환자가 건강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다룰 수 있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의학은 방법적으로 질병과 고통을 개인의 신체와 자연의 치유능력에 맞추어 복원시켜는 것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체의 면역기능과 회복능력을 증강시켜주는 여러 가지 자연적인 접근방식을 동원하게 되며, 환자를 전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보고 그 신체적인 병변에 집중하지 만은 않고 정신적, 사회적, 환경적인 부분까지 포괄하여 고려한다. 건강의 질병과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인 것이다.
대체의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괘 높다. 세계의료형태의 30~40%만이 서양정통의학을 따르고 나머지는 보완의학 또는 대체의학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 나라의 경우도 3명 중 1명이 대체의료를 찾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최근 대체의학 이용률은 25%에서 50%로 조사되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체의학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서구의 공식적 의료집단에서도 보완의학으로서의 대체의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는 훨씬 적은 의료비 지출로 효과적인 질병퇴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의학이 지식-권력이란 전문주의가 가지는 미시적 권력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대체의학의 주류가 자연 치유 능력에 기초하여 성립함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자가치료가 형식적이며 내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자면 대체의학집단이 규모와 경제적 역량이 늘어날수록 대체의학은 자가치료로서 기능하기 보다는 또 다른 전문주의로 기울러져 간다. 대체의학집단은 자신들의 전문적 분야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대 사회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확보하려 노력하게된다. 또한 치료의 자가치료 및 건강의 유지를 위해서 이제 점점 복잡해지는 진단체계 및 치료이론들이 개발된다. 아직 이들의 체계가 비의적(秘儀的) 형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결구에 가서는 또 다른 지식-권력으로서 미시적 권력으로 귀결된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대체의학이 가지는 상업적 성격을 고려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전문주의에 대항하는 또 다른 기획은 예방 및 일차의료를 강화하고 공중보건의 확대하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영국 NHS의 보건의료정책 변화방향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반의에 대한 보상체계가 보강되면서 보건의료자원이 일차의료 특히 예방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지역보건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주민의 참여를 높이는 건강 증진 클리닉을 활성화하고 환자들의 검진과 검사를 장려하였다. 예방 업무 중심의 일반의의 역할이 중시된 것은 종합병원의 생의학적 모델과는 대별되는 환자의 생의 주기를 고려한 전일적 의료라는 대안적 사고가 설득력을 얻게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중보건의사를 활성화하여 지역의 공중보건 실태와 건강 상태를 감시, 평가하는 제도를 두는 공중보건의학이 재등장한다. 이를 신 공중보건이라 하는데, 그 개념으로는 환경의 개선뿐만 아니라 생의 주기에 따른 개인의 예방조치나, 치료적 개입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제 건강의 문제가 생의학적 관점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삶의 문제로 초점을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은 예산이 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건강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비롯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문주의의 극복하며, 건강을 증진시키는 옳은 방향으로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전문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는가는 적어도 푸코적 시각에서는 의문이 된다. 왜냐하면 이는 치료중심적 생의학적 전문지식에 입각한 환자-의사와의 관계의 권위적 모델을 부식시킬 수는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단지 보다 확대된 지식-권력의 전략일 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방을 강화하고 검사를 확대함으로써 보건의료는 인구에 대한 감시체제에 한 걸음 확대하고 고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개인이 보건의료정책에 참가함으로써 스스로의 건강을 감시하게되어서는 감시적 권력은 규율적 권력으로서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68운동이 의료에서 담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힘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분야는 정신의학분야였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가타리라는 ‘기계’의 ‘역능’에 기인한다 하겠다. 