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읽기
이상락ㆍ경북대 강사/경제학
들어가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오늘날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점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지배형태를 낱낱이 파 해쳐 피지배계급인 노동계급이 지배구조에 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이론적 전략적 기반을 제공해왔다. 반면에 이것이 노동계급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도리어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자본의 전략을 이끌어 내는 보고(寶庫)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1)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자본론은 우리(노동계급)에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본론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고전이니까 재미로 읽어야 할 것인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읽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 읽을 것인가? 우리에게 약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허물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데 이용할 수 있도록, 즉 노동계급의 무기가 되도록 자본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철저히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자본론은 역사적 산물이며 또한 마르크스도 인간이기에 자본론에도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마르크스를 신격화할 필요도 그리고 자본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책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자본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자본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자본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추출해내고 부족한 점을 보충할 때에 자본론은 오늘날 계급투쟁에서도 여전히 노동계급에 유용한 전략적 보고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이미 죽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더욱 더 무장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사회관계로서의 자본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자본을 물(物)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회관계(계급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을 사회관계로 파악하지 않는 한 계급적 입장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인식한 마르크스는 자본론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은 물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라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자본론 1권 제1장 상품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이를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물신주의의 폐해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물건에 의하여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을 사회관계로 규정한 마르크스의 다른 경고를 살펴보자.
“만약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직접적 생산자, 즉 노동자 자신의 소유인 경우에는 그것들은 자본이 아니다. 그것들은 노동자의 착취수단이자 지배수단으로서 봉사하는 그러한 조건 하에서만 자본으로 된다.” (자본론 1권 p. 963)2)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하에서만 그는 노예로 된다. 면방적 기계는 면화로 실을 뽑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 하에서만 그것은 자본으로 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떼어낸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금이 그 자체로서는 화폐가 아니며, 또 사탕이 사탕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 자본은 사회적 생산관계이다. 그것은 역사적 생산관계이다.” (자본론 1권 p. 963n) “자본은 물건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관련되는 특정의 사회적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가 물건에 표현되어 이 물건에게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은 물질 즉 생산된 생산수단의 총계가 아니다. 자본은 자본으로 전환된 생산수단인데, 생산수단 그 자체가 자본이 아닌 것은 금 또는 은 자체가 화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은 사회구성원의 일정 분파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생산수단이며, 살아있는 노동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이 노동력과 대립하고 있는 노동력의 생산물이자 활동조건인데, 이것들이 이 대립을 통하여 자본으로 인격화되고 있다.” (자본론 3권, p. 1004)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들면,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진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자본론 1권, p. 560)
마르크스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이 있어 왔다. 대표적인 집단이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위대한 경제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를 메기고 마르크스의 업적을 종래의 정치경제학의 오류를 수정하고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리카아도의 원리보다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를 경제학의 영역에만 한정하고 정치의 영역은 당대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문제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유하고 여기서 나온 생산성을 당이 주도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자연히 그들은 노동계급의 주도권과는 별도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축적을 분석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불안정성 또는 착취적 성격을 분석하는데 그쳤다. 결국 그들은 혁명 또는 개량에 의한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치유법을 사회주의적 계획과 사유재산의 철폐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분석이 경제학에 한정되면 당의 정치적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될 뿐이다. 계급투쟁을 중앙무대에서 밀어내고 생산에 대한 물신숭배는 사회주의를 합리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특정 형태, 즉 임금형태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본주의 공장과 그 임금노동자에 관한 이론으로 축소하였으며, 그 결과 ‘노동자계급’은 임금을 받는 산업노동자라는 낡은 정의 역시 그냥 유지되었다.3) 이러한 이론적 태도는 나머지 사회부문을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외된 대상은 국가와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실업자, 가정, 학교, 보건, 언론, 예술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농민봉기를 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범주에 밀어 넣었으며, 학생운동은 쁘띠부르주아나 룸펜적인 것으로 분류하였으며, 여성운동은 묘한 가정적 생산양식의 틀 속에 엮어졌다.
