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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이데올로기 - 서관모

멍청이 2009.03.19 00:19 조회 수 : 1006


[이론]지 제8호(1994년 봄호)


 


적대와 이데올로기: 역사유물론의 전화*


 


서관모(충북대 교수, 사회학)


 


 


 

이제 마르크스의 이론이 "'유한'하고 한정된", 곧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그 모순적 경향의 분석에 한정된 이론(알튀세르)임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승인하기가 쉬워졌을까? 아마 조금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유한하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닫힌' 이론이 아니라 '열린' 이론이라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사유 속에 역사의 흐름 전체를 포괄하는" 닫혀 있는 이론인 역사철학 곧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어 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전능이라는 사고에서, 따라서 '관념의 전능'이라는 관념론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유한성, 한정성의 승인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으로 지배적이었던 형상을 합당하게 개조할 것을 요구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한다고, 또는 전화시킨다고 할 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문제설정이, 분명 어떤 본질적인 측면에서 '마르크스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를 작동시키는 것이지만,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에 따라 발전시키려는 것임을 발리바르의 논의를 따라서 설명하려 한다.

 

 

1. 마르크스주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아다시피 위대한 부르주아 휴머니스트들은 당시 흥륭하는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신이라고 제창하는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테제에 대항하여 이 신의 자리에 인간을 놓았다.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이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의 행위와 사유의 자유로운 주체인 인간은 우선, 소유하고 매매하는 법의 주체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유물론적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주체'라는 법적 이데올로기의 관념에 대한 거부, 곧 '인식주체', '도덕주체', 따라서 '역사의 주체'의 기각이다. 역사유물론에서 분석의 출발점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다. 현실의 인간은 분석의 도착점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6번에서 말하듯이 인간적 본질은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ensemble)'이며, {자본}에서 분석하듯이 인간은 주체(대문자 주체: 이하 '주체')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기능의 담지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했다는 보수주의의 반진보주의적 이념을 "그 결론들을 전도시킴으로써 나름대로 다시 채택하고 그 이념으로부터 '사회적 관계'라는 자신의 개념을 도출"하거니와, '사회적 유대(紐帶)'와 구별하여 마르크스가 개념화한 '사회적 관계'는 적대들 또는 모순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관계다.

 

