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좌파의 새로운 싸움
시 타
'연대'라는 화두가 모든 사회변혁적 운동가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여성이나 노동자와 같은 집단의 단일 범주화를 뛰어넘는 현실에 맞닥뜨릴 때마다, 언제나 우리는 힘주어 연대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처럼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고 쉽게 가정되는 연대의 원리가 이제까지의 현실 속에서 과연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일단 멈춤, 여기서 돌아가시오!"라는 현실의 표지판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 돌아서지는 않았던가?
여성운동과 좌파의 연대라는 문제 역시 동일한 지점에 발이 묶여 있는 듯 하다. 한국사회에서 독자적 여성운동이 세력화하기 시작했던 80년대 중 후반 이후 여성운동과 좌파운동의 연대를 주장하는 글은 수도 없이 쓰여졌지만, 대개 당위적 주장에 그치거나 한 두개의 특정 이슈에 대한 기계적 협동(?)을 이끌어 내는 데 그쳤다. 좌파, 특히 노동운동은 '인간해방'의 깃발 아래 여성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려 했으나, 맑스주의라는 이념과 운동의 조직화 원리는 기대만큼 유연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운동이 좌파에 대해 가져왔던 감정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한편으로는 80년대 민주화투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낳은 '전체운동에의 단결 복무'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는 가운데 공동의 모순 / 공동의 억압을 강조하는 집단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일정정도 '그래도 좌파는 우리 편'이라거나 '그래도 운동권은 뭔가 낫겠지' 하는 식의 상상적 동일시를 포함한다. 반면 90년대 이후 여성문제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젊은' 여성운동가들은 좌파의 진보성은 일면적일 뿐이며 그들 또한 가부장제를 체화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쉽사리 변하지 않는 '가부장적 운동권 문화'야 말로 좌파의 여성해방에 대한 동의가 한낱 제스쳐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두 흐름 모두 여성운동 자체를 전체운동으로 확장하기보다는 여성문제의 특수성을 주장하고 '고유 영역을 방어'하는 방향으로 경도되어 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연대'라는 것이 가능할까? 회의적이다.
(좌파에 의해) 여성억압이 '자본주의적 모순'의 특수형태로 한정될 때, 여성주의가 맑스주의의 한 하위 변종으로 치부될 때, 여성운동이 전체 운동의 흐름을 거스르고 단결을 훼방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연대는 불가능하다. (여성운동가들에 의해) 계급의 문제가 성의 문제와 분리된 것으로 남겨질 때, 좌파의 모든 문화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뭉뚱그려질 때, 체제 변혁의 문제를 언제까지나 미래로 연기할 때 역시 연대의 가능성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진정 연대를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와 좌파 이념 모두의 근원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며, 그러한 이념적 재구성은 반드시 구체적 이슈와 구체적 분석, 그리고 구체적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당연한 말을 다시금 강조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실업'이라는 문제는, (그것이 여성주의와 좌파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의 구체성을 지닐 수 있는 적절한 주제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실업'이라는 이슈 속에서 춤추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밝히는 작업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여성실업의 현황을 밝히고 그 심각성을 주장하는 논문들은 지난 해 여러 공간을 통해 수없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여성실업의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실업의 현황에 대한 통계지표를 단순히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료에서 무엇을 포착해야 하는지, 어떤 비판이 필요한지, 그리고 고민해야할 대안들은 어느 방향에 놓여 있는지를 토론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소 높은 추상수위에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일관되게 가부장제와 결탁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여성실업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유포되는가? 신자유주의에 내재한 가부장제의 면면은 어떠한가? 무성적인(sex-blind) 맑스주의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이슈들을 외면해왔는가?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에 비하여 턱없이 안일해 보이는 좌파의 대응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글이 다룰 주제는 이런 것들이다.
이른바 'IMF 시대'라고 말해지는 밥그릇 지키기의 아수라장은 모든 진보의 속도를 늦추고 운동의 성과들을 무화(無化)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뒷걸음치고 있다고 해서 운동 역시 과거의 담론,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야만적인 상황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 태어나듯이, 지금의 열악한 상황은 오히려 좌파의 이념을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운동을 혁신할 수 있는 다시 오지 않는 기회로 될 수 있다.
여성, 백발백중의 과녁
소위 공적 경제 영역 내에서, 현재 여성들은 노조 조직률이 채 10%에도 못미치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칼날 아래 고스란히 내맡겨져 있다. '여성은 정리해고 1순위'라는 말은 이제 식상한 관용어구가 된지 오래이다. 여성실업문제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한 성차별적 해고 및 급속한 비정규직화(化)의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임금제 논리에 의한 비경제활동인구화 경향이다.