자본을 물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사회관계로 파악할 때 진정으로 계급간의 투쟁이 전면에 대두된다. 계급투쟁은 자신의 사회질서를 강제하려는 자본의 노력과 자신의 독자적인 이익을 지키려는 노동계급의 노력, 그 둘 사이의 충돌이다. 투쟁을 초월하는 제3의 객관적인 관점은 없다. 항상 두 개의 관점, 즉 자본의 관점과 노동계급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범주와 현상에 관한 분석을 양면적이어야 하며 계급관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두 관점을 넘어 객관성이 설 곳은 없다. 객관적인 과학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임금을 살펴보자. 임금은 노동자에게는 소득이지만 자본가에게는 비용이다. 자본은 그것의 착취 및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분리를 은폐하기 위하여 임금형태를 사용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이 같은 착취를 공격하기 위해 임금을 사용한다. 임금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며 또한 착취를 보장하는 주요 도구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바로 그러한 분열을 공격하는 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 임금은 투쟁(계급)관계임을 알 수 있다. 임금을 자본의 관점에서 분석하느냐 혹은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하느냐에 따라 전략에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나 기술과 같은 개념을 포함한 모든 개념도 계급관계로 전환해서 투쟁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부르주아 이론가) 말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회과학 이론을 투쟁의 언어로 전환시킬 수 있으며 또 전환시켜야 한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도 가장 구체적인 계급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4)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
자본의 사회관계를 계급관계로 설명하더라도 노동계급을 단지 희생물로만 파악한다면 이는 자본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될 것이며 투쟁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진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은 인민을 노동시장으로 내몰고, 인민을 생산과정에 있는 자본을 위해 노동하도록 강요하고, 노동과정에서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만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성만을 심도 있게 간파할 따름이다. 여기에 그친다면 자본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자본의 동학만 설명하게 되어 자본의 자기 잘못을 지적해주는 자본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나 노동을 단지 희생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자본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한 경우가 많다. 특히 마르크스는 시초적 축적에 관한 분석에서, 농민들의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축출(자본론 1권, 27장)과 토지를 몰수당한 농민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전환하기 위한 유혈적 입법(자본론 1권, 28장)에 자본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러한 조치에 대해 저항한 투쟁에 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어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전략으로 사용하는데 부족한 점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노동계급을 희생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노동자의 투쟁보다 자본가의 음모에 편향된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 이들은 공장 독재, 문화적 지배, 그리고 노동계급의 도구화라는 자본의 기제에 몰두하여 진정 적대적인 주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할 정도이다. 제국주의 이론은 국가적인 자본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계를 점령하고, 분할하고, 재분할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종속이론은 개발과 저개발의 계층을 중심으로 자본의 세계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계체제 이론은 자본이 그들 자신의 전체성에 알맞게 이 세계를 만든 것으로 본다. 1980년대 우리 나라의 ‘신식민지 독점자본주의론’이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우리의 시선을 독점자본, 국가, 매판자본, 지주, 자본의 예속 등 자본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자본의 일방적인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는 단지 비도덕적이고, 무정부적이고, 음모적이고, 소외적인 것으로만 파악된다. 자본의 천박함과 혹독함을 계급투쟁에서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사용하더라도 자본에 모든 권능을 부여하는 이론은 단지 자본의 이익을 더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노동계급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의 힘에 편향된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들은 단지 억압에 대해 반항만 하고 혁명을 위해 그들은 지도력을 받아야만 하는 일종의 종속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격을 단편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파악, 그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가르쳐 줄 직업적인 혁명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프랑크프르트학파에서는 직업적 혁명가 대신에 전문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인식하는 유일한 주체는 자본가계급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거의 항상 자본의 발전의 하나의 파생물로 보고 있다. 자본주의 발전이란 일방적으로 자본가 사의의 경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5) 그래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노동계급에 의해서는 실현될 수 없고, 노동계급을 이끌어 줄 메시아나 아니면 자본의 내적 모순에 의해 자연히 붕괴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읽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계급은 자본의 맹공격 앞에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수동적이고 반사적인 희생물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그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규정하고, 그들 자신들을 위해 투쟁하고, 단순히 착취에 대항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 자신이 지도력을 갖고 계급투쟁에 공격적이며,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가 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의 계획에 순종하는 소극적인 객체가 아니라 생산의 적극적인 주체이며, 기술, 지식, 창의성, 협동의 보고이다. 노동계급의 힘은 자본주의 발전을 강요하기도 하고 또한 제약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이 기존의 기율, 지도력, 이론 등을 거부하고 새로운 생존형태를 추구하고 있는 가운데 누구에 의해서도 지배받을 수 없는 주체성, 독자성, 자율성을 발견할 수 있다.6)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투쟁의 관계에서 사회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생산의 동학과 로직을 제공해 준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이란 노동과 자본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두 적대적 주체들의 세계에서는 유일한 객관성은 그들의 갈등의 결과일 뿐이다. 