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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화폐와 허무주의 / 이진경 / 진보평론

멍청이 2007.02.14 16:01 조회 수 : 2963










화폐와 허무주의
- 화폐의 권력에 관한 맑스의 이론

진보평론 제4호
이진경(성공회대 강사/사회학)


1. 가치에서 화폐로

가치론과 관계 속에서 화폐론은 직접적으로는 화폐의 몇 가지 경제적 기능에 대한 요약 이상이 아니다. 한편 가치-화폐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모두 가치-화폐를 내용-형식의 관계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경우 화폐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가치(내용)로 환원될 수 있는 가격(형식)의 문제가 된다. 즉 가치론 안에서 화폐의 문제는 가치에서 가격으로의 전형문제로 된다.*주)

*주) 전형문제는 ① 생산된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일치, ② 총잉여가치와 총이윤의 일치라는 두 개의 총계 일치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스라파(Sraffa)는 표준상품 개념과 생산가격의 방정식을 통해 가격문제를 다룰 수 있는 틀을 제시했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간주되는 모리시마 역시 이 방정식과 표준상품의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계급투쟁의 문제를 표현한다고 간주되었던 이 방정식은 스라파를 잇는 신리카도주의자들에 의해 결국 가치 개념의 폐기라는 역설적 결과로 귀착되고(Steedman), ‘계급투쟁’의 논리는 땅콩가치론의 ‘조롱’으로 변환된다(Bowles and Gintis). 한편, Lipietz는 화폐의 노동등가물 개념을 도입하고, ①을 순생산물의 가치(총부가가치)=순생산물의 가격이라는 명제로 대체하여 해결하려 했지만, 총가치와 총생산가격의 비율로 노동등가물을 정의할 때(즉 ①을 다시 도입할 때) ②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난점에 빠진다. 이에 관해서는 강남훈, 「전형문제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ꡕ, 까치, 1986; 조원희, 「노동가치론의 철학적·이론적 기초에 대한 재검토」, ꡔ가치이론 논쟁ꡕ, 풀빛 참조.

그런데 ‘가치법칙’의 현실적 기능(효과)과는 다른 차원에서, ‘가치론’의 문제는 전형문제의 해결 여부와 무관하게 현실에 대한 별다른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가치론의 가치는 다만 노동가치론이 옳다는 것을 통해 맑스주의가 옳다고 입증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가치론이 맑스주의의 기초라는 고전경제학적 공리를 기각한다면, 반대로 맑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주1) 가치론의 변명과도 같은 궁색한 논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네그리는 이러한 생각을 좀더 격하게 표현한 바 있다. “가치론은 범주적 종합에 관한 이론으로서 혁명의 장에 들어가는데 없어도 괜찮은 고전이고 부르주아적 사기의 유산이다.”*주2)

*주1) 이에 관해서는 이진경, ꡔ맑스주의와 근대성ꡕ(문화과학사, 1997)의 제3장(맑스의 근대 비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참조.

*주2) A. Negri, Marx Beyond Marx, 윤수종 역,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 새길, 1994, 91쪽.

한편 화폐의 문제를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는 한, 화폐의 문제는 가치론으로 환원되고,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적 메커니즘은 사유의 영역에서 배제되게 된다. 화폐의 문제를 가치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러한 환원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형식이 내용의 형식화라면, 형식에 대한 검토는 그 안에 형식화된 내용에 대한 검토를 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내용과 형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내용에 대해서만 언급하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것이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이용하는 한 언제나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그러나 ‘변증법’에서도 말하듯이 형식 없는 내용은 있을 수 없다면, 내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용의 형식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가치란 그런 점에서 ‘내용’이라고 말할 때조차도, 그런 형식을 취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이고, 따라서 내용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반면 그것은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은 고유한 표현의 형식을 갖는다. 화폐가 표현형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가치라는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차원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표현(의 형식)이 내용(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약간 부연할 필요가 있다. 가령 어떤 이론의 내용이 계급적 내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해도, 잘 알다시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계급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다. 즉 내용이 계급적일수록, 표현은 계급적이지 않으며, 내용이 이데올로기적일수록 표현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다. 계급적인 내용이 초계급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표현의 형식에 대한 연구는 내용에 대한 연구로 환원되지 않으며, 표현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는 내용의 형식이 갖는 기능이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다.*주)

*주) 내용과 표현의 개념이나, 그것의 비환원성에 대해서는 Deleuze/ Guattari, Mille Plateaux, 이진경/권혜원 외 역, ꡔ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ꡕ, 1,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2000, 50쪽 이하와 94-95쪽을 각각 참조.

