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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정치 장애운동론’을 위하여
-‘인권의 정치’를 통한 자립생활운동의 전화(轉化)-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대표 김 도 현


0. 들어가며


현재 장애운동 내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이자 운동론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자립생활(IL: Independent Living)'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현재’,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사상이며, 혁명성을 지닌다.(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재활패러다임과의 거울 대당 속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많은 주장과 요구들은 일정한 상황 속에서, 즉 일정한 정세와 국면 안에서 진보적이지만 역사의 발전 속에서 곧 유효한 그 무엇이 되지 못하고 만다.(또한 역으로 정세와 분리된 진보적 요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선거권의 요구가 한 때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지배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 지금에는 더 이상 진보적인 무엇일 수 없는 것처럼, ‘호헌 철폐, 대통령 직선제 쟁취’라는 구호가 87년 거리에서는 혁명적인 무엇이었지만, 지금은 제기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그러한 이유로 어떠한 운동론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체계 내에 몇 가지 요구사항들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해방의 조건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의 대결을 통해 보다 과학적인 근거들을 배치하고 정치적 입장들을 정식화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이 글에서는 보다 쇄신된 장애인운동론으로서, 그리고 ‘인권의 정치’를 매개로한 자립생활운동의 전화된 형태로서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런데 왜 자립생활운동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했으며, 그것과의 단절이 아닌 전화를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이 자립생활운동의 의미와 요구들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 즉 시민권(인권)운동이라는 자립생활운동의 기본적 정체성에 대한 긍정과 그 정책적 요구들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그러한데, 왜냐하면 앞서 보편적인 선거권의 쟁취가, 군부독재타도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이 결코 무의미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멈춰서는 것, 그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만드는 비(非)사고와 공백이라 할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어떤 완결된 무엇이 아닌데, 그것은 우선 필자의 한정된 역량에 기인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권의 정치’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한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이 어떤 한정된 문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본적인 관점과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그 스스로도 구체적인 조건과 정세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가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으며,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함께 전진하자.



1. 시민권 운동으로서의 자립생활 운동


자립생활운동은 스스로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무엇보다도 시민권(Civil Rights)운동, 혹은 인권운동에서 찾는다. 즉 ‘장애인의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은 인권의 한 표현 혹은 시민권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는 개념체계라 정의되며, 자립생활운동의 역사는 1950년대와 60년대 중의 미국 흑인들 사이의 공민권운동으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다. 장애인의 공민권운동이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이 자신의 생활에 있어 동일한 공민권을 갖고 선택권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상에 그 철학적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자립생활을 정책적 분석의 패러다임으로 최초로 연구한 Gerben Dejong 역시 자립생활운동을 시민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장애인의 공민권 쟁취는 자립생활운동을 확산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민권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자립생활운동의 전화를 위해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권을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권리로 파악하느냐 하는데 있다.
오늘날 우리가 시민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프랑스혁명 통해 성립된 인권과 시민권을 그 기본 관념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인권의 관념은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봉쇄되어지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제출된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그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혁명적 언술과 내용들을 그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자립생활운동이 지닌 시민권운동의 경향을 인정하고, 그 스스로 보다 근본적인 방향으로 전화해 나가려고 할 때 ‘인권의 정치’의 관점에서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 전통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진보운동에서의 민중운동/시민운동의 이분법적 대당 속에서, 시민과 시민권은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변혁운동의 역사 안에서 이제까지 계급적 주체와 시민적 주체와 다른 어떤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계급과 시민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주체의 형성과정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가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시민의 영역에서 배제당한(혹은 스스로 배제시킨)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프랑스혁명 당시의 쟁점으로 되돌아가서 ‘시민성’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대중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주체로 다시 개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있어 ‘시민’이라는 범주에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시민성의 언어’와 ‘시민권’을 ‘노동자의 권리․민중의 권리’와 선험적으로 대치시키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분법적 틀을 해체하고 전자를 후자 속으로 각인시킬 수 있어야 하며, 오히려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전개 속에서 이제는 중심부 국가에서 조차 해체되고 배제되어지는 이러한 ‘시민권’이 어떠한 전략과 노선 속에서 쟁취되어 질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2. 시민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인권의 정치’와 평등-자유명제


인권의 정치란 권리의 보편화의 정치이며, 불평등과 압제에 대항하여 모든 가능한 형태로 봉기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컫는다.
인권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시 제기되었던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하 [권리선언])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권리선언]의 혁명적 언술의 핵심이 인간과 시민의 동일화, 평등과 자유의 동일화라는 이중의 동일화에 있다고 본다.


2-1. 인간과 시민의 동일화


인권의 정치는 [권리선언]의 내용이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제도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잠재적인(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인간의 권리’와, 실증적이며 제도화하여 있고 제한적이지만 그러나 실효성 있는 ‘시민의 권리’라는 구분의 통념을 깨고 그 둘이 어떤 편차도 어떤 차이도 없이 동일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또한 그것을 추구한다.