가타리에게 있어 정신의학의 목적은 라깡처럼 미국의 실용적인 정상적 또는 일반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양자의 목적이 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라캉의 경우 정신분석은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 인간 정신-무의식-의 이해가 주목적이었던 것에 반해 가타리의 그것은 라깡의 그것과 다르게 무의식의 이해-질서화-가 아니라 욕망의 해방이었다. 68운동이 제기한 신체성은 여기서 만개(滿開)한다. 동일성의 철학에 근거한 이성의 억압, 영토화에 대항하여 기관 없는 신체, 욕망의 생산이 실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가타리적인 기계들은 어떻게 실천하였나? 먼저 당시 프랑스 정신의학계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정산의학은 정신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감금 중심의 치료에서 지역에서의 환자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미시적 감시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물론 가타리 역시 이의 진보적 내용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 변화가 피상적이며 오히려 욕망의 억압을 보다 확산하며 공고히 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진정으로 혁명적 실천으로서의 정신의학은 반정신분석의(= 에 기반하여) 환자의 분열증을 조장하여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1965년 런던의 킹슬리 홀에서 5년간의 반정신의학적 실천 프로그램이 있었다. 반정신의학자와 정신분열증 병력의 환자가 같이 광기의 세계를 집단적으로 탐구하려 했기에 그들은 환자, 정신과 의사, 간호사사이의 모든 분업을 철폐하고자 했다. 그들의 문제는 정신병원의 광기가 아니라, 그들과 우리가 같이 가지고 안에 있는 광기의 해방이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사회주의 환자 집단(SPK)이 정신의학자들이 함께 정신의학이 지닌 억압적 기능을 폭로했다. 여기서 모든 것은 환자들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루어 졌다. 광기는 의상에 의해 규정되고 제어되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차이를 가로지르는, 억압의 원인을 즐김으로써 해소하는, 새로운 실천이 된다.
가타리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망상조직이었다. 망상조직은 치료자와 피치료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참여하는 모임의 장으로서 정신의학의 민중적 대안이란 전망을 목표로 했다. 망상조직은 광기를 단순한 사회적 소외현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과거의 정치가 무시해온 일련의 문제에 광기가 소수자들을 의식화하도록 정치를 열어 젖히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또한 망상조직은 방법으로서 “정신의학의 혁명“때 환자와 간호사에 향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에게 출발하도록 한다는 태도를 요구했다. 즉 정신치료, 보호, 활성화는 필요하지만 자주 관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전문가는 기술보조자로서의 역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현실적으로 현 정신의학에 어떤 의미 있는 세력들로 존재하는 지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지평을 초과하는 일이다. 단지 몇몇 정신과 전문의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들은 바로는 적어도 우리 나라 정신과 영역에서 가타리의 이름은 적어도 임상적 실천에서는 운위되지 않고 있다. 가타리의 평가 역시 반정신의학이 성과면에서 보자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본다. 킹슬리 홀이 낡은 세계로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여전히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내재화했기 때문인 것처럼 실패는 아마도 내재적인 이유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나, 사드-마조키즘등은 이제 더 이상 일탈적인 것도 치료의 대상도 아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욕망도 무시되어야할 반(反)이성이 나이라 인권으로서 존중되어야할 것으로 보게되었다. 더 나아가 가타리의 영향은 정신의학이라는 보건의료영역에서보다는 사회적 실천에서 많이 운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8이 보건의료에 미친 영향력의 마지막으로 여성과 장애인의 경우를 보자. 여성과 장애인의 문제는 다양성과 차이의 인정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뤼스 이리가레이에 의하면 이제가지 여성이란 다른 성으로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비(非)남성으로만 존재해 왔다. 남녀의 차이가 단순히 남성성을 규정해 놓고 그 반대편의 여성성을 포용하는 식의 차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 여성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성이라는 구성된 주체의 배제를 통해서,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남성적 담론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의 새로운 이미지와 모델을 창조하는 문제이다.