물리학에서 두 벡터 힘이 그 둘과는 다른 방향과 양을 지닌 합성력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자본의 발전을 구성하는 계급투쟁에서도 ‘운동법칙’은 대결이 가져온 계획하지 않은 결과이다. 두 주체의 힘의 종합은 전적으로 개방적이어서 그 방향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 방향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투쟁관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직선적인 연속성이란 없으며, 적대를 지닌 각각의 결정적 순간과 서술의 각 도약마다 항상 새로운 서술들을 찾는 탐구 리듬 속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관점들의 다원성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결정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적 유물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을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를 포함한 전 우주의 보편적 철학체계로 확대하고자 시도했다. 이 세계관은 자본이 자체의 논리를 세계에 강제하는 경향을 이론화한 부르주아 철학의 낙관주의적 계기로 볼 수 있다.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에 의해 결국 모든 사회가 통과해야 하는 엄격하고 단선적인 생산양식의 진행으로 더욱 단순화된다. 생산관계에 의해 씌어진 사슬을 끊어 버리는 힘에 관한 마르크스의 말은 어느덧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의 영원한 변혁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노동계급의 고별은 운명론적이지 않고 계급간의 정치적 힘의 문제이다. 투쟁은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언어에서 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출현은 항상 ‘이행’의 문제로, 즉 사회주의를 통해 공산주의로 옮아가는 문제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유일한 이행은 혁명적 주체에 의해 자본이 지닌 모든 결정들을 거부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투쟁은 유토피아적인 접근법도 거부한다. 이행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미리 구상된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과소평가하기에 이를 거부해야 한다.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는 현재의 운동을 따라 미래로 나아가며 이러한 운동이 결정성이나 목적론 없이 일어난다. 미래를 구성할 현재의 중심적 운동은 자본의 결정을 전복하고 자기가치증식을 해 나가는 혁명적 주체의 운동이다. 혁명전략은 관념적인 비판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개발된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이 노동계급의 무력함(자본의 헤게모니)과 노동계급의 승리(혁명적 자본폐지) 사이의 인식상의 틈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의식고취’라는 영역으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 속에서 자라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계급의 자율성의 증대로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기반하지 않는 어떤 운동이나 사상도 진정한 노동해방으로 갈 수 없다. 노동계급의 자율적 힘을 인식할 때 탈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는 유일한 경로는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제하는 당이 관리하는 사회주의적 이행질서를 통해 가능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거부하게 된다.
노동계급의 적대감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적대감에서 읽는다는 것이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로서 규정하지 않고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 사회관계는 적대적 두 주체간의 힘의 관계이다. 이 적대는 자본주의적 생산 및 그것에 상응하는 사회질서가 지닌 해결할 수 없는 한계 및 과정의 동학에 대한 열쇠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계급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본을 흡혈귀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다. “자본은 죽어 있는 노동인데, 이 죽어 있는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자본론 1권, p. 296)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같은 적대감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기초로 하지 않은 노동계급의 전략은 자본의 전략과 그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조절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노동의 지배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주된 관심은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상대적으로 무시하면서 축적구조를 어떻게 잘 운영하는가에 두어져 있다. 노동과정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국가형태의 조절을 통해 축적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개혁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7)
1970년대 장기순환에 관한 논쟁에 참여한 만델이나 실버(B. Silver)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과 이윤율 하락의 경향의 법칙을 이론적 기반으로 자본주의 장기순환을 설명하였다.8) 그들은 자본의 축적과정이 동일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지 그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제안 속에서 자본의 위기는 해결의 기회로, 즉 자본주의 사회의 재건을 위한 기회로 등장한다.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인식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은 내용상 부르주아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론의 분석적 틀과 용어를 이용해서 경기순환을 분석했다는 점뿐이다. 모양은 마르크스주의지만 내용은 자본발전의 전략인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노동계급의 적대감에 대한 인식은 노동계급의 전략을 추구하는 밑바탕이 된다.
적대감을 철저히 인식할 때 자본론에서 변증법적 해석이나 개량주의로 해석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변증법이란 어떤 종류의 대립을 종합적인 통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자본이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자본이란 사회관계에 묶어두는 형식이다. 자본은 노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항상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관계 내에 묶어 두려고 한다.
자본의 확장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이지만, 대신 확정할 때마다 해결되어야 하는 적대적 관계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자본이 더욱 고도한 수준의 모순 및 적대로 나아가는 동력이다. 자본이 노동계급의 적대감을 자본주의 발전에 이용할 때, 자본은 변증법적 관계의 모순적 통일을 강요한다. 자본은 항상 개량주의적인 발전을 추구하며, 이 개량주의는 자본에 노동자측의 비판에 대항하는 보호물을 제공한다. 그러나 관계를 형식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관계가 지닌 본질적인 조건들을 피하는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이 적대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대의 토대를 이룬다. 자본은 파괴 이외의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계급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다른 계급을 파괴하고자 하는 계급을 특징짓는 것은 적대의 논리, 분리의 논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대한 적대의 논리, 분리의 논리 뿐이다.