요컨대 화폐는 단지 가치라는 내용을 표시하는 형식이 아니라, ‘착취의 메커니즘’이고 ‘착취의 표현형식’이다. 착취라는 메커니즘의 표현형식이 화폐라면, 그 내용의 형식은 (잉여)가치 내지 (잉여)노동이다.*주1) 한편, 이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은 착취 내지 잉여노동인데, 이는 생산양식 내지 전유(appropriation) 양식을 구성하는 관계(형식)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화폐와 상관적인 내용의 형식으로서 착취 내지 생산양식에 대해 노동과정과 노동의 체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면,*주2) 착취와 상관적인 표현의 형식에 관해서는 화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화폐는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조직하고 추동하며, 그 안에서 착취 내지 포획이 이루어지는 형식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삶의 형식에 대한 질문은 화폐를 경유할 수밖에 없으며, 착취는 화폐와 무관할 수 없다.*주3)

*주1) 자본주의에서 가치란 이미 처음부터 잉여가치다. 소상품생산이라는, 유지되기 힘든 역사적 생산방식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가치’라는 관계(형식)을 취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전혀 다른 배치를 이룰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모든 노동은 이미 처음부터 잉여노동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가 국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매우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에 관해서는 Deleuze/ Guattari, 앞의 책, 2권, 280-282쪽 참조.

*주2) 이진경, 앞의 책, 제5장 참조.

*주3) 이런 점에서 맑스의 ꡔ그룬트리세ꡕ(Grudrisse)가 화폐에 관한 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나, 이를 지적하면서 화폐론의 새로운 중요성을 상기시킨 네그리(A. Negri)의 문제설정은 올바르다. “화폐론에 직접 종속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가치론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같은 책).

다른 한편 루카치(G. Lukcs)는 상품과 화폐를 다루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화’(Verdinglichung)에 관한 ꡔ역사와 계급의식ꡕ의 유명한 장에서 상품과 화폐의 문제를, 노동의 결과를 양화하여 계산가능하게 만드는 형식으로 포착한다. 즉 화폐는 노동이 갖는 질적인 모든 측면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며, 이로써 인간과 노동의 질적인 세계는 양적으로 계산가능하게 된 사물들의 세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주1) 이는 條文(code)에 의해 통제되는 계산가능한 세계로서 근대에 대한 베버의 연구와 ‘화폐의 철학’에 관한 짐멜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특히 짐멜은 생활양식(Der Stil des Lebens)의 차원에서 화폐의 문제를 다루는 훌륭한 선례를 남긴 바 있다.*주2)

*주1) G. Luk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박정호 외 역, ꡔ역사와 계급의식ꡕ, 거름, 1986, 172쪽 이하.

*주2) G. Simmel, Philosophie des Geldes, 조희연 외 역, ꡔ돈의 철학ꡕ, 한길사, 1983. 한편 여기서는 사라져버린,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을 수 있던 시절에 대한 (ꡔ소설의 이론ꡕ에서의) 그리움이, 기술과 예술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cf.하이데거) 그 좋던 시절의 장인적인 노동, 즉 그 본질이 유효하기에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이는 브레이버만 역시 동일하다. H. Braverman, Labor and Monopoly Capital, 강남훈 외 역, ꡔ노동과 독점자본ꡕ, 까치. 이는 짐멜이나 베버는 물론 하이데거나 아도르노도 결코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인데, 루카치는 이를 노동 개념의 철학적 원천인 헤겔에게 맑스의 철학을 되돌리는 전환점으로 삼고 있으며, 노동의 인간학으로 맑스주의를 회귀하게 하는 이론적 전거로 삼고 있다. 물화에 대한 개념으로서 물신성(Fetischismus).

이러한 철학적 개념화를 통해 루카치는 자본뿐만 아니라 상품 형식 자체를 폐기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데, ‘사회주의와 코뮨주의에 대한 기존의 개념 위에서’ 이는 그를 이른바 ‘좌익 공산주의’(Left-Wing communism)의 궁지로 몰아간다. 또한 노동의 인간학과 헤겔주의는 상품과 화폐에 대한 루카치의 분석이 갖는 새로운 측면을 ‘인간주의’라는 구태의연한 도식 안에 다시 밀어 넣는다.