남성중심주의적 의학의 관점에서 여성의 몸은 본능적 기능, 그칠 줄 모르는 욕정이나 식욕의 알 수 없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러므로 여성의 몸에 체화되어 있는 욕정과 식욕, 생리와 폐경, 그리고 심지어 임신과 출산마저도 이성에 의해 억제되고 통제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여성을 남성(정상)과 다른 것(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을 벗어나 여성을 여성으로 존재하게 하는 실천은 여성의 몸을 의학의 관리의 대상으로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임신을 포함한 피임과 낙태에 있어 여성의 권리가 존중되어졌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제 출산은 병원에서 의사에게 관리되는 질병이 아니라 가정이나 또 다른 공간에서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삶의 과정이란 측면이 강조된다. 생리나 폐경 역시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성 자신의 경험과 정서의 관점에서 보게된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여성의 몸은 남성중심주의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틀 여성적 사유 방식을 발견하는 장소, 남성중심주의적 의학의 시선에 대항하고 그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으로 될 수도 있다. 예로서 식욕감퇴증도 일종의 저항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즉 현대 여성들은 스스로 식욕을 거부함으로써 그리하여 육체적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강한 자기 통제력을 한껏 과시함으로써 날씬함을 요구하는 현대문화에 강력 대응한다. 식욕감퇴증 환자는 전통적 여성적 가치를 극단으로 몰고 가지만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삼아 훈련시킴으로써 가운데 그 여성적 가치를 해체하고 남성적 문화영역(자기 통제력)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시각과 함께 보건의료에 있어 차이와 다양성을 보다 급진화시키는 것을 장애인 문제를 보는 시각 중의 일부에서 볼 수 잇다. 장애인 문제를 보는 시각 중 급진적인 것 중의 하나는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은 단지 의학이라는 담론이 만들어낸 권력의 효과일 뿐이란 것이다. 급진적 시각에서 볼 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건의료라는 담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 즉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되며 비정상을 정상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치료와 교정 받아야 될 대상으로 보는 구조는 장애인의 자율적인 생활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대안적 보건의료에서 재활이란 장애를 차이로서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장애인들의 삶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장애인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장애 자체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로 바라볼 수 없지만, 건강의 문제로도 조차 바라볼 수 없을 것인가? 장애를 가지고 같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장애를 극복하는 것도 좋지만, 그럼에도 장애를 벗어 던지는 것의 의미는 축소될 수 없지 않을까?
4. 보건의료에서의 68의 영향 평가
68운동이 보건의료에 있어 미친 긍정적 영향이라면 전문주의의 극복, 건강과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의 확장일 것이다.
68의 영향을 통해 건강의 문제는 건강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누가 건강을 말하는가의 물음으로 바뀌면서 의학이라는 담론이 개체를 어떻게 객체화하는 것과 관련되게 되었다. 전문지식에 입각한 지식으로서의 권력은 개인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것에서 벗어나 환자 스스로 자율성을 가지며 자신의 건강의 주체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연결되어 건강을 어떻게 볼 것인가란 문제의 시각의 폭이 넓어졌다. 페미니즘의 등장은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기존 의학의 담론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가를 드러내었고, 여성의 시각에서 건강을 문제를 구체화하였다. 또한 반정신의학의 경우는 이성 중심의 동일성의 구조에서 벗어난 욕망의 분출 즉 광기가 인간의 해방과 사회적 변혁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68이 미친 부정적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차이의 존중이 지나치게 확대되어진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경향과, 반(反)이성주의와 결합한 자율성에서 비롯된다.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시각의 하나를 보자면 건강과 질병은 어떤 객관적 대상과 관계되는 것이 아닌 단지 의학의 담론이 만들어낸 구성물일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의 효과가 곧 권력이 되어 우리의 일상적 삶을 감시하고 스스로 통제하게 하는 것이다. 극단적 상대주의의 다른 한 시각은 남성과 여성이 차이의 관계이듯 건강과 질병조차 차이일 뿐 건강의 동일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이는 존중되어야 하고 건강의 의학적 견해는 독단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런 극단적 상대주의의 입장은 전문주의의 극복이 아니라 전문가 및 전문지식의 부정으로 몰아간다.