인간사회를 일반적 이해 위에 정초하지 않고 적대의 조절 위에 정초한다는 것,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의 가장 심오하고 전복적인 측면의 하나다. 우리는 정당하게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과정(곧 생산)의 분석에 도입되고 계급투쟁에 적용된 화해불가능한 적대라는 사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형상을 해체해야 한다 할 때 해체가 재구성의 계기라면 마르크스 사상에서 이 재구성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적 적대의 사상, 적대의 문제설정이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지배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국가이데올로기 제1번'인 경제(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이 경제(학)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와 정치,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과정과 국가를 분리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놀라운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부르주아지에게 제공한다. 노동자들이 이 경제(학)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가적 정치가 '공익'을 위한 것,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국가의 대중적 토대들을 침식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마침내 발견된' 수단이 획득된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경제(학)적 이데올로기가 분리하는 이 두 개의 '현실'을 단락(短絡)시키며, 각기 자유로운 소유자인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이라는 관념, 나아가 '순수한 착취'('정치적'이지 않고 '경제적'인 곧 강제 없는 착취)라는 관념은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각자의 '소유물'을 '교환'하는 계약적 형태로부터 초래되는 법적(juridique) 환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단락은 사적 활동(의 영역)인 노동과정 또는 경제와 공적 활동(의 영역)인 국가 또는 정치라는 경제(학)주의적 대당을, 따라서 이러한 대당을 상이한 수준에서 각각 표현하는 '국가/시민사회, 국가/자본, 속박/자유, 위계/평등, 공적(집단적) 이해/사적(특수적) 이해, 계획(또는 조직화)/시장(또는 경쟁)'등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대당들을 무효화한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정치적 대당과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진리/오류, 현실/환상, 존재/의식, 과학/이데올기와 같은 철학적 대당을 무효화한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렇게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국가이데올로기의 비판이라는 특권적인 지위를 갖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의 수미일관한 전개가, 알튀세르와 특히 발리바르가 보여주듯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화 불가능성, 보편적 적대의 복수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이 비판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될 것(전화할 것)을 요구한다. 영원히 발전하는 적대라는 사상에 토대를 둔,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근원적으로 새로운 표상은 그로 하여금 인간주의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에 대한 일체의 계약론적 문제설정을 기각하고 정치에 대한 부르주아적 개념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정치 개념을 도입하게 한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정식화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 대중의 정치, 공산주의적 정치가 바로 '노동에 의한 정치의, 그리고 정치에 의한 노동의 상호전화'인 '노동의 정치'다. 정확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한계에 조응하는 한계를 지니는 노동의 정치라는 관념은 또한 필연적으로 노동의 정치가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노동의 분할에 기초를 둔 적대는 민족적 분할, 성적 분할, 지식과 관련한 분할 등에 기초를 둔 다른 적대들 또는 모순들에 의해 과잉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무효한 것이 전혀 아닌 이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그것이 나아가는 것과는 역의 방향, 요컨대 의식적으로든 의지에 반해서든 마르크스주의를 자유주의화하는 방향으로 개조하려는 근래의 이러저러한 기도들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다. 이성적 인간 '주체'에 의한 사회의 구성이라는 고전 정치철학의 자유주의적 문제설정으로 되돌아가는 이러저러한 '시민사회'론의 기획이 전망을 지닐 수 없음은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유효한 보완물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입증해 주는 바다. 또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셰마에 합리적인 언어적 교통의 문제설정을 추가하는 하버마스류의 민주주의의 기획 역시 같은 처지에 있다. 마르크스가 거부한 '경제인'이라는 인간주의적 신화로 되돌아가는 분석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기획은 위기에 처한 사회민주주의 기획과 운명을 같이 할 뿐이다. '계약적 교환의 일반화된 이론'의 견지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다시 읽고 그리하여 정치에 대한 본질적으로 전(前)마르크스적인 윤리주의적, 계약론적 문제설정으로 회귀하는 자크 비데의 '메타마르크스주의'의 기획에서도 우리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막강한 위력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비데의 이러한 독해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계약과 연합의 '주체'인 '인간'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의 곤란은 그가 적대들을 계급적대로 환원한 데, 곧 사회적 관계들을 노동분할에 토대를 둔 계급투쟁관계들(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로 환원하여 계급투쟁을 역사에서 유일하게 결정하는 지위를 갖는 것으로서 사고한 데, 역사와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에서 못 벗어난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 적대가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계급규정 없이 다른 적대들 또는 모순들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 분석이 내포하는 모순들은 계급투쟁의 총체화(계급투쟁 개념을 통한 사회적인 것에 대한 총체화적 형상화, 다시 말해 계급투쟁 개념에서 '사회적 전체'를, 곧 한 원리에 의해 통일되는 유기체로서의 사회를 연역하는 것, 곧 사회적 관계의 총체화, 그리하여 적대적인 사회적 관계 없는 사회인 공산주의라는 신화의 창출)에 관계되는 것이지 그것이 '역사적 물질성(또는 역사의 정치적 물질성) 속에서 화해불가능한 것의 심급'을 표현하는 비판적 기능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좌익적 전화, 그것은 핵심적으로 자유주의의 이원론적인 철학적,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공간을 해체하면서 또한 거기에 매여 있는 마르크스의 사고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적대라는 구조적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 총체화할 수 없는 것인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에 대한 준거를 해체하지 않으면서 적대를 계급적대로 환원하는 계급투쟁의 총체화적 형상화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적대의 문제를 민족, 인종문제와 결합하여 사고함은 물론 또한 근대정치와 그 이데올로기가 억압해 온 모순들, 곧 성적 분할에 관련된 불평등(과 이 불평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육체와 정신의 분할에 관련된 앎(인식적 지식과 정서적 앎을 총괄하는 광의의 지식)의 불평등(과 이 불평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을 포괄하는 방향으로의 정치의 개조를 사고함으로써 근대정치로서의 계급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작동시킴으로써 '위험을 무릅쓰고' 그 '봉기적' 측면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전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개조는 마르크스주의의 '수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인 마르크스주의가 그 비판적, 해방적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론적 전제다. 이러한 전화의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형상이 종래의 형상과 너무도 달라져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라 부르기 어려운 것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일까? 엥겔스가 말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의 사상이 아니라) '대중의 사상'이고,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이론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전화를 위한 개입 속에서 전화하고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이라면 말이다.

 

 