우리의 생각은 화폐란 착취의 표현형식이며, 또한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 자체를 착취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모든 살아있는 활동을 가치화(Verwetung)과정 속으로, 즉 자본의 가치증식(valorization) 과정 속으로 포섭하여 그것이 생산하는 결과를 포획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생산물들을 현실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부정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러한 포섭과 포획을 통한 동질화를 강제하는 화폐적 등식을 통해, 일종의 초월적 권력을 장악하고 작동시키며, 그와 반하는 현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는 허무주의적 메커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표현형식으로서 화폐가 초월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통해 착취와 포획을 수행하는 한편, 포섭된 내부에 대해서는 동질화하는 권력의지를 작용시키고, 배제된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의 권력을 작용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화폐적 메커니즘을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식의 도식에서 출발하여,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nihilism)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 ‘허무주의’란 화폐적 등식으로 표시되는 ‘가치형태’의 의미와 효과를 뜻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등식과 상품과 노동이 계열화될 때 ‘철학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고, 이 등식과 자본이 계열화될 때 경제적 차원에서 화폐의 허무주의를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이 등식을 국가나 시장과 관련하여 검토할 때 근대 사회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새로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등식을 국제통화의 문제로 확장할 때 세계체제 내지 세계경제의 문제에 접근할 또 다른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등식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로서 코뮨주의, 혹은 자본에 반하는 운동 내지 혁명의 문제를 새로이 포착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명료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가치형태: 화폐화의 논리

알다시피 ꡔ자본ꡕ의 첫 장은 상품의 가치형태에 대한 유명한 도식들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화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간략히 상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다. 먼저, ① 단순한 가치형태는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xA=yB)
라는 도식으로 표시된다. 여기에서 좌변의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 우변의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즉 상품 A는 자신의 가치를 상품 B의 사용가치를 통해서 표현한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품 A는 ‘상대적 가치형태’고 그것의 표현을 위해 이용되는 상품 B는 등가형태다. 여기서 A는 B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능동적’ 역할을 하며, B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주1) 이 관계는 등가적이므로 서로 반대의 역할을 할당할 수 있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등호의 좌우변을 바꾸어야 한다. 즉 등호의 좌변은 주어고, 우변은 서술어며, 등호는 ‘is'라는 동사인 것이다.*주2) 가치형태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맑스가 말할 때, 그것의 요체는 어떤 상품의 가치가 반대편의 등가물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치란 등가형태를 통해 정의되며, 등가형태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1) K. Marx, Das Kapital, Bd. I, 김수행 역, ꡔ자본론ꡕ, 상, 비봉출판사, 1989, 60쪽.

*주2) 이는 포르-루아얄(Port-Royale) 논리학에서 동사의 이론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양의 언어에서지만) 모든 문장은 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동사는 tre (be; sein)동사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ꡔ말과 사물ꡕ, 민음사). 여기서 tre 동사는 등호(=)의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② 전개된 가치형태.



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외연적 확장이다. 이는 등가형태의 추가를 통해서 상품 B의 가치가 특정한 하나의 등가형태로부터 탈영토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제 다양한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된 상품 A의 가치는 그 자신의 특정한 사용가치와 무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가치는 다른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는 능력(잠재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전개된 가치형태는 우변의 항들 간에 교환을 보장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가 성립하는가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만일 라면 이 전체 등식은 A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즉 A의 가치는 우변의 사용가치들로부터 완전히 탈영토화되지 못한 것이고, 가치는 일반적인 교환가능성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 교환가능성으로서 가치가 정의되기 위해서는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일반화된 가치형태로의 변환이 필요하게 된다. 맑스가 말하는 ③ 일반화된 가치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화된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들이 특정한 하나의 상품 E를 통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공통적으로 표현한다. 상품 E는 일반적인 등가형태다. 여기서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달리 E를 통해 좌변의 모든 상품들 상호간에 일정한 등식이 언제나 성립한다. 다시 말해 ‘단일한 등가형태로 등가형태를 일반화함으로써’, 등가형태 간에 일의적인 관계를 수립한다. 그런데 이 때 일반적 등가형태를 이루는 좌변의 상품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만드는 가치관계를 통해 등가형태의 일의성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배제는 인위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다만 자신의 가치형태를 표현할 등가형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E가 좌변의 상품세계 안에 온다고 해도, 맑스 말대로 ‘z량의 상품 E = z량의 상품 E’는 단순한 동어반복일 뿐이며, 여기서 좌변은 상대적 가치형태가 아니고, 우변 역시 등가형태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며 그런 만큼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 등가형태로 작용하는 E 역시 ‘하나의 상품인 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는 시장상황에 따라 등가형태로서 자신의 일반성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동요하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품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배제하여, 상품과는 다른 것으로 위치짓고 상품 아닌 것으로 작용하게 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완성된다.
알다시피 ④ 화폐형태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 등가형태의 자리에 상품이 아닌, 그러나 상품의 가치를 표현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들어설 때 화폐형태가 성립한다. 화폐 G는 교환비율의 시장상황과 무관하게 일의적인 등가형태로 기능하며, 이로써 상품들은 하나의 단일한 척도와 규칙을 통해 안정적으로 질서지워진 단일한 세계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화폐는 단지 상품교환의 등식이 확대되고 나열되는 것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으며, 다양한 상품들이 어떤 일반적인 등가형태를 통해 일반화되는 것만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품세계에서 배제된 어떤 요소를 인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이전의 형태와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이제 좌변과 우변은 능동과 수동의 역할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상품 간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화폐가 아닌 상품과 상품이 아닌 화폐라는 이질적인 두 항 사이의 ‘불가역적 관계’를 표시한다. 이전의 가치형태와 단절을 만드는 이러한 불가역성은 국가장치 내지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