시민의 정의상 시민의 활동은 정치를 함축한다.(시민권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도, 그리고 현재적으로도 정치의 권리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시민’의 등식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긍정을 뜻한다. 자유로운 성인 남자에 한정되는 고대 그리스, 로마 도시국가의 시민성과 달리 [권리선언]은 보편적 시민성을 선언한다. ‘신분’으로서의 시민성이라는 관점이 시민성에 대한 무제한적인 관점으로 교체되는 것이다. 즉 제한되지 않은, 인간과 동일한 시민은 자신의 자연적 권리들 전체를 향유하며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실현한 사람, 다른 모든 사람과 평등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하여 [권리선언]이라는 이미 정치적인 행위의 계속인 인권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한계들로 접근하고 민주주의를 그 한계들로 접근시켜야 하며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그러한 한계들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의 권리들을 확장하고 그것들을 시민의 권리들로서 발명해내야 한다. 권리들을 ‘창조’하는 또는 권리들의 역사를 계속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이러한 작업은 기존 사회질서를 다시 문제삼는 것을 항상 전제하며, 따라서 이 작업은 봉기적인 행위를 전제한다. 민주주의의 한계들 위에서 새로운 권리들을 발명하거나 또는 그러한 한계들을 향하여 권리를 확장하는 가운데, 구성적 질서들을 형성하고 또 해체하는 대중적 역능이 발휘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2. 평등과 자유의 동일화(평등-자유명제)


인권의 정치는 [권리선언]이 평등이 자유와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또한 그것을 추구한다. 즉 자유와 평등, 각각의 외연이 필연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것,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같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의 역사적 조건들과 평등의 역사적 조건들은 정확히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자유명제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배제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강령, 즉 자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법적-정치적 차원의 것인데, 평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차원의 것이라는 관념, 평등의 실현은 본질적으로 재분배의 차원이므로 국가의 개입을 통과하는 반면 자유의 보존은 이러한 개입의 제한에 연관된다는 관념, 또한 자유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자유일 것이나 평등은 전적으로 집단적인 쟁취 목표일 것이라는 관념을 전복한다.
투쟁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 속에서 발견된 이 비가역적인 진리가 사실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는 상황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은, 평등과 자유는 필연적으로 함께 부정되기 때문이다. 즉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처벌하는 조건들의 예는 없고 또한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권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확대된 토대 위에서 시민성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는 부단한 작업을 요구한다. 시민성은 고정된 어떤 본질이 아니며, 시민성의 역사는 하나의 미완의 역사이다. 우리가 보편적 시민성을 이루어내는 것, 즉 평등-자유 명제에 부합하는 제도들을 구축하는 것은 사회적 투쟁에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2-3. 근대적 정치를 넘어선 새로운 시민성 :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


자유와 평등의 동일성은 역사적으로 직접적 동일성이 아니라 소유와 공동체를 매개로 하여 ‘자유-평등-소유’와 ‘자유-평등-공동체’라는 형태로 매개적 동일성을 형태를 띄어왔다.(즉 인간들은 소유자임으로해서, 그리고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조건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
이 매개들 각자는 근대 정치 안에서 경향적으로 둘로 분열되어, ‘노동의 소유’(노동에 의한 자기 자신의 영유, 생활 수단들의 영유)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와 ‘자본으로서의 소유’(화폐자본 또는 예컨데 기업가적 능력, 노하우와 같은 상징적 자본)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그리고 민족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와 인민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공산주의에까지 이르는 “근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그려진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 진영은 사적소유라는 하나의 소유형태 더하기 민족적 공동체라는 하나의 공동체 형태이며(자유주의 더하기 민족주의), 프롤레타리아 진영은 사회적 소유라는 하나의 소유 형태 더하기 인민적 공동체라는 하나의 공동체 형태이다.(사회주의 더하기 공산주의)
그런데 이러한 근대 정치 속에서 억압되어 온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학적 ‘모순들’ 또는 ‘분할들’이 있으며, 이러한 모순에는 기본적으로 성(性)차에 의한 분할과 지(知)차에 의한 분할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이러한 분할들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불평등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들 뒤에는 차이의 어떤 한 유형, 평등의 확립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의 유형이 있다. 여기에서도 평등이 해방의 형식적 조건이긴 하지만, 그러한 차이들은 자신들의 해방을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로서 즉 기원적 ‘동일성의 회복’으로서가 아니고, 또 권리의 평등 속에서 ‘차이의 중립화’로서가 아니라, 차이 자체인 어떤 평등의 생산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차이들이 평등-자유의 도식에 각인될 때, 성적 차이가 공동체의 확립과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면, 지적 차이는 소유의 확립과 특권적 관계를 맺게된다.



