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
[조주은의 ING]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라는 진술이 묵인하는 것 | ||
조주은(여성학자) / 2006년09월13일 14시24분 |
우연히 남성들과 함께하는 모임에 나가게 되면 여성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내게 한 남성이 술이 몇 잔 들어간 후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다. “솔직히 한국사회에 여성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남성에 대한 역차별 아닌가요?” “요즈음 여성들에게 맞고 사는 남성들도 있잖아요.”
몇 천년 동안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었던 여성들,
공식적인 문자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여성들,
남성들의 성 노리개거나 부계혈통을 계승할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았던 여성들이
이제 겨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남성들의 반격(backlash)이 시작된다.
이러한 남성들의 저항은 성차별적인 사회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여성들, 일명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과 연결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주의자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여성들은
주류사회로부터의 (비)공식적인 추방을 각오해야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남성들은 남성들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여성들에 대한 살인과 부당한 이름붙이기를 자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무차별한 마녀사냥이다.
당시 마녀재판시, 기혼남성인 한 법관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발견하고는 ‘악마의 젖꼭지’라고 이름붙이고 마녀의 유죄 증가로 사용하였다. 법관은 마녀로 기소된 여성의 그것을 지나가는 행인에게까지 다 보여줬고, 그녀는 마녀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됐다.
여성들의 성적 쾌락이 논의되고,
그나마 결혼관계에 있는 배우자 남성을 통해서 ‘허락’된 것도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세까지도 소녀들이 배우자 남성을 통하지 않고
자위행위를 해서 스스로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행위는 질병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남성들의 자위행위를 막기 위해
페니스나 고환을 잘라버리거나 수술을 한다는 의료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남성들과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위험한 여성들이기 때문에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남관계를 왜곡시키는, 위험한 여성들로 간주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스트는 때로는 남성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성차별적인 사회, 여성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왜곡되어 편파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대하여
서구의 이론에 무분별하게 심취되어 있는 자유주의자 혹은
사회를 한 큐에 궤뚫는 보편적인 이론이 없고
몇몇 여성들의 사례만 나열하는 비이성적인 자,
남성들과 점잖게 협상하지 않고 한쪽 귀를 닫고는
자신들의 주장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싸움닭 취급을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목표는 우리사회의 기준인인 비장애인 남성,
그들의 경험으로 구성된 지식을 해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보여지거나 제대로 들려지기 힘들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내가 인터넷 언론매체에 글을 쓸 때
‘모 여성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직위를 달면 거의 리플이 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글을 쓰며
‘여성학자 조주은’이라며 페미니스트로서 내 자신을 드러내면
“저런 년의 혓바닥을 잘라라”
“더 이상 글 못 쓰게 저런 여자의 손을 잘라라”는 악성리플로 도배가 된다.
‘낙인’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의미있는 관계망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의미된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주류남성의 관계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협적일 수 있다.
가부장제사회에서 남성의 관심어린 시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의미 있는 자원을 획득할 기회의 박탈로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힘을 주장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목숨과 삶을 내놓으며 싸워온 여성주의자 조상들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극구 부정한다.
그래야만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가수 김윤아가 두 번째 싱글앨범을 냈을 때 나를 포함한 수 많은 팬들은 그녀 특유의 이미지와 앨범의 분위기로 인해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칭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학계에서도 불란서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은
정작 본인들의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남근중심적인 언어,
글쓰기에 저항하는 그녀들을 향하여 페미니스트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남성들과의 관계 단절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나는 성이 두개(부모성)인 여자들을 별로 안 좋아 하는데...”
라고 말하며 부계혈통을 정통으로 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하여
반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여성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권력을 상징하는 주류남성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두려움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망에 의존하여 살아가지만
모든 남성들은 여성과의 관계에 기생하며 살아간다.
근대 이후 자율적인 주체로 호명되는 남성 개인은
남성성의 상징인 경제력을 근거로 ‘독립적인 자’로 의미된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성들의 노동에 무임승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불완전한 자이다.
자녀들을 대신 돌봐주고 각종 공과금을 대신 내주며
집안․자산관리를 해주는 여성,
남성들을 위해 성적 서비스까지 해주는 여성들이 없다면
남성들의 제법 우아해 보이는 삶과 관계망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성적 이중규범에 의거하여 소위 ‘못참는 남성’은
남성의 삶과 욕망이 얼마나 여성의 노동과 몸에 기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적인 욕구 하나 자신이 관리하지 못하고 반드시 여성의 몸을 통해서 해소를 해야만 하는
남성담론을 보더라도 ‘독립적인 남성’이라는 규범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은 남성의 통제 하에 존재해야할 여성들이
자신들을 떠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얼마나 ‘의존’하였는지를 반영한다.
페미니스트는 성별로 위계화된 불평등한 사회,
여성들의 경험을 사소하게 여기며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여성억압에 대하여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의 자격요건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을 1차적으로 ‘남성’ ‘여성’으로 구분하는 방식,
차이라는 미명하에 하나의 성 정체성과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하여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페미니스트이다.
따라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나는 성차별적인 사회에 찬성하며,
비장애․ 이성애자․소위 학력자본을 가진 남성들의 몸과 경험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를
묵인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부인) 등 처먹고 사는 놈(잡파)”의 이름 앞에 붙었던
‘진보’라는 평가를 떼어낼 때,
여성노동에 대한 착취에 가담하였던 남성들의 성찰이 시작될 때,
여성들의 경험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때,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당한 낙인과 편견은 거두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한다.
“나는 (좌파) 페미니스트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