2.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관련하여 이데올로기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개념에 마르크스의 이론 곧 역사유물론의 모순들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을 통해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독일 이데올로기}(그리고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물질이라는 관념과 무관하다. 그것은 비실재론적, 유명론적(唯名論的)이어서 관념론/실재론의 형이상학적 대당을 벗어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론은 "개별적 노동과 사회적 생산의 결정적 현실성을 은폐, 기만, 억압하는 (추상적, 사변적인) 관념론적 표상/환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본질적으로 파생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오직 이 비판만이 유물론에 결정된 내용을 부여할 뿐, 입장, 정세, 또는 투쟁을 떠나 있는, 곧 초역사적인 유물론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유물론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념론적 표상들[곧 이데올로기들]의 형성 및 현실적 생산에 대한, 요컨대 '관념화과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분석(또는 분석 프로그램)이다".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으로서의 역사유물론은 '현실(적인 것)'을 '물'로서가 아니라 "관계로서, 실천적 관계들의 구조"로서, 또는 알튀세르의 표현을 쓰자면 "주체없는 과정"으로서 분석하는 것, 또는 "요소들을 통한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통한 인과율이라는 관념을 상정"하는 것에 조응한다. 현실적인 것 곧 물질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들이며 개인들은 사회적 관계들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적대 또는 모순이 '세력관계들에 내재적인 구조'다. 이 모순의 작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는 역사를 갖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역사적이게 하는 것은 이 모순의 역사성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the historical)을 사고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곧 '역사의 주체'를 설정하는 '역사에 대한 철학(역사철학)'에 반대하여 '역사 속에서 철학을 실천하는' 한 방식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유물론의 강점은 사회적 관계의 전화의 계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개념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주체', 따라서 '혁명적 주체'의 문제설정을 추방하게 해 준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사회적 관계 개념, 적대 개념의 독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착취관계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의 물질적 조건들을 분석함으로써 노동을 인간이라는 의식적 '주체'의 순수한 창조활동으로 보는 노동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념과, 스미스(및 정치경제학 그 자체)와 헤겔의 노동에 대한 관념론과 단절한다. 스미스나 헤겔에게서는 전체 경제적 과정 또는 역사적 과정의 '주체들'인 인간들(개인들)만이 등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회적 생산관계들은 무대에 생산과정의 기능들의 담지자들과 생산과정의 물질적 조건들을 등장시킨다({'자본'을 읽자}, 제8장 [마르크스의 비판]). 요컨대 그의 착취분석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물질적 제약의 성격에 따라서 정의되는 사회집단들에 대한 물질적 제약의 조직화라는 것을 함축한다. '순수한 착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성 없는(곧 비대칭적으로 분배된, 권력의 기술 및 수단이 없는) '순수한 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은 메커니즘(개인들의 기계적 총합으로서의 사회)과 사회적 '유기체'('유기체'로서의 사회)라는, 또는 '개인주의'(자유주의/경제학주의/심리학주의)와 유기체주의 또는 전체주의(hol- ism)(보수주의/사회학주의)라는 고전적 대당 속에서 사회를 표상해 왔다(두 항에서 지배적인 것은 물론 앞의 것들이다). 이러한 고전적 대당은 사회적 관계가, 그 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 표현되거나 또는 역으로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구성되는 공동체적 유대, "본질, 기원, 숙명, 종(種), 혈통 등과 같은 공통의 관념(idea)에 대해 유지하는 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통일하거나 또는 대립시키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는 것을 전제한다([마르크스의 계급정치 사상], 236-237쪽). 이렇게 사회적 관계에 물질성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현실적인 것은 개인 아니면 사회 둘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관계가 물질성을 띤 적대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개인이냐 사회냐 하는 이러한 추상적 양자택일을 지양한다.

 

이렇듯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이고, 그의 역사유물론이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 속에서 역사적인 것을 사고하는" 시도인데, 이러한 사회적 관계 개념과 양립불가능한 것, 그리하여 이 개념의 그 모든 함의를 발전시키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환상'(의식 속에 현실적인 것이 '전도'되어 반영된 것)으로 규정된다.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문제는 '의식의 철학' 따라서 '주체의 철학'의 문제, 이 철학의 '절대적 진리관'이 내장하고 있는 진리/허위의 '인식론적' 대당의 문제와 같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논리를 보자. 절대적 무소유("자본주의 사회의 해체")라는 그 상태의 특성상 프롤레타리아는 이데올로기가 없는, 곧 사회적 관계에 대한 환상이 없는 세력, 역사에 대한 투명한 의식의 소유자, 곧 보편계급이 된다. 사회적 관계의 전화가 집단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프롤레타리아 진리'라는 이러한 관념은 진리의 담보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당이라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소외의 문제설정에 기반을 둔 이러한 '환상/전도'의 도식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도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가 실종된다는 사실은 바로 이 개념이 수반하는 곤란의 징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이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그 갈등을 싸워 해결하게 되는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라는 정식을 제시한다. 이 정식에 따르면 "모든 정치는 무조건 이데올로기에 의존"한다. 또는 "정치 일반의 영역 또는 '요소'는 이데올로기"다(발리바르). 갈등을 '의식'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형태' 안에서이고 그것을 '싸워 해결'하는 것도 그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 정식은 마르크스를 중대한 아포리아에 빠뜨린다. 정치는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며 이데올로기는 환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비물질적, 환상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모든 계급투쟁은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준거를 통해 정의되는 정치, 따라서 가장 현실적인 정치가 비물질적 = 환상적인 것, 곧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비정치가 된다. 이데올로기의 종언, 정치의 종언, 적대적인 사회적 관계가 부재한 투명한 사회인 공산주의라는 묵시록적 이미지가 등장하고, 그가 기각한 사회적 유대의 문제설정이 그의 분석 속에 어른거린다(예컨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더욱이 공산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러한 이미지는 마르크스 자신이 또한 결코 포기하지 않은 공산주의 정의, "그 조건들이 현존하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나는 "오늘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이라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정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곤란이 보여주듯이, 그 통일성이 의식에 의해 확보되거나 또는 완성되는 '주체'를 설정하는 '의식의 철학'에 대한 위대한 해체자였던 마르크스는 동시에 그것의 포로였다. 마르크스는 인간, 민족, 또는 절대정신을 대신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역사의 주체'를, 해방의 필연성을 사고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철학'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의 이론은 "위대한 독일 관념론의 최후의 변종"(발리바르)이다.