현재 사무직이나 전문직, 생산직을 막론하고 한 업종에서 전문성을 갖고 종사해온 수많은 여성들이 장기근속여성이기 때문에, 생계책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혼여직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사내커플, 맞벌이부부, 임신 출산휴가 중이기 때문에,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해고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해고 이유'들은 가부장제적 성별분업논리--남자는 바깥일을,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순리이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차별적'이다. 여성민우회,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등의 고용평등상담 창구에는 그러한 이유로 부당 해고당한 여성들의 사례가 폭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례들은 대부분 부당배치전환, 대기발령, 임금체불, 비정규직으로의 전환 등을 강요한 후 해고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규직 여성 퇴직률이 남성의 2배 가량이 이르고 있고 특히 대리-과장급의 경우 남성 퇴직률은 9.0%에 그쳤는데 반해 여성은 24.7%나 된다. 이렇게 짤린 여성들의 일부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재고용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 고용불안, 초과착취, 열악한 노동환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성차별적 해고 논리가 작동한다. 즉, 비정규직에서 또한 여성 우선 해고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 남성을 중심으로 인력구조를 개편하려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이미 임시직이나 촉탁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나 영세업체 등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집단해고의 철퇴를 맞았다. 특히 나이 많은 4-50대 여성가장의 경우 보통 일용직, 임시직 등의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짐작하듯이 이들은 기업의 경비절감을 겨냥한 정리해고 대상 1순위이다. 게다가, 그나마 간신히 일자리를 지킨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지난 10여년 간의 한국여성운동이 이루어낸 운동의 성과들--임신/출산 휴가, 유급생리휴가, 탁아소 시설 확보 등--이 철회된 잔인한 초과착취의 작업장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같은 대량해고는 현재 남녀를 불문하고 한국사회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해고 이후 재취업률이 지극히 낮다는 점을 볼 때 남성노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 위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는 실업자의 비경제활동인구화, 그리고 신규 실업자 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는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구조조정의 내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실업자의 비경제활동인구화를 위해서는 남성보다 여성을 퇴출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이며, 실제로 현실은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남성보다는 여성들을 해고하는 것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가족구성원의 수를 줄이고, 결과적으로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 더하여, 여성들의 경우 구직 단념의 가능성이 남성에 비해 높다고 믿기 때문에 여성들이 우선 퇴출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실업률의 수치를 낮추는 것에 주요한 정책적 관심을 두고 있는 정부는 이러한 성차별적 해고 관행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실업률 낮추기'에 가장 손쉽게 이용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은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사회의 '안전망'이자 '충격흡수층'으로서 기능하도록 기대된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이러한 정부/자본의 기대에 정확히 부합한다. 즉, 남성의 재취업률이 17.8%인데 비해 여성의 재취업률은 1.4%에 불과해, 한번 노동시장에서 추방당한 여성노동자가 다시 '착취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실업대책은 수미일관 남성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짜여져 왔으며, 이는 여성이 재취업을 포기하고 자연(!)의 명령에 따라 그녀들을 위해 마련된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조장한다.
그러면 이렇게 '가정으로 쫓겨난' 여성노동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많은 남성들이 상상하듯이, 그녀들은 이제 피를 말리는 경쟁의 전쟁터에서 빠져 나와 안락한 일상(아이고, 고마우셔라!)을 누리게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쪽에서는 IMF시대에 들어선 이후 가장이 실직됐거나 실직될 것을 우려하는 전업주부들이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이들에게 '남성=생계부양자'라는 가족임금제의 논리는 100%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으로 한 사람의 임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원래 자본과 국가가 제공했어야 할 다양한 사회복지 기능이 가정에 떠넘겨지면서, 가정의 책임자로 규정된 여성들에게 이중의 부담을 지우고 있다. 가령 가족 중에 노약자나 어린아이, 혹은 환자가 있을 경우 이전보다 줄어든 생활비로 인하여 양로원, 탁아소, 병원 등의 사회적 유료시설을 이용하기보다는 가족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현저히 증가하게 되는데, 이때 이러한 보살핌 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주부/여성들이 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가족의존도의 증가! 이는 나이와 계층을 막론하고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현실이다. "남편 기살리기", "아빠 힘내세요" 등의 온정주의적 캠페인에서 드러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강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이러한 현실은, 호황기에는 '노동자'로, 불황기에는 '여성'으로 그녀들을 호명해왔던 가부장적 자본주의 역사의 진부한 반복일 따름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행복한 결혼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첫번째 질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여성실업문제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정당화되고 재생산되는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성별분업논리, 가족임금제, 생산노동/재생산노동의 분리, 가사노동에 대한 폄하와 은폐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역사적 성별체계로서의 가부장제와 역사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결합해 만들어낸 사회적 구성물들인데,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에서 보다 노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선 성별분업논리는 가부장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이다. 생물학적 성차(여성/남성: female/male)를 사회적 젠더(gender: woman/man)로 만드는 가부장제의 오래된 제도들은 여성성/남성성을 사회적으로 구성하고 강제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의 능력에는 선천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각자에게 '적합한 일'이 존재한다"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낳는다--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시/공간을 (거의) 초월하여 천편일률적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여성의 고유한 영역은 가정이며 여성의 능력은 가사노동이나 보살핌노동에 적합하다는 관념은 성별분업논리의 현대적 표현이다.
이러한 성별분업논리는 곧바로 '가족임금제'에 복무한다. 가족임금제란 무엇인가? 여기서 잠시 하이디 하트만(Heidi Hartmann)의 논의를 인용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여 임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은 기존의 가부장적 권위관계를 침식하였다. 여성은 '값싼 경쟁자'일 뿐만 아니라, 바로 남성노동자들의 '아내'였던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이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동등한 임금을 받고 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남성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통한 보호를 주장했고, 여성과 아동에게는 노동보호법 제정을 주장했다. 이는 많은 '남성' 직업에서 성인여성이 참가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남성노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임금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가족임금을 요구하고, 그들의 아내가 가정에서 봉사하면서 남아있기를 원했다. 가족임금은 그 당시 (여성 노동력에 대한) 가부장적인 이해와 자본주의적 이해 사이의 갈등의 해결책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족과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은 한편으로는 자본에게 양질의 노동력을 재생산해주고, 남성에게는 그들의 특권을 행사할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양자를 각기 충족시켜주었다. 남성은 노동시장에서 여성보다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고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으며, 집에서는 가사노동/자녀양육을 떠넘기고 다양한 무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가족임금은 남성우위의 물적 기초를 보장했다.