3.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의 기본적 내용


3-1. ‘인권의 정치’와 장애인문제


장애에 의한 분할이 ‘몸(body)’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인간학적 분할, 그리고 내재적 배제라고 할 때, 그리고 장애라는 분할이 이중적으로 즉, 한편으로는 정보의 취득양식과 소통의 양식으로 인해 간접적으로(청각장애와 시각장애 그리고 언어장애, 그리고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중증의 지체장애인까지), 또 한편으로는 정신지체, 자페와 같은 발달장애가 ‘근대적 이성’을 기준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지차에 의한 분할과 연결된다고 할 때, 장애라는 모순은 근대정치에 의해 억압되어온 인간학적 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유-평등-공동체, 자유-평등-소유의 도식에 있어 성적 차이가 공동체의 확립과 특권적 관계를 맺고, 지적 차이가 소유의 확립과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면, 장애에 의한 분할은 이 양자와 공히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고 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인간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공동체로부터 격리의 대상(심지어는 탄생이 억제되거나 유기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소유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그것이 ‘(근대적)노동’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신화와 연결되며, 소유로부터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즉 근대자본주의는 프롤레타이아트라는 계급 외에도 여성이라는 쇄신된-계급을,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쇄신된-계급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기에 장애라는 인간학적 분할에 근거한 모순의 해결은 근대적 정치 관념의 근본적인 개조가 수행되지 않고는 해결되기 어려우며, 또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근대적 자본주의공동체의 이행에 커다란 변혁적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에 제시되는 테제들은 평등-자유 명제에 기반하여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의 기본적인 정치윤리적 관점들을 시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3-2. 평등-자유명제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 장애운동론’의 기본적 테제들


<테제 0 : 선언>
* 우리는 요구한다. 장애인의 인권을,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권리를!
* 우리는 원한다. 우리의 몸을, 우리의 정신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이 사회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기를!
* 우리는 쟁취해야 한다. 장애라는 차이를 끊임없는 차별로 만들어내는 이 사회 속에서 진정한 평등을, 우리의 차이가 인정되는 평등을!



<테제1: 자유-평등의 상호적 동일성>
장애인에게 있어,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반되고 조절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다. 더 많은 자유가 있는 곳에 더 많은 평등이 있고, 더 많은 평등이 있는 곳에 더 많은 자유가 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말했다.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지만 평등도 소중하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평등을 위해 장애인의 자유가 조금 침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말했다. 평등을 원하는가? 그렇지만 자유도 중요하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해 장애인의 평등이 결과적으로 조금 제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가? 진정 그러한가?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일 뿐이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었다. 우리는 더 많은 인간의 자유가 있는 곳에 더 많은 인간의 평등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 많은 인간의 평등이 있는 곳에 더 많은 인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억압된 자유는 평등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평등은 더 많은 자유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 자본가들과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자들의 손에, 그들의 품안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비가역적인 사태가 진실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장애인을 포함한 인간의 자유가 억압되는 조건과 평등이 제한되는 조건은 정확히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배자들이 던져놓은 한정된 자유와 한정된 평등 안에서 제로섬(Zero Sum)게임을 강요받았다.
우리는 이제 그 조건을 깨부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테제2 : 자유-평등의 내재적 동일성>
장애인은 ‘장애’인 이기 이전에 무조건적인 인간이며, 무조건적인 시민이다.
장애인의 자유-평등 없이 인간의 자유-평등 없고, 인간의 자유-평등 없이 장애인의 자유-평등 없다.


우리는 장애인이다. 우리는 장애인이면서 실업자다. 우리는 장애인이면서 노동자이고 농민이다. 우리는 장애인이면서 여성이다. 우리는 장애인이면서 학생이다. 우리는 장애인이기에 종종 더 많이 병원에 가야했다.


우리는 실업자 문제 전반의 해결 없이 장애인 실업자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동자 전반의 착취가 폐절되는 일없이 장애인 노동자만의 착취가 폐절되는 것은, 여성 전반의 차별없이 장애여성만의 삶이 향상되는 것은, 전 민중에게 공공의 교육/의료 없이 장애인만의 교육권과 건강권이 나아지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았다.


이 비가역적인 사태가 진실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깃발에 ‘장애해방, 인간해방’이라고 새겨 넣었다.
이것은 장애해방 없이는 인간해방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보편적 인간해방이 장애해방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한다. 장애노동자로서 노동자의 투쟁에, 장애여성으로서 여성의 투쟁에, 장애학생으로서 그리고 장애를 가진 환자로서 공공의 교육과 공공의 의료를 위한 투쟁에, 인간으로서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에! 그럴 때 또한 우리는 당당히 제안한다. 우리의 투쟁에 당신들 또한 함께 해야한다고.