반복하건대, 화폐는 상품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며, 상품세계의 ‘외부’이다. 다시 말해 화폐는 상품세계의 외부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상품 세계의 내부에 있다가 ‘배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품세계에 일의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상품세계의 외부, 시장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국가장치가 바로 그 외부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화폐가 상품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와 같은 기능적 차이뿐만 아니라 이처럼 발생적 차이를 포함하는 명제다.

화폐형태 아래서 중요한 역전이 나타난다. 등가형태로서 화폐는, 좌변에 있는 상품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폐형태가 확립되면, 화폐라는 등가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만이, 다시 말해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는 것만이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상품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화폐와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여했어도 상품이 아니며, 가치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은 화폐를 통해서 ‘상품화’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가치는 화폐 이전에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라는 등가물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가치란 가치화(Verwertung)를 통해서, 화폐와의 등가성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다.

3. 화폐와 허무주의

맑스가 제시한 화폐형태의 도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폐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좌변에 있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상품들을 ‘하나로 묶고 통합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니 어떤 생산물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화폐와 등가관계를 취해야 한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물은 화폐를 통해 상품세계 안으로 들어가며, 화폐는 그 상품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세계로 통합한다. 가치의 유혹을 통해 생산물들을 상품세계로 끌어들이고 그 세계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통합자로서 화폐.

또한 화폐는 이제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로서 나타난다. 생산물들에게 상품세계의 회원증을 나누어주는, 아니 가치를 분배하는 초월적 지배자로서 화폐. 이것을 통해서만 어떤 생산물도 상품이 된다는 점에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이다.

초월자로서 화폐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정의되는 이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가치가 ‘화폐적 가치로 동질화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생산물은 어떤 것도 화폐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화폐와 교환가능한 가치를 갖지 못한 것은 적어도 자본주의에서는 존재이유(raison d'tre)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생산물이 계속하여 생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화폐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 그런 ‘가치’를 갖는 생산물은 점차 소멸의 길을 밟게 되고, 화폐로 환원가능한 가치만이 살아남게 된다.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모든 것은 화폐적인 가치로 동질화된다. 화폐로 표상/대표되는 가치의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초월적 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화폐형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가치는 오직 화폐일 뿐이다. 동질화하고 획일화하는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

초월적 가치로서 화폐는 화폐화의 강박을 만들어낸다. 이제 상품이라고 불리고자 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비상품으로서 화폐를, 상품세계의 피안에 있는 저 초월적 가치인 화폐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치환하고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욕망한다. 각각의 생산물이 갖고 있는 고유한, 종종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가치는 초월적 존재로서 화폐의 화려한 금빛 광채 앞에서 자신의 빛을 잃어버리고, 그 금빛 광채로 자신의 신체를 둘러싸고자 하게 된다. 생산물의 특이적인 ‘가치’의 초월적 피안으로서 화폐와 그것을 통해 부정되는 차안으로서 ‘가치’들. 생산물들의 현재적인(현세적인) 능력의 부정과, 단지 장래의 교환가능성을 뜻할 뿐인 미래적인(비현세적인) 능력의 찬양. 결국 화폐가 대표하는 가치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은 ‘생산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의 부정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 피안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선망과 찬양으로서 부정적 허무주의다.