하이디 하트만은 이처럼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족임금이 사회적 규범이 되어 가는 과정을 "자본의 가부장제에 대한 사회적 적응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고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가족임금제의 논리가 안착화되어 왔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성차별적 해고의 근거로서 가장 강력하게 활용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족임금제'이다. 가족임금제 논리는 여성을 기본적으로 '결혼하는 존재', '아버지/남편에 의해 부양받는 존재'로 전제한다. 고용 불평등, 승진 불평등, 여성우선해고, 차별임금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배제 전략은 이러한 보수적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및 가족임금제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여성운동단체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해왔다. 첫째, 가족임금제가 가정하고 있는 '1가구 1 생계부양자' 모델은 비현실적이며, '단일 생계부양자 = 남성'이라는 모델은 더더욱 그러하다. 둘째, 이러한 논리는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쉼 없이 일하는 여성들(주부?)의 노동을 완전히 비가시화하고 있다. 임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 그러나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가사노동으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여성들, 이들이 과연 한 명의 남성 생계부양자에 의해 '편안히 부양받으며' 살고 있는가? 이들이 매일매일 뼈빠지게 수행하는 '노동'들은 정말 아무런 '사회적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가? IMF 경제위기 속에서, 무임금 무휴가의 평생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전업주부들의 가사노동에 관한 이야기는 재차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 가부장제와 역사적 자본주의의 '행복한 결혼'은 여성 노동자들(모든 여성은 노동한다)을 공적 '경제 영역'에서 담론적으로/실질적으로 배제시킨다. 그들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여성에게는 여성에게 적합한 일(가사노동)이 있으며, 따라서 그녀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다. 어려운 시기에 생계부양자(남성노동자)가 짤리는 것보다는 피부양자(여성노동자)가 짤리는 것이 나으므로, 이제 성차별적 해고를 감내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라!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1가구 1 생계부양자'라는 가족임금제 모델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그 논리는 (남성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시키기보다는) 여성들을 해고하고 다시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하려는 자본의 요구에 복무한다. 이제 여성들은 이제까지 수행하던 가사노동에 더하여, 비정규직 노동과 각종 사회복지적 요구까지 담당해야만 한다.
남성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라고 주장되는 '신자유주의'는 명백히 남성편향적인 것으로 보인다. 앨슨(D. Elson)은 국민총생산, 수출, 수입, 국제수지, 효율성, 생산성 등 외관상 젠더 중립적으로 보이는 경제 용어 이면에 감추어진 심층적 남성편향을 폭로함으로써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의 근간이 되는 개념적 틀에는 세 가지 종류의 중요한 남성 편향이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정책들은 기본적으로 성별분업에 있어서의 남성편향을 무시/은폐한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여성차별 및 이중 착취는 눈앞에서 사라지며, 오직 동질화된 존재로서의 '노동자' 일반만이 남게 된다. 그 결과, (현재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구조조정은 여성이 이미 하고 있는 유급 및 무급노동에 새로운 종류의 유급/무급 노동을 부가함으로써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노동력의 재생산 및 유지 과정에 필요한 무급노동에 대한 철저한 무시에 바탕하고 있다. 육아, 연료 수집, 급수, 식품 가공, 식사 준비, 집안 청소, 병자 간호, 가계 관리 등은 '경제'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들은 대개 여성이 해야하는 일들이다. '필수적인 재생산노동'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성의 무급노동을 무한히 탄력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성의 재생산노동은 그것이 '무급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거시경제학에서는 영원히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구조조정'이 가져다주리라고 기대되는 '효율성의 증진', '생산성의 증대'가 왜/어떻게 여성 민중들의 삶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마지막으로 가계를 거시경제의 기본단위로 간주함으로써 가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원의 배분 및 불평등을 은폐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장 우리가 속해 있는 가족의 경우만 돌아보더라도 이러한 불평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편의 생활 수준보다 아내의 생활 수준이 낮으며, 소년들의 생활 수준보다 소녀들의 생활 수준이 더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가계 관리'의 책임, 즉 가족 구성원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책임은 여성에게 지워진다. 가계의 소득이 감소하고 물가가 상승할 때, 생존 전략을 고안하여 그에 대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성인 것이다. 앨슨이 압축적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근저에는 다양한 층위의 '남성편향' - 따라서 성차별이 내재되어 있으며, 앞에서 비판한 여성실업의 구조적 문제점들 역시 동일한 맥락에 위치해 있다.
여성주의가 제기하는 비판들이 왜 현재 진보진영의 핵심적 비판지점이 되어야 하는가?
따라서 경제위기 상황의 이데올로기적/실제적 차원--물론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움직인다--모두에 관통하고 있는 가부장적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이 절박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이 (속으로) 질문할지도 모른다. "왜 지금/여기에서 여성문제인가? 여성실업문제가 심각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남성?) 노동자들의 실업문제보다 '더' 심각하거나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혹은 보다 솔직하게, "여성문제, 여성실업문제는 이미 여성운동단체들이 충분히 하고 있지 않은가? 좌파는 특수한 문제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해 일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이 글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여성실업문제는 여성노동자들/여성운동단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에 무리 없이 흡수 포괄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여성운동과 좌파의 상호침투 및 재구성을 통해 좌파의 핵심적 비판 지점으로 재위치되어야 한다. 왜인가?
여성실업문제는 반(反)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한 핵심적 이슈들을 담고 있다. 성차별적 우선 해고 및 가정 내에서의 노동일 증가/노동강도 강화라는 현상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능력' 과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적 관념이다. 가령 성차별적 해고가 내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숙고해 보자. 여성이 공적인 업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가부장제의 오래된 관념은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능력'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어차피 정리해고가 필요하다면 우선 해고되어도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이런 구조조정과정을 거치고 나면 생산성이 증가하여 경기가 회복되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우리를 꼬신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보자. 여기서의 '능력'이란 어떤 기준에서 판단되는 것인가? 구조조정을 통해 이루어지리라고 선전되는 '생산성의 증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효율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들 모두는 (구체적 수준에서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유지/재생산하는 핵심적 기초들이다.