반(反)이성주의와 결합한 자율성은 또 다른 위기로 몰아간다. 이성의 통제와 대립하는 생산으로서의 욕망은 주체의 자율성이기보다는 욕망의 분출일 뿐이다. 욕망의 사회적 성격을 문제로 삼지만, 반(反)이성주의적 욕망이 동물적 욕망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 명확하지 않다. 반(反)이성주의와 결합한 자율성이 해방의 내용이 아니라 야만으로 추락할 잠재적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최근 들뢰즈-가타리의 파시즘적 성격의 논란은 이점에서 시사되는 바라 하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68운동의 영향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여선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단적인 예로 68운동이 사유양식의 변화가 미친 보건의료의 변화가 실질적으로 68과 관계없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의료의 기술적 발달이 가져온(올) 보건의료의 변화를 능가할 만한 것이냐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된 복제인간의 문제를 보자. 복제인간과 복제기술이 몰고 올 변화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기존 보건의료의 관념과 제도는 물론 생명체와 무생물체와의 경계마저 흩뜨려 놓을 것이다. 기계와 신체와의 결합 역시 보건의료 더 나아가 건강의 개념마저 흩트려 놓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상황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다.
5. 대안
68운동이 보건의료(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68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 보다는 68운동이 제기한 문제, 즉 68운동을 보는 시각에 의해 매개되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68운동 이후의 새로운 관점을 주도하게된 철학의 성격이 보건의료(운동)에서의 68운동의 영향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사항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전문주의, 대체의학, 반정신의학, 여성과 장애인 등의 문제가 일련의 탈(脫)근대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68운동의 긍정적 성과가 이에 비롯되었음도 사실이나 역으로 부정적 한계 역시 이에 기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68운동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보건의료운동의 전망에 맞게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68운동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바디우를 살펴 볼 것을 제안한다. 바디우는 아직 우리에게 충분히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몇 권의 역서와 소개를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그의 문제의식을 접할 수 있다. 탈(脫)근대의 저자들이 이전의 철학사를 플라톤주의의 변주로 보고, 탈(脫)근대로 플라톤을 극복하려하는 데에 반하여 바디우는 플라톤주의자임을 자처하며 플라톤주의의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디우가 탈(脫)근대의 여러 성과들, 즉 다양성과 창조성, 그리고 자율성들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사건의 철학을 통해 이들을 담아내면서도, 주체나 실체와도 같은 플라톤주의적 개념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탈(脫)근대가 가지는 지나친 상대주의 위험성 내지 단조로움, 연대의 파괴와 파시즘화의 개연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바디우적 시각에서 보자면 건강은 분명 항상 똑같은 불변의 어떤 상태나 실체일 수는 없다. 건강은 어떤 사회적 토대에 그리고 어떤 인식론적 지평 속에 있느냐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항상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이란 기존의 건강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것으로 이것은 단지 새로운 시각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사건은 건강을 다르게 만든다. 마치 뇌사나 복제인간이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바디우를 통해 우리는 건강이 질병과 구분되지 않기에 건강이나 질병이 보기 나름이란 상대주의 시각을 극복할 수 있게된다.
우리는 건강을 고정적인 본질로서가 아니면서 동시에 질병과 건강을 구분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관념주의적인 아닌, 그러나 갱신되는 실체로서 개념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건강은 의학에 의해 학문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변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건의료의 과제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의 진리를 계속 갱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건강을 불변의 본질적인 것은 아니나 실체적인 것으로 볼 때, 우리는 건강에 대한 전문적 지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입각한 전문직의 지위를 재설정할 수 있게 된다. 건강이란 진리의 생산자로서 보건의료인은 지속적으로 건강을 사건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의료의 기술적 측면의 개발뿐만 아니라 건강의 사회적 책임, 환경적 문제, 일상생활의 문제 등을 밝혀내고 개혁해야하는 것이다. 또한 건강 그러할 때 우리는 의료의 전문주의의 문제를 극단적 상대주의라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의 과제로 다시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보건의료운동은 건강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형성을 촉발하는 것을 포괄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현 우리 나라의 보건의료에 있어 새로운 흐름들이 제기한 건강의 문제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의료소비자운동의 등장이다. 의료소비자운동은 건강의 문제에 있어 환자의 주체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환자의 주체적 참여야말로 건강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 운동은 의료의 시장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도될 수도 있다.
또한 의료의 공공성이란 문제 역시 이러한 전제를 필요로 한다. 위에서 보듯, 의료의 공공성이 확대되면 될수록, 그것은 감시의 강화, 자율성의 침해로 냉소되는 것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건강이 실체이며 건강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주체로서의 역할을 함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