화폐적 허무주의는 모든 가치의 화폐적 획일화, 모든 능력의 화폐적 동질화, 모든 관계의 화폐적 단일화를 작동시킨다. 화폐화되지 않는 어떤 질이나 성질, 특성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존재이유를 상실해간다. 가령 파종되는 씨앗들은 오직 화폐로 치환가능한 비율을 기준으로 하게되며, 그 비율이 큰 품종으로 점차 축소되고 획일화된다. 연구하는 지식들은 화폐화되기 쉬운 것으로 수렴하며,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것도 특별한 조건이 없으면 생산되거나 생존하지 못하게 된다.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점차 제거하고 축소하며 ‘부정’한다.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상품들 간의 관계로 변형되는 것이 상품관계의 특징이다. 이러한 관계는 화폐를 통해서 상품의 가치가, 결코 가치를 갖지 않는 ‘초월적인’ 어떤 대상(화폐)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맑스는 ‘물신주의’라고 했다. 이는 화폐로 하여금 동질적인 가치공간을 형성하게 하는 권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제거할 능력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주의는 화폐를 통해 작동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가치화된 활동이고, 가치화하는 과정에 기여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구매된 노동이고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주) 이런 점에서 가치화는 (잉여)가치증식이다. 그렇지 않은 활동, 그렇지 못한 ‘노동’은 무가치하며, 소모적이고 소비적인 활동이요 소모적인 행동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짓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의자를 수리하는 활동, 다른 사람을 위해 운전을 하는 행동 등등. 이런 점에서 노동력이 상품화되는, 다시 말해 노동력이 화폐적 표현형식을 통해 가치를 갖게 되는 양상을 우리는 앞서와 유사한 화폐형태의 도식으로 표시할 수 있다.

*주) 맑스는 이를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한 스미스의 정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서 분명하게 한 바 있다. K. Marx, Theorien über Mehrwert, Bd.1, ꡔ잉여가치학설사ꡕ, 1권, 아침, 1989, 165쪽 이하 참조.



이제 생산적 활동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화폐가 통합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를, 외적이고 초월적 가치의 자리를 획득하게 되었음을 이 도식은 보여준다. 모든 활동은 그것이 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 반대로 화폐화될 수 없는 어떤 활동도 가치가 없다.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서 화폐화될 수 없는 활동은, 아니 다른 것보다 화폐화되기 어려운 활동은 점차 소멸과 종말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화폐화될 수 없는 생산물, 화폐화 되기 힘든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4. 화폐와 자본주의

어떠한 상품이나 생산물도 화폐의 이러한 가치 승인을 통해서만 그 가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가치법칙이란 이러한 화폐적 승인의 소급적 과정을 통해 거꾸로 노동과 생산, 투자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다. 다시 말해 가치법칙은 가치화(화폐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노동이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고, 모든 것을 화폐적 가치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이며,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활동들을 의미 있게/의미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요컨대 가치법칙이란 화폐적 세계의 허무주의가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배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와 화폐를 통한 결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맑스의 다음 도식에 집약되어 있다.



이로 인해 모든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해지고, 반대로 화폐를 통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생산능력으로서 노동력을 생산의 조건인 생산수단과 분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폐는, 혹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수한 종류의 화폐로서 자본은 능력으로부터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박탈하고 무력화시키는 부정의 권력의지를 작동시킨다.

노동력은 화폐적 등가물을 통해서만 가치를 승인받고 유효한 생산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품이 됨으로써 화폐적 질서 안에, 화폐가 통치하고 통제하는 질서 안에 통합되며, 화폐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질서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이제는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만이 노동으로 정의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화폐화할 수 없는 활동이나 능력은 생산적이지 못한 노동이요 비노동이 되며, 사회적으로 승인될 수 없는 노동이다. 승인 받지 못할 노동은 부재해야 하며 소멸해야 한다.

여기서 화폐는 노동이 가능한 지대를 구획함으로써 이전의 생산의 공동체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화폐화될 수 있는 활동과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지극히 포괄적인 ‘공동체’지만, 또한 그런 한에서만 받아들이는 지극히 배타적인 ‘공동체’다.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자본주의에서, 그 가치를 승인받을 수 없는 활동을 하는 자, 혹은 일자리를 잃고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자라면, 누구든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그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진경,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 ꡔ진보평론ꡕ, 창간호, 1999년 가을 참조.