여성의 능력이 '선천적으로' (공적 노동이 아니라) 가사노동에 적합하다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라는 좌파의 철학적 신념에 배치된다. 또한 어떤 여성노동자의 능력이 어떤 남성노동자의 능력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해고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적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업무의 비효율성', '기업의 비용 상승'으로 취급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필요'를 결코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무능력을 눈감아주는 것이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능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이 자본의 기준일 뿐더러, 설사 '정당한 기준'이 존재하고 그 기준에 의거하더라도 능력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모두는 시장 자체가 사실상 남성에게 유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남성=임노동, 여성=가사노동'이라는 공식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할 때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 공고화된 공/사의 분리는 재생산될 것이다. 가사노동이라는 말 속에 포괄되는 재생산노동 일반을 폄하하고 은폐하는 것은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전형적 전략이며, 특히 무급 가사노동은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절대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과거에 나와 당신의 어머니가 수행했고, 앞으로 나 혹은 당신의 아내가 수행할 가사노동을 '자연적인 것', '주어진 것'으로 사고할 때 비판의 칼은 이미 자본주의로부터 구입한 두터운 칼집 속에 고이 잠들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20여년 전에 하이디 하트만이 지적한 대로) 좌파가 성별분업논리와 가부장적 성차별주의를 공격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기초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현재의 여성실업문제를 단순히 '자본-임노동'의 관계로 파악해왔던 이제까지의 좌파 정치는, 싸워야 할 적(敵)의 놀라운 복합성/역동성에 비해 지나치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비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은 좌파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우선 현 상황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상당부분은 좌파의 이념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이 필연적으로 능력주의를 거부하고 생산성의 재개념화 / 효율성의 재개념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직까지 예각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성의 임신과 출산, 육아를 비롯한 다양한 가사노동들이 '사회적 필요'라는 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필요'의 논리로서 '이윤'의 논리를 대체하고 자본의 거대한 사회적 무능력을 폭로하는 가장 훌륭한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들에서, 여성운동과 좌파는 동일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대안적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유용한 단초들을 제공한다는 것이 여성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유의미성이다. 맑스주의가 꿈꾸어 온 '노동 해방의 세상'의 한계는, 그것이 실재하는 성적 차별 및 성적 차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여기서,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여성도 해방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다시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성주의는 인간 일반, 노동자 일반이라는 관념에 여성/남성이라는 또 다른 구체성을 결합한다. '노동'은 (현재에 있어서) 여성의 재생산노동과 남성의 생산노동(임노동)으로 각각 구분되어 사고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정의되고 구체화된 노동 개념은 '해방'을 위한 방법론 전체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지 못했는가?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
행복한 꿈을 현실화하기 위한 가능한 대안을 사고하기 전에, 우리는 잠시 이제까지의 운동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기로 하자. 이는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무성적인(sex-blind) 맑스주의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이슈들을 외면해왔는가?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에 비하여 턱없이 안일해 보이는 좌파의 대응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련된 것이다.
1) 그들만의 조직, 노동조합
98년 8월 23일,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는 구내식당에 근무하는 277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정리 해고 대상이었던 복지 후생팀의 여성조합원의 평균 연령은 47세로, 1998년 8월 현재 이들의 70% 정도가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경우, 정리해고의 원래 목적인 잉여인력의 감축인 잉여인력이 전혀 아닌 여성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해고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당노동행위라고 할 수 있으나 노동조합, 여당, 정부 그 어느 쪽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타협은 노/사/당/정의 합의에 의한 여성 우선 해고의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이하 기협중앙회) 이사회는 98년 6월 25일 전체 임직원 380명 가운데 1백여 명 가량을 정리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확정하였다. 이 안의 주요 내용은 여직원이 99%를 차지하는 서무 직종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명백한 위장 직종폐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여성 우선 정리해고에 대해 노동조합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여성 조합원들의 시위나 집단적 행동에 노동조합의 상층 집행부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노동조합 집행부의 여성조합원에 대한 일련의 태도와 행동은 결과적으로 사측의 정리해고를 도와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한국여성민우회 등의 여성단체에는 부당 해고에 관련된 상담이 폭주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고 그 현황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한국여성민우회가 재직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는 이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노조가 있었던 경우는 31.6%, 노조가 없는 경우는 24.4%가 성차별적인 해고가 있었다고 응답했다. 결국 현실은 노조가 있다는 것이 성차별적 해고의 방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경험적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 내부에도 역시 가부장제의 논리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 즉 성별분업논리를 승인함으로써 가족임금제를 고수해 왔다는 사실이다.