 

알튀세르가 작동시키려 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러한 모순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구성체 이론에 '이데올로기' 개념을 도입하는 행위 자체 속에서 모든 표출적 인과율로부터의 이론적 단절과 유물론을 향한 결정적인 일보를 본다. 동시에 그는 마르크스가 묘사한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곳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 대한 본질주의적 설명양식들로 회귀하려는 경향의 영원한 원천을 본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가 아닌 이상 모든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개조, 발전시키려 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개조, 발전시키려 한 이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모순 대신 '결여'를 보고 마르크스의 경제적 '구조'(생산양식)의 이론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이론을 추가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추가의 열쇠는 항상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변증법 속에서 추구되었다.

 

알튀세르의 입장은 정반대다. 그는 '없거나 부족한 상부구조 이론'을 추가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산' 및 '재생산'이 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에 본래적으로 의존하는 과정임을 증명함으로써 구조 개념 자체를 전화시키려고 한다(주 26 참고). 그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프로이트적 의미와 구분하자면 '비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근본적으로 비마르크스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존재와 의식(또는 의식적 존재)의 변증법을 기각한다. 알튀세르가 제안한, 마르크스 또는 헤겔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스피노자와 더욱이 프로이트로부터, "즉 정신의(psychic) 기능작용 속에서 인식적(cognitive) 측면과 정서적(affec- tive) 측면의 통일성을 성찰하고 그러한 양면성을 초개인적인(trans- individual) 관계들의 본질적 특징으로 삼는 철학들"로부터 유래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즉 역사의 동력들 및 제도들에 대한 모든 '체험된' 개인적 또는 집단적 관계의 일반적 '요소'는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적 실존이 항상 이미 상상적인 것의 요소 속에서 전개된다고 한다면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고는 무한한 과정 속에서 현실적인 것에 속한다". 여기서 '현실적인 것'은 주어진 '물'이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들)을 지칭한다. 그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에서 '의식'을 '상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현실(성)에 대한 개념화에서 '대상'을 '실천'으로 대체하는 것의 대응물이다. 이 상상적인 것은 "반영도 재생산도 아니고, 동일성들[정체성들], 표상들, 담론들의 생산임을 함축한다.…그것은 용어의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제[적 구성](fiction)의 과정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 '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고'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는 '역사의 주체'가 설 자리가 없다. '주체'의 동일성은 주어진 것인데, 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고가 현실적인 것에 속한다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서 보면 모든 동일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화'라는 항상 불균등한 어떤 과정의 생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급의 동일성은 과잉결정된 계급투쟁 과정 속에서 구성되며, 민족의 동일성은 역시 과잉결정된 '민족화'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 민족은 사회의 '민족화'의 산물, 국가 안에서 개인들이 '인민'(민족성원)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로 성공적으로 '호명'된 결과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상상적 관계'이며 모든 공동체는 '상상적 공동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인 것이라 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들에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들은 오히려 개인들과 집단들에서의 의식과 그 형태들의 생산으로 제시되고, 항상 이미 비표상적인 요소들(희망과 공포, 신앙, 도덕적 및 비도덕적 가치, 때때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해방 또는 지배의 열망)과 결합되어 있는 표상의 양식들, '세계내 존재', 주체적 동일성들의 생산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들이 수행하는 이러한 결합은 어떤 '주체'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또는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조건들, "분업, 소유형태들 등의 물질적 제약들, 그것 못지않게 물질적인 언어, 욕망, 성욕의 제약들이라는 조건들"에 의존한다. 이데올로기들은 이렇게 의식의 제어를 벗어나며 의식을 규정하는 물질적(의식'외적') 조건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러한 개념화는 마르크스의 유명론적 유물론을 살려내려는 고투의 산물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동요하면서도 끝내 매여 있던 '의식의 철학', '주체의 철학'으로부터, 따라서 '진리(또는 존재, 현실)와 환상(또는 비현실성)의 형이상학적 대당', '(시민)사회와 국가의 정치적 대당'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풀려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사회의 국가로의 표출' 그리고 그에 대칭적인 '사회내로의 국가의 대칭적 흡수'로 역사를 파악하는 일체의 역사관을 무효화한다. 이러한 철학적, 정치적 대당에 입각한 사고와 실천이 지니는 문제는 바로 '진리의 보증, 인식의 보증',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는 '공산주의의 보증, 당의 절대지의 보증'의 문제로 요약된다. 이러한 보증의 기각, 곧 인식과 정치에 내재적인 한계들의 승인은 '더욱 커다란 현실주의의 조건'일 뿐, 인식론적, 정치적인 상대주의, 허무주의와는 무관하다. 이 보증의 기각은 바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의 이론적 초석인 사회적 관계 개념이, 그리고 자신의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정(射程)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계급투쟁 개념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단순히 주체를 파괴 또는 실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가 '기원, 본질 원인으로서의 주체'라는 관념론적 범주를 실격시키고자 하는 것은 역사 속의 주체들,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계의 전화를 위한 혁명적 실천의 주체들의 구성을 사고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한 것은 "구성하는 기능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주체를 이행시키는" 것이다. 이 주체의 구성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주체 없는 과정'(유명론자 마르크스에게 실천은 주체 없는 과정이다), 다른 말로 '과잉결정된' 과정 속에서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이데올로기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들의 구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국가에 대한 그 내적 관계를 통해 정의하고자 하는 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엥겔스의 작업, 계급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노년 엥겔스의 분석을 이어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를 단지 계급투쟁에서 지배계급의 수단으로, 계급투쟁을 소유관계와 생산력발전의 조응법칙의 표출로 보는 역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표상에 반하여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서]…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대중들의 구성의 문제를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제기하고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국가에 대한 그 내적 관계를 통해 정의함으로써…우리를 훨씬 더 전진시킬 개념화의 맹아를 도입한다.(…)이데올로기적 사고양식의, 그리고 국가 자체의 이러한 내적 결정을 상술하기 위해서는, '국가 개념의 확장'으로 나아가 국가로 하여금 사회의 영역을 잠식해 가도록 하거나(이것이 그람시의 방법이다), 아니면 국가라 불리는 것의 감축불가능한 복잡성을 특징지우는 이데올로기적 과정 안에서의 국가의 '거리를 둔 작동', '부재한 인과성'을 사고하려 하는 것(이것이 알튀세르의 방법이다)이 필요할 것이다. 알튀세르의 관심은 물론 이데올로기적 과정의 무의식적 본성에 대한 엥겔스의 주장을 보완하는 데 있을 것이다([이데올로기의 동요], 160쪽).