<테제3 : 삶의 권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
장애인과 인간의 삶의 권리에 대한 조건으로서, 의무를 내포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말했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의무를 수행하라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이라고.
자본가들이 우리에게 다시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노동’의 의무가 따른다고.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도 국민의 4대 의무중 노동의 의무가 있지 않느냐고.


진정 우리는 노동하려 하지 않았던가, 아니 우리는 지금 노동하지 않고 있는가?
‘노동’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위해‘ ’힘써 움직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단지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장소에서, 그들에게 이윤을 만들어주는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생명의 권리는, 삶의 권리는 그 어떤 의무도 조건으로 할 수 없다.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인된 특정한 방식으로 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 즉 그들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삶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해야하는 이유라면, 이제 우리는 그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테제4 : 인간과 시민의 이미 주어진, 그리고 상기된 권리>
장애인 주체는 장애인을 억압하는 정부-체제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효율성’의 논리에 입각해 작동한다. 이것이 생산의 영역에서 이야기될 때 생산성으로 나타나고 이것을 위한 기본적 수단이 바로 파괴적인 ‘경쟁’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가치는 아니지만 문제는 여러 가지 가치가 경쟁될 때 어느 것이 우선시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논리는 때때로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그 영향력이 감소되는 것 같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본질적인 영역을 침범 당하지 않는 범위에 한해서였으며,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기본적 논리가 침범 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유가 남는 만큼만’ 우리의 인권이 ‘보장되는’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부국가들, 소위 말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극소수의 중심부와 엄청난 주변부국가들로 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 목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그것이 더욱 강화되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이 비가역적인 사태가 진실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체제와 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저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국민(시민)에게 주권이 있다면, 하여 우리에게 주권이 있고 정부를 구성할 권리가 있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정부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와 정부를 구성할 권리가 이미 존재했고 실행되었던 것처럼(우리 사회는 그것을 위대한 시민의 승리라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권리가 이미 우리에게 존재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일 뿐이다.



<테제5 : 장애인당사자주의>
장애인의 해방은 장애인 자신의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인류가 자신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로 사회는 한번도 완전히 자유롭고, 완전히 평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 속에서 ‘피억압자 자신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왔으며, 그러한 투쟁의 역사가 사회를 발전시켜왔다.
근대자본주의체제는 노동력의 착취를 인간의 생존조건으로 강제하면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을, 몸의 차이에 따른 성적 역할의 분할로 여성이라는 쇄신된-계급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양자, 즉 노동력의 착취에 대한 배제, 몸의 차이에 대한 분할로서 또한 장애인이라는 쇄신된-계급을 만들어냈다.


피억압자들의 해방은, 피지배계급의 해방은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들어왔고 보아왔고, 또 보고 있다.
이것이 비가역적인 역사의 진실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며, 그 행동과 실천을 위해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
장애해방의 역능은 근본적으로 장애인 자신에게서 생성될 수 있을 뿐이다.



4. 글을 마치며


왜 자립생활운동이 일정한 전화를 통해 새로운 장애운동론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제안하는가. 앞서 자립생활운동이 지닌 현재의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非)사고 혹은 공백이 존재함을 이야기하였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자립생활운동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즉 자본주의세계체제에 대한 분석을 자신의 체계 내로 들여오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미국은 자립생활운동의 발전 속에서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일종의 ‘충격’이라고 여겨졌던 ADA(장애가 있는 미국인법)를 이미 1990년에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장애대중들은 왜 여전히 65-71%에 이르는 만성적인 실업률에 시달려야 하는가? ADA가 통과된 후에도 빈곤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구의 비율이 전혀 향상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제기될 수도 있다. 피억압계층을 일종의 ‘케인즈주의’를 통해 포섭해낼 수 있는 조건들이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중심부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신자유주의하에서 이러한 조건들이 중심부국가들 내에서조차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떠한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


어떤 면에서 이러한 질문은 자립생활운동의 체계 내에서 그 답변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흔히 자립생활운동은 체제 내적인 운동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정확하지 못하다. 기본적으로 자립생활운동은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집중 속에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장애인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문제에 대해 아직 사고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공백으로 인해 구체적인 ‘전략 노선’을 선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또한 자립생활운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장애인대중의 열망과 요구 속에서 구체화된 자립생활운동은 그 열망과 요구들을 온전히 실현시켜내기 위해 인권운동․시민권운동으로서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더욱 쇄신된 형태로 발전시켜내야 하며, 이제 앞서 제기된 질문들을 사고하고 대면하는 형태로의 전화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인권의정치 장애운동론’은 그러한 고민 속에서 제안되는 것이며, 그것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장애인대중의 지혜와 진보적 지성의 참여가 모아지는 가운데 풍부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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