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우리는 폐건전지가 아니다
[야! 한국사회] 우리는 폐건전지가 아니다
4월 마지막 토요일, 광주 하늘은 흐렸다. 저녁 무렵에는 비가 왔다. 금남로에 앉은 사람들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2007년 9월1일, 로케트전기 노동자 11명이 정리해고되어 복직투쟁한 지 602일, 어서 일터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리였다. 겨울도 아닌데 괜히 뼛속까지 시린 날이었다. 춥다고 으스스 몸을 떨다가 하늘을 보면 저 위에 남자 둘이 있다. 로케트전기 해고자들이다. 옛 전남도청 앞 30미터 교통관제 철탑에 오른 지 46일째였다. 아래에서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보건의료인들이 중간에 올라가 검진을 하겠다고 하자 얼마 안 되었다며 위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다리가, 허리가 아프다고 간간이 전화로 고통을 전했지만 이제는 “자가 판단을 할 능력조차 잃어버렸는지 이렇다 저렇다는 말도 없다”고 한다. 그날에서 벌써 열흘이 지났다. 아직 그이들이 내려왔다는, 복직하게 됐다는 소식이 없다. 새도 아닌데 새처럼 56일을 저 공중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은.
그날 늦은 밤, 철탑 아래 세운 천막에서 해고자 오미령씨와 마주 앉았다. 작은 몸집, 소녀처럼 앳된 얼굴인데 8살, 10살 두 아이 엄마다. 천막으로 들어온 아들들이 엄마 무릎을 베더니 곧 잠이 들었다.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도 그랬지만, 해고된 뒤에도 아이들은 엄마와 맘껏 지낼 시간이 없다. 엄마가 투쟁하는 현장에 나와야 그나마 그 시간을 벌 수 있다. 해고는 당사자만 아니라 가족들도 힘겹게 한다. 많은 걸 미래로 미뤄두어야 한다. 그리움도 아쉬움도 불안함도 답답함도 섣불리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을, 함께 견뎌야 한다.
오미령씨가 첫 직장 로케트전기에서 일한 시간은 짧지 않다. 25살에 들어오면서 55살까지 일해 정년퇴직하리라, 마음먹었단다. 어느 누구의 어떤 꿈이 더 그럴듯하다고 잴 수 있을까. 노동자로 살겠다는 꿈을 꾼 사람. 정년까지는 30년. 그중 12년을 일했다. 거기에 해고당해 복직을 위해 싸우는 2년을 더하면 얼추 마음먹은 기간의 반절 가까이 온 셈이다. 일할 수 없는 지금이 물론 힘들지만, 일을 했던 12년도 노동자로 사는 게 쉽진 않았다. ‘내 일터’로 여기며 ‘평생’ 일하겠다는 바람마저 노동자한테는 큰 욕심이 되는 현실이다. 두 아이를 배고 낳는 동안 부품 생산·조립·성형·완성·포장·출고 등 건전지를 만드는 모든 공정을 섭렵해야 했다. 임신했다고, 출산휴가를 썼다고 전환배치가 되풀이됐다. 회사가 여성 노동자를 배려해서? 아니다. 제풀에 지쳐 그만두기를 바랐던 거다. 2004년에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썼다고 여성 노동자 8명이 해고되어 복직한 일이 있다. 오미령씨도 그에 낀다.
첫 해고와 복직을 겪고서 동료들과 ‘민주노동자회’를 만들었다. 10여년 바뀌지 않는 노조위원장이었다. 선거에 후보를 내 경선을 만들었다. 그런 노력은 당연한 권리여도 자유롭지 않았다. 두 번째 해고에는 민주노동자회 노동자들만 고스란히 당했다. “최소한 양심의 표현”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선전물을 돌렸는데 “설마 이런 걸로 해고할 줄 몰랐다”고 한다. 회사는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생산에 참여해 회사를 발전시킨 노동자를 어렵다고 내쳐야 할까. 천막 안, “우리는 폐건전지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아프다. 오미령씨는 이야기 끝 무렵 자신들의 일도 일이지만 같은 광주에서 78명이 해고당한 대한통운택배분회 노동자들과 화물연대 투쟁을 걱정했다. 그제 화물연대 광주지회장이 목숨을 저버리고 말았다. 노예가 아닌 노동자로 살겠다는 꿈을 이루기 어려운 사회가 그 앞날이 밝을 수 있을까.
박수정 르포작가 2009.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