 

엥겔스의 이러한 시도가 당시의 '성공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엥겔스가 끝내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것,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도래의 날이 '산술적으로' 예측될 수 있다고 믿어질 정도였던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엥겔스에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와 대비되는 정세 속에서 알튀세르는 엥겔스가 실패한 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알튀세르는 저 유명한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철학적 대상을 발명해냈지만, 이 '단절'은 '토픽'(topique)과 부단히 함께 연구되어 왔다. 알튀세르의 이론화작업의 경과 속에서 변증법에 강조를 두는 '단절'이라는 당초 지배적이던 테마는 종속적으로 되고 유물론에 강조를 두는 당초 종속적이던 '토픽'이라는 테마가 지배적으로 된다(그러나 지배적 은유인 '단절'이 해체된다고 해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모든 구별이, 개념과 이데올로기의 적극적인 차이라는 본질이 부정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절'이라는 대상의 해체가 지시하는 것은 라캉과의 동맹에 대한, 자신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적 요소에 대한 정정이기도 함에 유의하자(여기서 쟁점은 라캉의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다). 그의 정정은, 이데올로기론 또는 국가론의 형태로 역사유물론의 빠진 고리를 채워 그것을 '완성'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복하여 출몰해 온 유혹에 이끌린 것에 대한 자기비판이라 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러저러한 현실들이 장악하고 있는 위치들을 표현하는 개념적 은유"인 토픽은 그가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서, 그에게 토픽이라는 질문은 사고의 유효성의 조건들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적-사회적 장치의 기능작용이라는 질문이다. 그는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마르크스적인 구별들을 발현 또는 표출이라는 관념론으로도 또 물리학주의적 메커니즘으로도 절대 환원될 수 없는, 또 역사의 유일한 현실성인 정세들의 독자성(그것들의 '과잉결정')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독창적인 인과율 셰마로서 해석한다. "기원, 주체, 의식이라는 관념론적 사고에 대립하는 토픽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생명을 불어넣"고자([철학의 전화], 83쪽) 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 자신이 토픽의 설명에 부여했던 형태, 곧 건축술적 은유를 파괴하는 데 몰두한다. 이러한 작업의 경과 속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서는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의 토픽을 '생산/재생산'의 토픽("마르크스의 제2의 토픽")으로 대체하기에 이른다. 구조주의와의 '불장난'이 초래한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 생산/재생산의 토픽은 새로운 곤란을 내장한 것이었다. 여기서 곤란은 구조(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의 위와 모순(사회적 관계들의 동일한 재생산의 불가능성을 특징지우는 화해불가능한 적대 일반)의 우위의 양자택일에 빠지지 않고 둘을 동시에 사고하는 것의 곤란이다. 이 곤란, 동요는 [오늘의 마르크스주의](1977)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마지막 이론화에서 새로운 토픽이 구성됨으로써 해결의 계기를 찾게 된다. 이제 토픽이 지시하는 것은 '이론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적 전체의 복합성'뿐만 아니라 '그 자체 그것이 개입하는 정세의 일부가 되는 이론의 이중적 위치'다. 이 마지막 이론화에서 그는 사회적 복잡성 또는 정치적 실천을 총체화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하면서 명시적으로 '항상적 과잉 또는 결핍이라는 견지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고려하게 된다.