2) 좌파의 가부장성
비단 현장의 노동조합만이 문제가 아니다. 넓은 의미의 좌파 지식인들 / 운동가들의 담론/실천에도 똑같은 맥락의 남성편향이 존재한다.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과 실업의 만성화라는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서 여성실업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나 관심도는 극히 낮다. 대개의 경우 이 문제를 '전체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라던가 '파견근로제의 문제점' 등과 같은 거시적이고 전체론적인 맥락에서 하나의 사례로서 언급하고 있을 뿐, 가족임금제나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등과 같은 여성실업의 구조적/이데올로기적 맥락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부재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며,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대다수의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를 '여성운동단체들 만의 이슈'로 사고하거나 맑스주의 계급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바이다. 따라서 이들 좌파가 제기하고 고민하는 대안들도 일정한 한계 속에 머무르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서 드러나는 무성적(sex-blind) 성격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대다수의 좌파에게 있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현실적 유토피아'인 것 같다. 고실업의 상황에서 추가적인 실업 방지와 이미 실업 상태에 있는 인구를 새로이 고용하는 방안의 핵심으로써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행해지고 있다. 고용창출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 노동시간의 축소에 따른 일자리 창출이 좌파 모두의 가장 '현실적인' 슬로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은 사회구성원들간에 노동권의 평등한 분배라는 측면 뿐 아니라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간의 관계를 재규정하고 성별 분업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서도 진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현재 하루 8시간,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모델은 여성(전업주부)의 재생산활동(가사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전반적인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계속해서 재생산책임이 여성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 결과의 수혜가 남성에게만 분배된다면, 또 다시 여성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발표된 노동시간단축에 대한 어떤 논문에도 성별의 문제 및 재생산노동의 문제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먼저, 현재 연구자들에 의한 시간 분류는 노동 시간, 여가 시간, 필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러한 시간 모델은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분석틀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가사노동'과 같은 여성의 활동은, 그것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대단히 강도 높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위의 분류 중 어느 곳에도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시간/여가시간/필수시간'이라는 구분 자체가, 일상적 재생산 활동 등과 같은 여성의 경험을 배제하고 있는 다분히 남성적 시각에서의 시간 분류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시간 구조에서, 재생산역할로부터 면제된 남성과 재생산책임을 홀로 전담하고 있는 여성이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와 '단축된 노동시간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대로라면 단축된 노동시간이 창출한 '새로운 일자리'는--그 최상의 경우라 할지라도--남성 노동자에게만 돌아갈 뿐, 무차별적으로 쫓겨나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을 것이다. 또, 노동시간 단축이 '여가시간'을 늘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별 분업의 완화'나 '재생산책임의 공유'라는 '모두의 전진'으로 가기보다는, 남성 노동자들의 생산성(경쟁력?) 향상을 위한 재충전과 재교육을 위해 쓰이도록 (자본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술한 바와 같은 전반적인 가부장성으로 인하여, 이제까지의 좌파는 여성실업의 독특한 차원들을 분석하고 그에 공세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차별적 해고를 비롯한 다양한 현실적 사안들에 대해서 노동운동이 튼튼하고도 분화된 방어막을 치지 않는다면, 나아가 좌파의 모든 장/단기적 슬로건들이 남/녀 노동자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 해방'을 향한 흐름이라 자임할 수 없을 것이다.
3) 맑스주의의 공백들
물론 우리는 지금 훈고학적인 논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러나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70년대 가사노동 논쟁과 80년대 맑스주의 페미니즘 vs. 사회주의 페미니즘 논쟁이 과연 한국의 좌파들에게 어느 만큼의 영향력과 변화를 추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아직까지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은 전혀 대중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전사회적인 가부장제, 따라서 현시기 한국사회의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위력을 발휘하는 가부장제를 파악하고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가 그다지 적절한 틀이 아니었다는 점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해보기로 하자.
맑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는 역사유물론이다. 이는 맑스주의가, '이성'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관념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물질적 존재 조건으로부터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는 '실천 철학'임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철학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는 맑스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서의 '여성'과 '여성의 억압'에 대한 논의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에 대한 이중적 착취에 대해 맑스주의가 전혀 무지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특히 엥겔스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볼 때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맑스주의가 본 '총체'로서의 사회, '총체'로서의 이론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여기서, 역사 유물론의 철학적 전제에 어떤 '비약'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여성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공백이 바로 그 '비약'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밝히는 데서 시작하여, 맑스주의를 '성별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핵심 축인 '노동'과 '생산' 에 대한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비판 1> 협소한 노동 개념--생산의 특권화와 재생산의 비가시성
역사유물론의 두 번째 전제를 보면, 철학적 수준에서 맑스가 의미했던 '생산'은 "노동을 통한 자기 삶의 생산"과 "생식을 통한 새 생명의 생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생산' 개념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도 없으며, 두 가지 모두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년 맑스의 노동/생산에 대한 철학적 시기 이후, '생산'이 의미했던 이러한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임노동을 통한 사용가치의 생산'만이 분석 내에서 특권화된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뚜렷이 관찰된다. 대신 새로운 생명의 생산은 '인간의 재생산/노동자의 재생산'이라는 모호한 어휘에 포함된 것으로 간간이 등장할 뿐이다. 물론 역사의 동력으로 평가된 것은 바로 이 '협소화된 의미에서의 생산'이었다. 이는 Nicholson의 다음과 같은 지적과 일치한다. "생산이 사물 및 인간의 생산 둘 다에 등치되는 경우가 가끔씩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사물의 생산에만 등치되고 한층 더 협애하게는 교환가치를 가진 사물의 생산과 등치된다는 사실이다".
한편 맑스주의 내에서의 '재생산'은 명백히 '생산'과는 구분되는 것 (따라서 더 2차적인 것)으로 위치지워져 있으며, 이 가운데 특히 '인간의 재생산'--현재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몫'인--은 암묵적으로 '자연'과 연관지워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재생산이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재생산'--즉 출산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오늘날 '가사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개념에 포함된다. 여기서 잠시,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언급한 사적유물론의 첫 번째 전제--'물질적인 생활 자체의 생산'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물질적인 생활이란 우선, 말 그대로 인간이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생리적 필요의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맑스는 음식, 주거, 의복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주의해야 할 함정이 있다. 즉, 인간의 생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인 '음식, 주거, 의복' 등은, 한 번의 '생산'으로 직접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가사노동이라고 뭉뚱그리는 이 모든 노동들은, 특정한 역사적/문화적 단계에 속한 사회에서 '인간이 생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문제들이 맑스주의, 아니 정확히 말하여 역사적 유물론에 기반한 맑스주의적 이론 틀 내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은 무엇보다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매일 매일의 자신의 물질적 생활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종류의 '가사노동'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엥겔스의 언급은 눈여겨볼 만 하다.