요컨대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할 수 없는 자는 ‘인간’의 대열에서 배제되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죽어 마땅한 것이 된다.*주)

*주) 노동력의 상품화는 생산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생산하고 활동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화폐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 자체를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를 통해 동질화하는 과정이며, 생산적 능력 자체를 하나의 단일한 가치를 통해 측정하는 과정이며, 그럼으로써 화폐화될 수 없는 한, 생산적인 어떤 능력도 무능력으로 간주하는 과정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생산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화폐화하는 능력이며, 생산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화폐화하는 활동이다. 이제 생산하는 활동보다 차라리 그것을 판매하고 화폐화하는 활동이 더 중요해지고(농부와 유통중개상의 관계, 상업 내지 유통활동의 위상), 지적 활동보다 그것을 팔 수 있는 정치적 활동이 중요해지고, 예술적 활동보다 그것을 비싼 값에 화폐화할 수 있는 경영적 활동(매니저와 매니지)이 중요해진다.

능동적인 힘으로서 생산적인 힘, 욕망을 그것이 현재화할 수 있는 조건인 생산수단에서 분리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이라면, 생산적인 긍정적 의지를, 생산의 조건을 장악한 자본의 의지(부정의 권력의지!)로 대신함으로써 이제 능동적 힘은 부정의 권력의지 아래 생산적 힘으로 행사된다. 이를 니체는 ‘반동적 생성’이라고 불렀다.*주)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생산적 힘, 생성능력을, 생산조건 내지 화폐를 소유한 부르주아지의 의지와 목적에 제공함으로써 자본의 증식을 의미할 뿐인 반동적 생성에 봉사한다. 맑스가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부른 과정은 이 반동적 생성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허무주의화하는 힘으로서 화폐의 증식이라는 점에서 허무주의적 메커니즘 안에 있는 것이다.

*주) 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범순 외 역, ꡔ니체, 철학의 주사위ꡕ, 인간사랑, 1993, 116쪽 이하; 고병권, 「니체 사상의 정치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1997, 82쪽 참조.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다. 즉 잉여노동이 가치의 형태로 자본으로 포획되는 과정이 바로 축적과정이다. 따라서 축적이란 현세적 활동이 화폐의 초월적 세계를 증식시키는 과정이고, 그에 따라 화폐적 가치의 독립성과 초월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며, 그런 만큼 현세적 활동이 위축되고 축소되는 과정이다. 맑스가 말한 ‘소외’라는 말은 이러한 ‘화폐적 허무주의화(nihilization) 과정’의 다른 표현이다.

종종 공황이라고 번역되는 위기(Krise)는 승인받지 못한 상품들의 가치가 실제적으로 무효화되는 과정(Entwertungsprozeß)이고, 그에 따라 그 상품들의 가치가 잠식되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화폐적 세계가 승인ㅈ할 수 있는 크기에 의해 가치가 재평가되는 폭력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가치법칙이 생산활동 자체에 반작용하는 소급적인 과정이며, 그런 만큼 초월적인 화폐적 가치가 잠재적 가치의 세계에 관여하여 조정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능동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파괴와 탈가치화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생산의 세계에 대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주)

*주) ‘유예된 소비’로서 저축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정의 역시 이러한 허무주의적 場 안에 있다. 화폐적 축적을 위한, 소비의 무한한 연기로서, 소비에 대한, 아니 사실은 생활에 대한 평가절하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이다.

5. 화폐와 사회

상품가치의 화폐형태 도식이 보여주듯이, 화폐는 다양한 상품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질적인 면에서 각각의 상품이 갖는 이질적인 특징들은 화폐의 끈을 통해 하나의 질서로 묶인다. 즉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가치를 등가물에 양도하고 그것을 통해 대의(代議)하는 상품들과, 그러한 위임을 통해 상품의 가치를 대표/표상하는 대표로서 화폐. 요컨대 상품들의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이다.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그 설명의 논리에서나, 작동의 논리에서나 근대인과 근대 국가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설명의 논리에서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척도적 역할을 위임하고 부여하는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은 화폐의 탄생을 설명한다. 마치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정확하게 동형적이다. 또한 이러한 설명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초월적인 권력을 갖는 화폐에 의해 상품세계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치론적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양상 역시 국가적 권력과 인민간의 관계와 동형적이다.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러한 화폐의 초월적 위상과 통합적 기능을 전제하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질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자동적인 조절의 메커니즘으로 나타나는 시장은, 초월적인 외부의 배제를 통해 가능한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개입을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 즉 이미 자동화된 메커니즘 안에 초월적인 제3항으로서, 통합 및 통제를 수행할 전제적 위치를 점유한 화폐의 항상적 개입을 통해 시장은 작동한다. 또한 그것은 화폐의 그러한 기능을 정의하고 보증하며 강제하는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장이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국가의 기능이란 바로 ‘화폐적 통합과 통제를 보증하는 국가의 개입’인 것이고, ‘화폐를 통한 국가의 개입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강제와 폭력의 메커니즘’이라고 하겠다.