 

[오늘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신의 토픽(알튀세르의 말로는 마르크스의 토픽)을 가지고 그가 제기하는 질문은 핵심적으로 '관념들 그리고 특히 이론적 관념들의 능력과 무능력의 원인들'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관념들의 역능' 또는 '이론의 유효성'의 조건들에 대한 반성이라는 형태로, 또한 간접적으로 마르크스의 '비판적이며 혁명적인' 이론이 투여되어 있는 조직형태들에 대한 논쟁과 정치적 비판의 형태로 이론의 이중적 위치라는 질문을 던진다.

 

[1859년의] [서문]에서 서술은 토픽의 형태를 취한다.(…)마르크스는…자신의 관념을…더이상 주어진 전체에 대한 설명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그것이 끼칠 수 있는 효과의 견지에서만 고려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형태도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이론 형태에서 '이데올로기 형태'로 변화한다.(…)마르크스의 관념은 토픽에 이중으로 기입된다. 그리하여 관념은…그 자체로서 역사적으로 능동적인 것일 수 없으며, 계급투쟁 속에 채택된 대중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하게 될 때만 역사적으로 능동적일 수 있다는 핵심테제가 나온다.(…)토픽 안에서 관념이 이중의 위치를 점한다는 유물론은…충분할 수 없다. 관념은 또한 대중적인 '이데올로기적 형태' 속에서 갈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선전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조직들을 요구한다.(…)그들은 모든 계급투쟁 조직은 자신의 통일성을 방어하고 확고히 할 목적을 갖는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분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가 당 자체에 요구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컨대 이론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단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작용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반대물' 곧 이데올로기로 전화해야 한다. 어떤 과학도 이데올로기로 다시 '번역'되지 않고서는 사회적 운동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인식, 이 '번역'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수반한다는(따라서 사회적 관계들의 전화로서의 정치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인식, 그것은 노동자운동에서 당 형태의 극적 역사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획득한 인식이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인식론적 관념을 최종적으로 해체하고 진리란 '정세의 사실', '정세의 효과'임을 인식하게 해준다. 진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체현하고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맥락 안에서 생산된다는 점에서, 또 진리는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현실의 조우, '양자의 예외적 응축'으로서 생산된다는 점에서 정세의 효과다([이데올로기의 동요], 174-175쪽). 엥겔스가 '계급과 대중의 모순적 절합' 또는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사고하는 데 끝내 실패한 것은 그가 대중과 계급의 관계를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기초 위에서 사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인식은 당 형태가 계급투쟁의 "유일한 본질적 형태, 곧 계급투쟁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자본주의의 역사의, 그리고 그 위기의 변화무쌍함을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 내지 권력장악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리고 혁명을 넘어서서 더욱 나아가도록 해줄 본질적 형태"([마르크스의 계급정치 사상], 248-249쪽)라는 관념을 해체하고 이 관념을 당 형태는 계급투쟁의 정세적 조직형태라는 인식으로 대체하게 해준다. 설령 알튀세르 자신은 당 형태에 대해서는 이렇게 사고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지막 토픽이 우리로 하여금 사고하게 해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계급과 대중의 변증법'이라는 정식은 계발적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추상적인 것임에 유의하자. 이 추상성이 아직 해결되지 못한 어떤 문제의 징표가 아닌가 마땅히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대중은 과연 혁명적 주체(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되는가?

 

 

 

3. 사회적 관계들과 주체화양식들

 

알튀세르가 계급과 대중의 관계를 사고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을 해체하면서 제시한 이론화가 지닌 곤란으로 바로 들어가자. 그의 곤란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부여하는 이유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이하 [비동시대성], 184-190쪽).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 일반의 메커니즘"은 개인에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일하게 '주체로 호명된다'. 이것이 즉각 '기능주의'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데올로기들의 '계급적 성격'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 일반의 메커니즘은 개인에 관련된 것이지만 "개인들이 그것들을 위하여 '주체들로 호명되는'(심지어 그것들이 가상적으로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는), 또 개인들의 실천들이 그것들 덕택으로 제도들 속으로 삽입되는, 상징적 준거들(신, 법칙, 민족, 혁명 등)은 필연적으로 집단적"([비동시대성], 185쪽)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이 두 측면, 곧 '개인적', 중립적, 대칭적 측면과 '집단적', 경향적, 비대칭적 측면의 절합양상이 바로 알튀세르의 추론에서 빠져 있는 고리다. 그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이중의 의미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곧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이면서 또한 지배자, 피지배자의 구분을 떠나 보편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여 대중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서 반역하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는 계급적 지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능력의 원천이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 곧 피지배자들 자신의 무지와 환상들에 있다는 관념이나, 대칭적으로 이 원천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들은 지배계급들 또는 그들의 '직업적 이데올로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자신들의 표상들을 대중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관념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발리바르는 여기서 알튀세르의 입장이 논리적으로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고 추론한다. 곧,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효과들을 지배자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회에서 '정상적'(또 규범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강한 의미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경험, 곧 사회에서 일반화됨과 동시에 의식들로 관념화될 수 있는 (상상적) 경험은 "지배자들 자신의 체험된 경험(그들의 가치, 생활양식, 세계관, 상징적 자본 등)"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며,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이 아니라 항상 피지배자들의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축적이 그 '실체'로 '산노동'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교회 기타 지배적 제도들의 다소간 억압적인 장치들은, 대중들의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또는 예술적 상상(적인 것)으로부터, 인민적인 의식/무의식으로부터 도출되는, 항상적으로 쇄신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착취가 잠재적 모순을 내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도 잠재적 모순을 내포한다. 역사의 피지배자들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보내진 그들 자신의 상상의 보편성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또는 오히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상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역사적 정세 속에서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할 때, 그것이 혁명인 것이다(승리하든 못하든 간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역사의 주체'인 계급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즉 정치적 변화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대중들임은 결코 의심할 바 없다([비동시대성], 187-188쪽).

