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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최종심급에 관해서..

멍청이 2006.08.23 17:42 조회 수 : 1406

알튀세르에게 역사의 변화는 보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한 바와 같이 상부구조에 기계적으로 반영되는 경제적 토대에서의 발전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BASE AND SUPERSTRUCTURE 참조) 역사의 어느 순간은 오히려 꿈처럼 많은 힘들이 모인 장소이고 그중의 경제적인 힘은 오직 ‘최종 심급에서(in the last instance)’ 결정할 뿐이다. 경제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작동하는 범위를 한정하지만 이 모든 층위들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변화는 오직 역사상의 많은 힘들이 중복되는 작용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어쩌면 내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미에서) 약간 용감한 발언을 해본다면......

예전에 아포리아님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글을 올려주셨는데, 참 나로서는 대답이 망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글에서 찬성하는 것은 말년의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을 해체했다는 것까지다. 거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정치의 '또 다른 장면'을 사고하는 발리바르와 동일한 방식이었는지는 나에게 의문으로 남는다. 내가 보기에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을 해체한 것은 맞지만, 그는 최종심급을 어떤 정세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즉 일종의 '지배적 심급'으로 사고함으로써 그렇게 했을 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는 최종심급 뿐만 아니라 '토대'라는 개념 자체가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게 있어서 최종심급이 해체되는 것은 토대라는 개념의 해체를 동반한다기 보다는 '토대가 둘이다'(경제와 이데올로기)라는 사고로 나아감으로써이다. 즉 최종심급은 해체되지만 '토대' 개념은 해체되기는 커녕 오히려 강조된다. 따라서 양자 사이엔 미묘하지만 차이가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가 최종심급의 딜레마를 정확히 '해결해 냈는가'가 나에게 요즘 약간 의문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건 아직 느낌에 불과하고 심지어 부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말년의 알튀세르는 위험스러울만치 푸코와 가깝게 보이고 따라서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보인다. 즉 그의 우발성의 유물론은 푸코의 계보학(기원이 아니라 '시작'에 동반된 수많은 우연성들과 사건을 강조하고 그것이, 혹은 차라리 오류가, 응고되어 진리가 생산된다고 말하는)과 너무 유사하다(발리바르는 푸코의 입장을 '저항의 우연적 생성'의 사고라고 요약했다). 양자 모두는 또한 폭력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고 그것으로 인해 실천적으로 이론적으로 고통 받았는데,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를 명실상부한 '토대'로 인정하고 그리하여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문제를 이론적인 대상으로 제대로 문제제기함으로써 두 선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씨빌리테의 사고는 푸코뿐 아니라 알튀세르에게서도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발본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가설적이지만, 관련해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초기에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을 논했을 때, 그것은 말하자면 어떤 특정한 '정세'에서 어떤 심급이 '지배적 심급'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정세 외부에 위치한 원인, 즉 '초정세'적인 것으로 이론화되고 있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잘못된 독해다. 왜냐하면 정확히 알튀세르는 이렇게 최종심급을 정세 외부의(극장 바깥의)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것을 헤겔적 관념론의 핵심(표현적 총체성)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최종심급 개념을 이에 대립시켜 내재적인 '구조적 인과율' 개념을 통해 개념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absent present cause라는 저 이율배반적인 '한계개념'이 표현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하지만, 이를 각도를 달리하여 읽는다면, 최종심급은 구조가 정세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종심급이 구조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것에 의한 모든 것의 결정이라는 무결정 속으로 정세가 흩어지지 않도록 정세 내에 '구조의 존재'를 보장한다. 그러니까 최종심급은 구조의 핵심이며, 그러한 한에서 구조는 정세에 대해 순수하게 내적이지도 순수하게 외적이지도 않은 위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여전히 너무 "묘사적"이지 않은가? 정세와 구조가 정확히 어떻게 '내재적'인 관계를 맺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absent present cause라는 말은 여전히 두 대립하는 항들 사이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후기 알튀세르가 그렇게 하듯, 최종심급을 아예 지배적 심급과 동일시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는 정확히 '구조'를 버리고 '정세'를 택한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어떤 심급이 어떤 정세에서 왜 지배적이 되는가는 이제 최종심급이 아니라, 따라서 구조가 아니라, 정확히 '우발성'에 의해 설명된다(혹은 바로 그렇게 ... 설명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정세'이며 사건의 물질성들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구조(응고된 세계)는 정세(마주침)의 효과다라고 말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것을 여전히 '구조'라고 불러야 하는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원칙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되는 것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구조적 인과율'과 관련이 없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알튀세르의 마지막 논의가 너무 포스트 구조주의적으로 보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반면, 발리바르의 '두 개의 토대론'은 '토대'를,따라서 구조(에 의한 결정)를 전혀 포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구조의 복수적 기원들 혹은 단적으로 구조들 '사이에' (따라서 구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정확히 정세를 삽입한다. 구조를 포기하는 식이 아니라, 반대로 구조의 '이원성'을 발본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정세가, 즉 우발성이, 구조 개념의 한복판에 삽입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조와 정세를 진정으로 내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구조적 원인이 두 개이므로, 그리고 그 두 원인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인과관계도 있지 않지만 하나는 다른 하나를 통해서만 작동하므로, 둘 사이엔 단순 결정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항상적인 '과잉결정'이 있다. 정세는 바로 이 '과잉결정'에 주어진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오해가 없기를. 발리바르에게도 여전히 '우발성'이 문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우발성'은 알튀세르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그 '우발성'과는 성격이 다르다).

/최원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최근 해석중 가장 영향력있는 것으로 알튀세의 해석이 있다. 알튀세는 경제의 우위성에 대하여 비환원주의적 해석을 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맑스에 대한 환원주의적 해석이 사회를 '유기적으로 서열화된 전체'로 보지 않고 '표출적 총체(expressive totality)'로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알튀세는 표현적 총체성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에 대한 '복잡한 구조적 통일체'개념을 제시하는데, 이 개념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은 단순히 어떤 중심적 모순을 반영하지만은 않는다. 각각의 사회적 관계들은 고유한 발전의 순서와 하나의 중심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내적 갈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사회의 나머지 부분을 단순히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역사적 순간도 총체성의 각 관계들의 영향에 의해 중층결정된다.

알튀세에게 있어 생산양식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로도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알튀세는 전체의 각 관계들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지만 최종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에 의한 결정은 경제가 어떤 가능한 심급이나 관계가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의미와, 어떤 사회적 관계가 전체속에서 지배적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경제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알튀세의 사회적 총체성개념은 각 사회적 관계들이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 것을 인정하지만 각각이 독립적이라는 것은 부인한다. 각 사회적 관계의 effectivity는 최종심급에서는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속의 상호의존적인 형태, 전체와의 연관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알튀세의 '구조적 인과성'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반대가 있다. 첫째, 구조적 인과성은 실제적으로 결정이 형태(a form of determination)가 아니며 따라서 이것이 최종심급에서 경제가 결정력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또한 생산관계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존재조건을 자동적으로 생산할 수 없다. 둘째, 이러한 주장은 경제와 정치·이데올로기를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튀세는 자본주의 경제를 재생산하기 위한 특정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실행과 법적 관계사이의 분석에서 경제와 다른 사회적 관계들간의 분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거기에서 상부구조는 생산관계속에 특정한 방법으로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가 문제가 되지 않게 하려면, 토대와 상부구조를 그것의 기능에 따라서 재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남은 일은 토대의 구성부분을 형성하지 않는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요소에 대한 광범위하게 정의된 생산관계의 우위성 주장을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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