모든 가치의 승인으로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모든 가치를 단일한 가치로 동질화하는 조건으로서 화폐를 전제하며, 화폐를 통해 작동한다. 자유주의의 조건으로서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란 자유로운 의지의 행사에 따르는 비용에 대한 책임이며, 결국은 그러한 계산을 자유의 전제라는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계산하며 효율적 최적점을 찾는 공리주의적 인간을 전제한다.*주) 이러한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이 모두 화폐로 환원되는 것이란 점은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레세 페르’(Laissez faire!)를 외치는 자유주의자의 호기(豪氣)는 계산과 효율성, 책임과 비용의 형식을 통해 항상-이미 작용하고 있는 화폐의 권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며, 결국은 화폐의 메커니즘, 화폐의 권력에 맡겨두라는 언명인 셈이다.

*주) 결국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는 화폐와 계산을 통해 하나의 단일한 계열로 수렴한다. 스미스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정하는 경제 개념에서 공리주의적 인간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H. Arendt, The Conditions of Human, 이진우 외 역, ꡔ인간의 조건ꡕ, 한길사, 1997, 94쪽 이하 참조.

6. 화폐와 세계자본주의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국제경제적 통합 메커니즘에 대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 체제의 주도권의 변화는 다른 ‘화폐상품’들의 척도가 되었던 이른바 국제통화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변화된 제국주의 나라 간의 역관계와 상응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제국주의 나라의 헤게모니와 지배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국제통화는 제국주의의 헤게모니 내지 통합의 경제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국가의 화폐가 갖는 통합 및 포섭의 권력이 각국의 자본주의를 하나로 묶고 통합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영국 제국주의의 지배시기에 스털링 체제나, 미국 제국주의 지배시기에 달러 체제가 그러한 사례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맑스의 도식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듯이 어떤 나라의 화폐가 국제 경제 내지 무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국의 통화 M이라는 ‘등가형태’를 통해야 한다. 여기서 국제통화로 기능하는 헤게모니국의 화폐는 상품세계를 통합하고 조직하는 화폐의 기능을 동일한 양상으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화폐가 상품에 대해 갖는 권력과 통합력을 국제경제에서는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행사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가 갖는 사회적 통합의 기능 역시 그것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국 자본주의는 국제통화의 일의적 지배 내지 통합 체제 아래 복속되고 포섭되는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일차적 단위는 국제경제인가? 알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이전의 ‘화폐형태’와 ‘국제화폐 형태’ 간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이전의 화폐형태와 달리 화폐상품과 국제통화 간의 이러한 관계에서 첫째, 국제 통화인 M은 각국의 ‘화폐세계’에서 배제된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다. 즉 국제화폐는 화폐상품의 일부다. 다시 말해 상품과 달리 스스로 가치를 갖지 않았던 화폐와 달리, ‘화폐세계’의 일부로서 ‘가치를 가지며’ 그런 만큼 자국내 경제여건에 따라 변화된다는 점에서 불안정한 척도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가 자국 내에서 상품 ‘가치’의 표현자인 한,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같은 표현력의 가변성을 피할 수 없는 한, 가치를 갖지 않는 상품세계의 외부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화폐적 통합의 안정성은 확보할 수 없다.