노동계급의 이론 구성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지배의 기제를 감지하는 습관을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의 기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자본론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해방의 기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본론에서 자본에 대한 설명을 노동에 대한 설명으로 전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의 동학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많이 했으나 노동계급의 주체성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본론의 비판적 재해석을 통해 이러한 마르크스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가 있어왔다. 한 예로 ‘자본의 구성’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과 관련하여 노동계급의 주체성을 인식한 1960년 초기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계급구성’이란 개념을 개발하였다.9) 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의 기술적 구성, 가치구성, 유기적 구성이란 개념을 통제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통제 가능한 기계로 대체하려는 자본의 한 경향으로 이해하고, 이 개념을 산업생산과정에 있어서의 실질적 변화들과 그것들이 노동계급의 힘이라는 논점과 맺는 관계에 대한 더욱 깊고 더욱 세밀한 분석으로 이끌었다.
마르크스의 연구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서의 상승이 어떻게 상대적 잉여가치의 실현의 수단이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이들은 노동분할이라는 마르크스의 연구와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이러한 연구로 노동계급의 구성(계급구성:Class Composition, 정치적 재구성:Political Recomposition, 탈구성 혹은 구성의 와해:Decomposition)이란 개념을 이끌어 내었다. 자본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정적이고 수동적인 노동계급이란 의미에 대항하여, 계급구성(그리고 그것의 정치적 재구성)은 노동계급의 사회화 과정을, 그리고 투쟁 속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밑으로부터 나오는 노동계급의 적대적 경향의 확산, 통일 및 전면화를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목적에 맞게 노동계급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제공하여 축적을 보장해 주는데 알맞게 사회적 기술적 분할, 문화적 상황, 조직적 형태, 정치적 방향 등을 이용하여 노동계급을 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자본이 부과한 계급구성에 대항하여 이를 침식시킨다. 이러한 변화들을 성취하는 투쟁은 계급관계의 정치적 재구성을 야기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계급 내적 구조의 재구성이며, 그것이 계급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자본은 자신의 지배 메커니즘의 어떤 특정한 배치들의 이러한 극복(노동계급의 정치적 재구성)에 대응하여, 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구축되는 관계들을 ‘탈구성’하고 그 위에 어떤 새롭고 통제 가능한 계급구성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노동계급의 구성의 변화로 설명하였다. 자본의 순환적 형태의 발전과정을 ‘계급투쟁의 주기’로 분석하였다. 경기순환에서의 하강국면은 노동자들에 의한 정치적 재구성의 시기를 나타내며, 상승국면은 계급적 탈구성의 과정을 포함한다. 자본의 경기순환의 과정을 노동계급의 구성의 변화로 발전시키면서 자본의 이야기에서 노동의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더욱이 정치적 재구성 개념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이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을 이론적으로 명료화해 준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정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살펴 볼 수 있게 해주며 투쟁전략을 모색하는데 그 기초가 된다.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노동계급의 이론으로 발전시킨 또 다른 예로 노동계급의 ‘자기가치증식(Self-Valorization)’이란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의 자본의 가치증식이란 개념에서 노동계급의 이야기로 전환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삶을 노동의 일차원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항하는 투쟁과, 그리고 다측면적 존재를 위한 시공간을 창출하려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여기서 노동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그리고 가치척도로서의 노동시간의 처분가능한 시간으로의 대체를 환기시켰다 (자본론 1권 10장). 하지만 불행하게도, 노동에 반대하는 구체적 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의 상세한 연구는 이러한 투쟁에 의해 자유로워진 시간을 채우려는 노동자의 시도에 대한 그만큼 상세한 연구는 보충되지 않았다.10)
이러한 부족 분을 메우기 위해 네그리는 노동계급의 자기가치화라는 개념을 제시했다.11) 이 개념은 자본주의 권력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지배를 전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거부의 권력의 완전한 잠재력 및 표현을 파악하기 위해 빤지에리, 뜨론띠 등의 연구로부터 발전시킨 것이다.12) 이는 자본의 가치화(자본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생산적 활동을 종속시키고 변형시키고 활용하는 방식)에서 파생한 노동계급의 소외와 탈가치화를 인식하고 나서(여기까지는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자기가치화로 나아가는 계급관점의 역전이다. 그러므로 자기가치증식은 자본주의적 가치화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 노동계급의 자기구성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나아가는 자기규정적인, 자기결정적인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자본론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한 노동계급의 자기 활동성의 긍정적 내용을 다룰 수 있게 만들었다.