 

이렇게 스피노자를 따라 이데올로기의 구성에서 대중에게 능동적 역할을 부여하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서 대중들이 반역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발리바르가 논증하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테제, 그러나 마르크스, 엥겔스를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목적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논증한 사람이 없는 테제다. 이와 관련하여 노년 엥겔스의 고투의 위대함과 그것의 실패에 대해서 다시 상기해보자. 엥겔스는 원시 기독교와 유비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대중들의 사상'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대중들의 사상'으로부터 반대물인 '국가종교'로, 중세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화하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사상이라 할 때 그것이 또한 기독교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있는가? 엥겔스는 주저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의 무소유/무환상이라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사고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알튀세르가 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보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보증 자체를 기각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잠재적으로 반역적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 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 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런데 뒤의 측면이 앞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 그러나 그 역도 정확히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보증의 기각은 현존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이 기각은 오히려 잠재적으로 그것들에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협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궁극에는 위험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는 가능성이다(가까이 이란 혁명의 예를 보라). 그러나 대중들의 이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그 자체만으로서는 혁명이 될 수 없다. 혁명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할 때'에야 일어난다. 이데올로기기적 반역이란 대중들이 현존의 사회적 관계들에 순응하는, 곧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게 행동하도록 '정상적으로' '호명'된 주체들에서 그것들에 반역하는 주체들로 새로이 구성되는 것, 새로이 '주체화'(sujetion)하는 것을 뜻할 터이다. 따라서 이 주체화양식들(주체적 동일화의 양식들), 개인적, 집단적 동일성의 구성양식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의[일차로 생산관계=계급투쟁관계의] 연구를 주체화양식들의 연구와 절합'해야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당연한 요구다.

 