...가부장적 가족의 발생과 함께, 더욱이 일부일처제 개별 가족의 발생과 함께 사태는 변하였다. 집안 살림은 그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사회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사로운 일'로 되었다. 아내는 하녀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회적 생산에서 제외되어 아무 것도 벌 수 없게 된다. 또 만일 그가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여 독립적인 벌이를 하려고 하면, 그는 자기의 가정 살림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지위는 공장에 진출하건, 의사 및 변호사를 막론하고 어느 직업 분야에 진출하건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사회는 순전한 개별 가족이라는 그런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엥겔스와 이후의 맑스주의에게서 더 이상의 진전은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 즉, 가사노동이 '사사로운 일'이 된 것이 하나의 역사적 결과물이었음을 지적하고, 현재와 같은 (가사노동에 있어서의) 성역할 분담을 일종의 "가내 노예제"라고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을 하나의 '필수적인 노동'으로 인정하기보다는 그저 논의의 초점을 다른 곳--'좁은 의미의 생산'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노동'으로 옮겨갈 뿐인 것이다. 가정에 갇힌 노예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는, 역사유물론에 의해 잠시 발견되었다가 이내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맑스가 "인간은 우선 살아있어야 한다"라는 역사유물론의 전제에서 "자신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함에 의해 인간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생활을 생산해 낸다"라는 명제로 나아간 것은 분명 "비약"이었다. {자본}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사용가치의 생산'이라는 좁은 의미의 생산일 뿐이며, 여기에는 인류를 지구상에 존속케 하는 '인간의 생산'도, 갓난아이를 한 사람의 '노동자'로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를 '내일도 노동자일 수 있게' 해주는 '가사노동'도 삭제되어 있다. 가사노동은 불완전한 노동, 불완전한 생산, 불완전한 재생산으로서, 여전히 맑스주의 안에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비판 2> 왜 여성인가?--맑스주의가 설명하지 않는 것
이 질문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것이다. 맑스주의는 계급사회가 왜/어떻게 불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불평등한 관계의 어떤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가령 보다 저임금의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왜 (남성보다는) 여성인가? 가사노동을 비롯한 일련의 재생산노동을 하는 데 적합하다고 가정되는 것은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가? 가족이나 결혼에서의 불평등한 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이거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온 것이라고 할 때,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불평등이 형성되어 왔으며,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억압의 대상이 되었는가? 맑스주의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맑스주의 안에는 '성별 억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판 3>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략"
페미니즘의 다양한 흐름들이 전통적 맑스주의와 단절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가 사회적 활동자의 행위와 의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생산구조에 일차적으로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전통에서 여성의 억압은 추상적 생산양식의 작업으로 환원되며 억압이 발생시킨 편익 역시 추상적 자본 범주로 환원된다. 이때 전혀 인정되지 않고 있는 사실은, 많은 경우 남성들이 사적인 영역인 가정뿐만 아니라 중립적 장소를 표방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혜택을 누린다는 점과 그들이 그러한 억압을 지속시키기 위해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즉 '여성의 억압을 설명하면서 단지 자본주의 체제의 맹목적 작동만을 무대에 남겨두고 지배의 행위자는 퇴장시켜 버리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이 같은 경향'이 바로 "전통적 맑스주의의 계략"인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직접적 억압자처럼 보이는 것은 남성이다. 그러나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는 것은 이들이 아니라 가정주부의 무급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챙기고 전시에는 이 예비적 노동공급을 끌어쓰는 자본주의의 체제적 구조이다(Nash & Safa, 1980)", "남성이라는 표면적 얼굴 뒤에는 자본이 있다", "성적 불평등은 보다 큰 불평등, 즉 계급 불평등의 일부이다"...
이러한 진술들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이 입장에 있어서 젠더 분업은 계급에 대해 고정불변인 하위 모순으로 처리된다. 즉,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노동력 재생산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그리고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 있는 노동예비군을 제공받기 위해, 자본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진술이 언뜻 보기에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본의 필요에 복무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자본만이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유일한' 수혜자임을 암시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득을 취한다'는 주장과 수세기 동안 여러 문화 전체에 걸쳐 존재해 온 억압의 '비잔틴식' 표현 일체를 '자본의 필요'라는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가령, 가족 내부에서 여성의 종속적 위치, 그리고 그것의 지속을 위해 그들의 남편들이 맡은 적극적인 역할과 같은 사실들을, '자본의 필요'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여성 억압의 직접적 수혜자는 남성이다.
맑스주의의 공백에 대한 이상과 같은 비판들은, 맑스주의/좌파가 지니고 있는 남성편향 및 여성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이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좌파 운동가 개개인들이 보여주는 심각한 가부장성은 '인성(人性)'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각자 나름의 역사와 나름의 메커니즘(동학)을 보유한 별개의 억압체계이다." 물론 현실의 수준/구체의 수준에서 가부장제의 영역과 자본주의의 영역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론의 수준/추상의 수준에서 이 둘은 각기 별개의 체계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하기 위해서 '상품'이라는 추상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 억압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우회로를 거칠 때에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두 개의 억압 체계는 현 사회에서 서로에게 복잡하게 연관된 현상으로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의 문제를 혁명의 한켠에 끼워 달라는 부탁이 결코 아니다--만약 그런 식의 '탄원'으로 억압이 사라질 수 있다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낙원은 지금쯤 천년왕국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좌파는, 그 동안 여성억압의 문제를 하위 개념으로,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주제로, 혹은 기껏해야 '자본주의의 아주 정교한 하부 메커니즘'으로 다루어 왔던 관성에서 벗어나(이것은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심오하게 성별화된 맑스주의 이론을 재구성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여성의 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 '성별화된 맑스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노동'과 '생산'에 대한 협소한 개념 자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산/재생산 사이의 무리한 구분과 이들 사이의 위계 (즉 '생산의 우위') 역시 철회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남성편향을 수정하는 것은, 앞에서 논의했던 '성별화된 노동시간단축' 이라는 슬로건을 작성하는데 있어 핵심적이다. 즉, 가사노동의 개념을 재도입하고, 이제까지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던 여성의 공식/비공식 노동을 노동시간단축 논의에 융합시킴으로써, 그것은 (비록 더 오래 기다려야 할 지는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공동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맑스주의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은 우선적으로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위의 세 개념들을 확장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 이후에야 이제까지 삭제되어 있던 '여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착취를 이론화하는, '심원하게 성별화된 맑스주의'라는 질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미래--우리는 여성 독자노조 건설로 간다!