나오며
자본론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우리들은 현실문제에 대해 좀더 효율적인 노동계급의 전략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IMF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만약 자본에 초점을 맞춘다면 IMF위기는 단지 이윤율 하락의 경향, 규제장치의 한계, 전세계적인 자본의 경쟁 등의 기준에서 살펴 볼 것이다. 여기서 얻은 처방이란 어려운 상태에 처하게된 민중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자본의 재구조화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한국의 노동계급이 어떻게 이 위기로 몰고 왔는지, 자본은 이 위기를 자본의 발전으로 어떻게 전환하려고 하는지, 발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의 힘을 어떻게 탈구성하려고 하는지, 자본의 공격에 대해 노동계급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지, 노동계급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등 노동계급에 그 초점을 맞출 것이다.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유용한 무기를 제공하겠는가?
1) 대표적인 부르주아 이론가인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전략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의 계급간의 투쟁을 자본계급간의 갈등으로 전환하여 역사이론, 자본축적론, 위기론, 계급론 등에 걸친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을 자본주의 발전이론으로 전환하였다. 이상락, 정보시대의 노동전략: 슘페터 추종자의 자본 전략을 넘어서, 갈무리 출판사, 1999.
2) 이하의 자본론 인용은 다음 책을 따른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
3) 뜨론띠는 노동계급이 일하고 있는 ‘공장’은 사회 전체 즉 ‘사회라는 공장(Social Factory)’으로 보고 노동계급은 비공장노동자(학생, 주부, 농민 등)까지 포함하도록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Mario Tronti, "Social Capital," Telos, Fall, 1973, pp. 98-121.
4) Mario Tronti, "Workers and Capital," Telos, Winter, 1972, pp. 25-62.
5) 자본가계급간의 경쟁은 누가 노동에 대해 더 큰 통제력을 가지는가를 둘러싼 경쟁이기 때문에 이들간의 경쟁의 순 효과는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노동계급에 좀더 공격적인 ‘대자적 자본계급’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이것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와는 관계없이)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란 그들 사이의 단순한 격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Harry Cleaver, "Competition? or Cooperation?" Common Sense, No. 9, April 1990, pp. 20-22.
6) 자본에 대해 자율적이고, 노동자의 공식조직(노동조합이나 당)으로부터 자율적이며, 특정 노동자 집단이 다른 노동자 집단으로부터 자율적인(예를 들면 남성으로부터 여성), 노동계급의 자율적인 힘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전통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운동과 사상은 자율주의, 즉 영어로는 Autonomist Marxism, 이탈리아어로는 Autonomia로 알려져 있다.
7) Michel Aglietta, A Theory of Capitalist Regulation: The U.S. Experience, London: New Left Books, 1979. Alain Lipietz, Mirages and Miracle: The Crisis of Global Fordism, London: Verso, 1987.
8) E. Mandel, "Explaining Long Waves of Capitalist Development," in C. Freeman(ed.), Long Waves in the World Economy, ed.), Butterworths, 1983, pp. 195-201. B. Silver, "Class Struggle and Kondratieff Waves, 1870 to the Present," in Alfled Kleinknecht, Ernest Mandel and Immanuel Wallerstein(eds.), New Findings in Long-Wave Research, St. Martin's Press, 1992, pp. 279-96.
9) Sergio Bologna, "Class Composition and the Theory of the Party at the Origin of the Workers-Councils Movement," Telos 13, Fall, 1972, pp. 14-21. Raniero Panzieri, "The Capitalist Use of Machinery: Marx Versus the Objectivists," in Phil Stater(ed.), Outlines of a Critique of Technology, Atlantic Highlands, 1980.
10) 해리 클리버, 사빠띠스따: 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 이원영/서창현 옮김, 갈무리 출판사, 1998.
11) Antonio Negri, Marx Beyond Marx, Autonomedia, 1991, 윤수종 옮김, 맑스를 넘어선 맑스, 새길, 1995.
12) Raniero Panzieri, "Surplus Value and Planning: Notes on the Reading of Capital," in The Labour Process and Class Stragegies, CSE Pamphlet, no. 1, Stage 1, 1976. Mario Tronti, "Workers and Capital," Telos, Winter, 1972, pp. 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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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rtik
2005.06.2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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