이 둘의 절합이 사고될 수 있기 위한 이론적 전제는 다시 이데올로기의 개인적 측면과 집단적 측면의 절합이다.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들의 기능작용은 ('개인적'이지도 또 그와 대칭적으로 '집단적'이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초개인적(transindividual)"이라는 스피노자적이고 마르크스적인 테제를 통하여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반정립', '개인과 사회체라는 추상적 양자택일'을 지양함으로써 이 절합의 양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효과로서 개인적 동일성을 생산한다. "모든 '동일성'은 개인적"이지만 "그러나 또한 모든 개인성은 개인적인 것 이상"이다. 개인적 동일성은 역사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인간적 개인성의 형태들의 생산과정은 "항상 이미 주어진 초개인적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의, 유사성과 상징적 소명(召命)이라는 보충적 수단들에 따른 생산의 과정"이다. 모든 개인성은 "'우리'라는 표상들, 또는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공적이며 사적인 일상적 활동들 속에서 맺어지는 자기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셰마들로 형성되는 초개인적인 것이다"([민족형태에 대하여], 150-156쪽; [민족형태], 118-119쪽). 개인적 동일성 자체가 이렇게 초개인적인 것,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주체화양식들의 연구와 사회적 관계들의 연구는 단지 절합가능한 것이 될 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절합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알튀세르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에 주체화양식들에 대한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연구에 직접 원용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는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화 또는 사회적 개인성의 구성이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마르크스주의에 역사적 물질성을 사회적 관계에 부여하는 역사유물론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계급에 대한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비록 근본적인 한계들을 지니고 있지만) 분석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관계 이외의 사회적 대립관계들뿐만 아니라 이 주체화양식들도 가장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단 이러한 분석은 불가피하게 마르크스에게 없는 요소들의 도입을 요한다. 역사유물론은 시간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계급투쟁을 그것 말고도 또한 물질외적인(extramaterial) 개념들(예컨대 무의식, 또는 성)과 접합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이론적 토픽에서도"([이데올로기의 동요], 178쪽) 원칙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토픽은, 알튀세르의 토픽을 포함하여, 좀더 완전한 것으로 되기 위하여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자연히 여기서 마르크스주의가 또한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은 대상이 다르며(사회적 관계와 무의식) 제기하는 질문들(핵심적으로 노동분할과 가족)이 다르다. 따라서 라이히 등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한 방식으로 양자를 환원주의적으로 종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에 '무의식적' 차원이 존재하고(이데올로기적 관계) 무의식에 사회적 차원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 두 이론이 제기하는 질문들이 과잉결정되어 있는 것인 한(예컨대 '자본주의적 노동력 지배에 의한 가족의 과잉결정') "제기되는 질문들을 가능한 한도 안에서 서로에게 작용하게끔 하는" 것([프란치스코 상페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분명 생산적인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의미의 '활용'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 위한 기본전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적인 것)에 대한 프로이트의 표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프로이트(예컨대 [대중심리와 자아 분석], 1921)에게는 역사유물론에 없는 것으로서, '개인적 무의식'이라는 관념에도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관념에도 대립하는 무의식의 초개인적인 성격이라는 관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사회를 사회적 갈등들을 넘어서 국가 속에서 조직되는 실체로 이해한다([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교훈], 64쪽). 요컨대 적대가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그중의 하나가 가족이다)을 관통한다는, 역사유물론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으로써 프로이트의 이러한 '사회학주의'를 교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정신분석학의 활용은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부단히 프로이트적 유비들을 통해 마르크스를 해석했지만 주체를 구성하는 구조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프로이트의 개념들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일반화하는 것을 선택한 알튀세르의 교훈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또한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기본적 실천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이론 속에 '노동하는' 사람의 계급적 위치와 관점을 새겨 넣는 회피할 수 없는 방식"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환원주의, 본질주의, 그에 입각한 사회적 관계 또는 역사적 과정의 총체화는 마르크스주의를 반대물로 전화시킨 이론적 요소다. 그렇다면 인간학 자체를 기각하는 것이 해결책인가? 사회적 관계의 전화를 위한 투쟁이 환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영역 속에서의 노선설정과 그 해결책의 예상' 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이데올로기 비판이 있을 수 없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인간학적 관념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관념을 단순히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 담론들의 정치적 쟁점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그의 '(생산적)노동의 인간학'을 전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의 인간학에 토대를 두고 노동자대중의 해방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가 왜 반대물로 전화했는가? 이론상의 주요원인은 지식과 관련한 사회적 적대를 계급적대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보편적인 적대로 사고하는 것을 끝내 불가능하게 한 마르크스의 사고의 제약에 있다. 물론 마르크스에게는 지식의 문제와 관련한 대중해방이라는 문제설정이 있다.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할'의 문제설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육체성(manualite)과 지성(intellectualite)의 대립'은 '노동의 분할'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할'이라는 도식을 통해서는 '혁명적 이론의 지성과 노동자적 실천들 간의 모순'을 비판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특히 엥겔스는 혁명당의 두 개의 중심, 곧 '정치적(또는 전략적, 또는 조직적) 중심'과 '이론적 중심'을 구별함으로써 당에 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모순들이 해결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역사는 당 형태 안에서 노동자운동의 이론적 '중심'과 전략적 '중심' 사이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육체노동과 지적노동의 분할의 문제설정과 관련하여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최후'이자 '최종'의 발전인 마오주의의, 특히 문화혁명의 역사가 이를 웅변해 준다.

 

대중의 해방을 사고하는 데서 마르크스의 노동분할의 문제설정과는 또다른 한 가지가 스피노자의 교통의 문제설정이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곧 교통활동이며 사유하는 것은 교통과정 외부에서는 불가능하다. 교통은 무지 및 지식의,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들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 관계들 속에 인간의 욕구가 투여되거니와, 이 관계들은 육체들 자체의 활동을 표현한다. 지식(connaissances)은 이러한 교통의 영속적인 완성의 과정으로서 모두의 역능을 증대시킨다. 그는 이러한 '상호유용성'의 지적 형식을 '공통개념'(notions communes)이라 부른다. 교통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미신'에 상응하는 한 극과 '공통개념의 확인'에 상응하는 한 극이 있거니와, 뒤의 극에서 교통은 개인들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적절한 지식들과 또 그러한 기쁨의 정서들의 통일이다. 그에게 대중의 해방의 조건은 모두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이러한 자유로운 교통을 위한, 교통양식 자체의 변혁이다. 여기서 왜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의 '노동의 인간학'과 스피노자의 '교통의 인간학'을 결합하려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스피노자의 교통의 사상으로 마르크스의 노동분할의 문제설정을 보완하여 노동과 또한 지식(인식적 지식뿐만 아니라 정서적 앎을 포함하는 광의의 지식)의 측면에서 대중의 해방을 위한 정치를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 알튀세르 사상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수 있다.

 

 

* * *

 

지금까지 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론 곧 역사유물론을 개조, 발전시키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의 이론화에 대한 발리바르의 약간의 핵심적인 보완에 대해 설명했다. 사회에 대한 이론의 구성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의 전화'에 몰두했던 "저작없는 철학자" 알튀세르의 철학적 작업의 개요를 발리바르를 통해 적대, 이데올로기, 토픽, 주체화 등 몇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발리바르의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철학적, 정치적 문제설정에 대한 이해는 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발리바르의 비판적인 정치적 이론화들에 접근하기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적 이론적 입장에 다시 굴복한, 마르크스주의의 이전의 철학적 의식을 청산해야 한다. 혁명적 실천으로 전화하기 위한 이론, 사회적 관계들의 전화를 위한 개입 속에서 전화하고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인 마르크스주이론이라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마땅히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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