맑스주의의 공백에 대한 비판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현실에서 나타나는 좌파의 뚜렷한 남성편향과 가부장성을 수정하고 여성실업문제, 즉 전체 노동계급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자, 긴 우회로를 거쳐, 이제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여성실업을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의 급격한 상황 악화에 저항하는 여성운동진영의 대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평등의 전화'를 비롯한 노동관련 상담창구 운영을 통한 여성고용동향 파악 및 현안문제에 대한 지원, 여성실업대책본부를 주축으로 한 여성실업자 지원/조사, 여성운동단체들간의 연대를 통한 대 정부 요구의 확대 및 관철된 요구사항이 실질적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법적·행정적 보완조처 요구, 그리고 아직 소수에 불과하지만 여성노동권 확보를 위한 대학연대와 민주노총, 한국노총, 정부위원으로 구성된 4자 테이블의 활동 전개 등. 이에 따라 현재 40대 이상 여성가장들에 대한 일시적인 생계보조책 마련 및 공공근로사업의 확대, 여성노동자 재고용시 기업 보조금 증가, 성차별적 해고를 (명목상으로나마) 감소시킬 수 있는 각종 행정위원회의 발족, 남녀차별금지법의 입안, 직장내 성희롱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 등의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속도에 비해 턱없이 뒤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단기적인 미봉책들이 많고, 무엇보다도 여성노동자/여성실업자들 자신의 목소리와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성단체들과 정부의 '협상'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그 장기적 한계는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현장에 있는 여성노동자/여성실업자들이 주축이 될 수 있는 중장기적 조직화 방안이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숙고해보아야 할 가장 최근의 움직임이 바로 여성 독자노동조합의 건설이다. 그런데 왜 '독자' 노조인가?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다.
1) 왜 '독자' 노조인가?
우선 이 질문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전국단위 노조를 전제하고 있다. 즉, '민주노총이 가진 조직력과 포괄성 '안에서는'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조직, 민주노총 / 기존 단위 노조는 여성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가? 경제위기라는 수세적 상황에서 민주노총 / 기존 단위 노조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그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리고 적어도 향후 수십 년 동안은 계속 그럴 것이다. 노동운동을 자신의 운동으로 삼고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활동해온 여성들조차,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대다수의 여성운동가들이 노조가 노동시장에서의 성 평등 실현을 주도해나갈 신뢰할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성별이라는 물질적 변수가 삭제된) '노동자 일반'의 운동이다. 그러나, (앞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남성편향을 비판하면서 가족 내에서의 위계 및 불평등을 거론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내에서의 위계 및 불평등 역시 시급히 분석되고 극복되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노조 내의 다양한 집단간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그 해석이 어떤 집단의 이해를 주로 반영하며 누가 노조의 주도세력인가에 따라 노조 안에서 역시 배제와 소외가 존재한다. 고령자,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여성노동자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노조 내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를 가져 온 대표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노동운동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은 이러한 노조 내부의 정치학을 사상한 채 단일하고 통일적인 행위자로서의 노동조합을 전제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동일성에 대한 전제'는 앞서 비판한 맑스주의/좌파의 무성성(sex-blind)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동시에 노조 및 남성노동자들에게 뼛속 깊이 체화되고 구조화되어 있는 가부장성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2) 노조의 가부장성
노동조합의 가부장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많은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단위 사업장의 노동조합이 (물론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남성노동자들만에 의한', '남성노동자들만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 자체가 대단히 낮은 상황일 뿐만 아니라(95년 통계 7.4%), 둘째, 그나마 조직되어 있다 해도 노조가 스스로 여성노동자들의 특수한 현안을 노조 전체의 것으로 채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셋째, 노조 내 여성간부의 과소대표 및 가부장적 문화로 인한 여성간부의 office- wife화는 대부분의 노조들에게서 천편일률적으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가부장성은 경제위기시에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는데(이런 점에서 자본이 경제위기시에 취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IMF 이후 지금까지 남성조합원 중심의 노동운동은 여성조합원, 그리고 미조직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를 위기의 일차적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작년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파견근로제에 대해 대응했던 방식이 보여주듯이, 노동조합의 남성중심적 성격은 "노동계는 기댈 데 없는 미조직 여성노동자들만 파견 노동의 사지(死地)에 남겨둔 채 슬그머니 발을 빼고 말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공연한 음해가 아님을 입증한다. 이 모든 상황은 현 상황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지독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가족임금제'에 대해 노동조합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볼 때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남성노동자의 이해와 여성노동자의 이해는 대립적인가? IMF 이후 대량 해고를 동반한 구조조정이 진행되자, 각 단위 노조들은 이 질문에 대해 '실천적으로' 긍정했다. '어차피 누군가 짤려야 한다면 여성노동자가 낫지 않느냐'는 대중적 논리는 바로 남성 노동자들 자신의 것이다. 서구의 역사를 볼 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가장 저항적이었던 집단 또한 바로 이들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임금'을 주장해야 하며, 이때의 '가족임금은 곧 남성의 임금'이라는 주장은 심지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각 단위사업장 내에서는 '고용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필요한가,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한다. 물론 그 논쟁은 단순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전체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양자택일이 이루어진다 - '여성문제라는 특수한 문제보다는 전체 노동조합원들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시급하다'라고.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 여기서의 '전체' 조합원은 누구인가? 여성조합원들은 '전체'에서 왜 제외되는가? 무엇이 '더 중요한' 사안인가를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대다수 남성 노조간부들은 왜 유독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자본의 관점에 서서 그들과 타협할 수 있다고 사고하는가?