둘째, 국제화폐에 의해 묶이는 각국 화폐, 즉 화폐상품들은 이미 각국 내에서 상품세계를 질서지우고 통합하며,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강제적이고 제도적인 화폐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예컨대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경우처럼 국제화폐에 의해 경계지워진 화폐세계에서 배제되는 경우에도 자국 내에서는 화폐로서 여전히 기능한다는 점에서, 화폐화되지 못하면 파괴되고 소멸되는 상품과 달리 독립성을 갖는다. 이는 헤게모니국의 화폐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존재가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국적 화폐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이는 통합된 화폐세계에서 일국적 단위의 독립성과 일차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셋째, 일국에서 화폐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했던 국가가 있었던 것과 달리 국제경제에서 국제통화의 기능을 보증하고 강제하는 것은 국제적 국가가 아니라 헤게모니국 자신의 힘과 능력이다. 즉 헤게모니국의 화폐적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과 능력이 약화된다면, 다른 경쟁국에 의해 통합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화를 대체하려는 경쟁이 항상적으로 잠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품-화폐의 관계와 또 다른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의 또 하나의 요인이며, 국제적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일국적 자본주의가 독립성과 일차성을 갖는 또 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위기는 이러한 국제통화가 갖는 안정성의 동요 내지 변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제통화를 포함하여 각국 통화가 국제통화를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국제적인 환투기는 국제화폐 자체가 화폐상품이라는 사실, 투기대상이 되는 국제통화의 가치표현능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 등에 기인한다. 이러한 투기로 인해 국제통화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되며, 이는 국제적인 경제관계는 물론 일국적인 차원에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국지적인 국제화폐가 발생하고 기능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 국의 지배체제와 갈등 속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EC에서 ‘유로’라는 새로운 통화체제를 만들려는 집요한 노력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7. 화폐와 코뮨주의

이상에서 본 것처럼 지배적 가치형태로 자립한 이래,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그것이 결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이래 화폐는 생산물을 질서지우는 초월적 기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이나 사람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척도였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공동체를 대체하고 대신하여 사람들의 결합과 통합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메커니즘이었다. 화폐는 “모든 것을 냉정한 계산의 찬물 속에 집어넣는다”는 맑스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폐화된 관계는 화폐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넣는다. 이를 사회적 관계에서 허무주의라고, 혹은 허무주의적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코뮨주의란 이런 관계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고, 그런 관계를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제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공동으로 생산한다’는 경제주의적 정의를 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공산당 선언」)으로서, ‘현실적 이행운동 그 자체’(ꡔ독일 이데올로기ꡕ)로서 코뮨주의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코뮨주의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초월적 가치, 초월적 권력에 대한 비판이요, 그것이 야기하는 허무주의의 초극으로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코뮨적 관계에 대한 꿈으로서 코뮨주의.

한편 자유와 평등에 대한 등가적 관념, 교환에 대한 등가적 관념, 관계의 공평성에 대한 등가적 관념은 모두 앞서 말한 화폐적 질서 안에 있다. 예를 들어 평등한 교환은 가치가 동일한 물건의 교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비화폐적 교환, 비화폐적인 관계는 모두 공허한 환상이요 몽상일 뿐이다. 그런데 흔히 현실성의 이름으로 비판하듯이, 이 화폐적 척도는 과연 넘어설 수 없는 것인가? 화폐라는 초월적 가치 내지 척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활동이 교환되고, 사람들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잘 알다시피, 이전에 맑스는 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가변성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화폐 내지 화폐적 관계는 어떠한가? 소유를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맑스주의자들조차도, 상품이나 화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화폐적 관계의 폐기가 소유관계의 폐기보다도 곤란하고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코뮨주의는 화폐적 관계의 초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이른바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대한 기존의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 관념을 넘어서서, 코뮨주의를 현재성의 시제를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재정의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레닌 이후 거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그랬지만,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 경제를 규제하는 원리로서 존립하는 한, 그것을 통해 사회주의를 넘어서 코뮨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치법칙과 화폐관계는 코뮨주의로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전혀 내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행의 계기, 그것은 바로 가치법칙과 화폐관계에 반하는 투쟁, 화폐의 비자본주의적 사용, 비화폐적 관계의 확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코뮨주의란 바로 이처럼 화폐에 반하고 가치법칙에 반하여 사람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운동 그 자체가 아닐까? 화폐와 무관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가치법칙에 반하여, 화폐에 반하여 새로운 사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현실적인 이행운동 그 자체”가 바로 코뮨주의가 아닐까?*주)

*주) 역으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만 유의미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선형적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화폐적 관계의 극복은 순진한 공상성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마치 루카치가 그랬듯이.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든, 사회주의에서든 그 안에 내재하는 외부로서 코뮨적 조직과 코뮨적 관계로서 코뮨주의는 가치법칙을 벗어나려는 현실적 이행운동을 통해서만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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