3) '여성부'의 울타리를 넘어
이러한 노동조합의 가부장적 남성편향을 수정하고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제까지 많은 방안들이 제출되고 또한 시행되어 왔다. 그중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노조 내 여성부/여성국을 두는 방안뿐이며, 여성간부 할당제, 비례대표제, 노조간 여성연대조직으로서의 여성협의체 결성 등의 제안은 아직 제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여성간부들이 맡고 있는 직책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여성부장이나 여성부위원장은 언뜻 보기에는 여성노동자집단의 중요성을 인정한 결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남성중심 노조가 짐짓 여성을 배려하고 있다는 과시를 위한 전형적인 구색맞추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성부장 또는 여성부위원장은 공식적으로는 전체 여성조합원의 의사를 대변하는 지위로 인정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여러 노조간부 중의 한사람으로만 평가되는 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가 여성관련 사안의 입안과 결정과정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부/여성국'의 존재라는 것이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조합원을 배려한다는 명분 하에 여성을 특정 영역, 특정 부서 내로 게토화 시킴으로써 여성의 목소리와 요구가 오히려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노동자의 문제는 '여성부/여성국'에서 전담하는 것이라는 뉘앙스 자체가 그것을 (전체가 아닌) '소수 여성들'만의 '특수'한 문제로 한정짓는 것은 아닐까?
4) 현존하는 미래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지금 시점에서 여성노동/여성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기적 대안이 바로 여성독자노동조합의 조직화이다. 현재 양대 노총의 여성국, 그리고 각 단위 노조 내의 여성부로는 최근의 일방적인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관행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현대자동차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경우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여성이 노동조합 집행부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경우 여성노동자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대변하여 문제를 해결한 경우도 없지 않다(보훈병원의 경우). 그러나 이처럼 여성이 노동조합의 핵심간부인 경우의 비율은 병원노련과 같은 특정 업종을 제외하고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노동조합의 암묵적 합의/방조 하에)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성차별적 해고 및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어 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은 현재 (가부장적이나마) 노동조합원이 될 자격조차 가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시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제기된 것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그를 가능하게 할 '여성독자노조의 결성'인 것이다. 현 시점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성차별적 여성해고, 가족임금제, 비정규직화에 따른 고용불안 등--을 전사회적으로 제기하는 것, 그리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집단적'으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성독자노조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특히 최근 여성운동단체들에 의한 정치적 성과물들이 임시적이고 시혜적인 관점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발본적이고도 장기적인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 1월 11일, 서울시에는 두 개의 노조설립신고서가 제출되었다. 서울여성노동조합(위원장 정양희, 전 여성 민우회 노동센터 사무국장)과 서울지역여성노동조합(위원장 임미령, 전 한국노총 광주시 지부 여성교육부장). 오랫동안 노동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왔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있어 최초의 역사적 발걸음이다. 특히 서울여성노조는 노조결성 선언문에서 "여성들이 임시직, 시간제 근무자, 용역사원, 인턴으로 혹은 영세사업장 노동자로 쥐꼬리만한 월급과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고용불안 속에서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여성노동자들의 '여성' 노동자로서의 현실에 기반한 중장기적 대안으로서 모색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제 여성 독자노조는 '현존하는 미래'가 되었다.
물론 이제 첫걸음을 뗀 여성독자노조에게는 많은 현실적 과제들이 주어져 있다. 가장 먼저 이들이 과연 독자적 교섭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부터가 투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좌파는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여성조합원의 독자 노조가 기존 노조의 조직력을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반대할 것인가? 그러나, 기존 노조의 반성적 인식과 좌파의 문제설정 자체에 있어서의 방향전환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판은 여전히 여성노동자를 '전체노동'의 이름 하에 비가시화하는 종래의 관행을 되풀이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스로를 누가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는 바로 여성노동자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여성주의, 좌파의 새로운 싸움
이 글의 전반부에서 길게 논의한 대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전사회적인 가부장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여성독자노조의 출범은 저항이 이미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노동 및 생산 개념을 새롭게 인식하고 가사노동이라는 문제설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이는 여성주의적 시각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내포하고 있는 다차원적인 성차별주의에 반대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보다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반(反)-민중성, 그리고 구조조정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장미빛 미래가 전적인 허구라는 것을 지적할 때, 동시에 (민중들 내부에 또한 존재하는) 성별 불평등과 위계제를 함께 비판해야 한다. 특히, 현 상황에서 핵심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가족임금제'를 반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능력, 경쟁, 효율성, 생산성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선 이후 가부장제의 특수한 형태를 지지해온 주요 이데올로기들이다--그런데 이것은 바로 좌파가 겨냥하는 자본주의의 심장이 아닌가? 따라서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재구조화된 좌파의 비판은 보다 근원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또한 보다 많은 사람의 실질적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 이슈가 아니라 전체를 재구성하는 비판으로서의 여성주의적 재구성! 이는 좌파의 새로운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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