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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서관모(충북대 교수, 사회학)




맑스주의의 비판적 개조라는 알튀세르의 기획의 발본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어떤 점에서 정확히 맑스적, 엥겔스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루이 알튀세르가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근본적인 내적 모순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는가, 그리고 알튀세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적인 철학적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발리바르가 맑스주의를 어떠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려 하며 어떠한 철학적, 정치적 문제설정들을 제출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왜 이데올로기인가?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함으로써 맑스주의가 조직의 교의로서 작용해 온 한 세기에 걸친 역사의 큰 순환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구성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하는 주체)라는 관념, 프롤레타리아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본질적 형태라는 관념을 기각하기가 얼마 전보다는 상당히 쉬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며 이를 승인한다는 것, 핵심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이 끝났다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는 지금까지 노동자운동과 따라서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실존은 당 형태 안에 자신을 한정할 수도 없었지만 또한 당 형태 외부에서 자신을 구성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인 이유만으로도 그러하다.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당 형태라는 제도가 내포하는 모순들, 계급적대와 교착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것인, 지적 차이(diffrence intellectuelle)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되는 모순들, 무엇보다도 "혁명적 이론의 지성(intellectualité)과 노동자적 실천들 사이의 때로는 첨예한 모순들"(주1)에 대한 이론적 인식의 수단이 맑스주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 수단의 부재는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역사적 경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의 전화로 요약되는 맑스주의의 역사의 비극적 측면을 설명하지 못하는 맑스주의의 무능력의 근본원인이기도 하다.

그밖에 특수하게 우리 사회의 맑스주의자로 하여금 당 형태의 역사적 유효성이 끝났음을 승인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현실적 조건으로서 남한에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의 역사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는 아마 얼마간 더 긴 '애도'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 '독자적' 정당건설운동이 얼마간 계속되겠지만, 여기서 모색하는 조직형태는 전통적인 전위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운동이 지배적인 정치적 모델 속으로 수용 또는 도입되는 형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당 형태의 역사의 종언이 맑스주의 자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소멸한 것은 맑스주의의 지배적 형상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이론은 필연적,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정세 속에서는 존재하기를 멈출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주2) 맑스주의의 경우 이것은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의 일반화한 위기, 이 결합의 단절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유효하게 전화되지 않으면 이미 게토화한 맑스주의는 수동적으로 소멸하고 말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의 위기의 폭발'을 선언하기 훨씬 전, 이미 파시즘, 특히 나치즘과 대결하던 시절부터 맑스주의는 일반적인 위기에 직면해 왔다. 거기서 등장한 것이 한편으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의 문제설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빌헬름 라이히의 '프로이트-맑스주의'이다. 그러나 그람시의 시도는 전통적 맑스주의에서 조금밖에 진전하지 못한 것이었고, 라이히의 시도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불가능한' 것이었다.(주3) 알튀세르에 와서야 맑스주의는 근본적인 전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얻게 된다.

스피노자와 프로이트 등의 비맑스적 사상의 활용을 맑스주의의 개조라는 알튀세르의 기획은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과 그것의 고유한 유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서 출발한다. 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그의 독창적인 인과성 도식(schéma)과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이 아니다": {에티카} 제1부, 정리 18)에서 영감을 얻은 이 도식에 따르면, 원인으로서의 구조는 "구조의 효과에 내재하는" 것이며 그것들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는 그것의 효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인은 "부재하며", 오직 그 효과들 속에, 그리고 효과들로서 존재할 뿐이다.(주4)

구조적 인과성의 도식은 '주체'의 문제설정과 따라서 '이론적 인간주의'를, 그리고 경제 이데올로기 내지 경제주의(원인으로서의 경제)를 추방한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진화론과 파국론에서 구해내고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경향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효과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프로그램의 윤곽을 제시하기" 위해 제출된다.(주5)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효과들의 분석은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경제라는 원인의 효과(결과)가 아닐 경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에서의 새로운 인과성 도식의 제출에 상응하여 알튀세르는 과학(역사유물론)의 영역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개념을 도입한다. 맑스는 한편으로는 '역사의 주체'의 문제설정의 위대한 파괴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계승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역사관념론'에서는 해방의 필연성을 사고하게 하는 '역사의 주체'가 인류, 민족, 인민 대신에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점뿐이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이러한 곤란의 근원을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모순에서 찾고,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의 가르침에서, 즉 "정신의 기능작용 속에서 인식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의 통일성을 성찰하고 그러한 양면성을 초개인적[개인횡단적인](transindividuel) 관계들의 본질적 특징으로 삼는 철학들"에서 유래하는(주6) 근본적으로 비맑스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역사의 '주체'는 '의식적 주체', 즉 그 통일성이 의식에 의해 확보되거나 완성되는 주체이다. 그런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적(vécu) 관계는 이데올로기를 통과하며, 게다가 이데올로기 자체"인데, 이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의식'과 거의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으며, "심지어 반성적인 형태로 드러날 때조차도 심층적으로 무의식적(inconscient)이다."(주7) 여기서 '무의식적'이라는 용어는 "프로이트적 의미가 아니라 그 가장 일반적인 의미, 즉 비의식적(non-conscient)이라는 의미"(주8)를 갖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연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역사의 주체'의 가능성 자체를 소멸시킨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들을 항상 이미 비표상적인 요소들(희망과 공포, 신앙, 도덕적 및 비도덕적 가치, 해방 또는 지배의 열망)과 결합되어 있는 표상의 양식들의 생산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들이 수행하는 비표상적 요소들과 표상의 양식들의 이러한 결합은 어떤 (의식적) '주체'도 그것을 제어하거나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물질적인 (즉 비의식적인) 조건들에 의존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들이 '무의식적'이라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주9)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구조적 인과성 도식과 함께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적 이행'의 최종 단계로 만드는 진화주의적 공산주의 상, 공산주의를 '인격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즉 '모순 없는', '이데올로기 없는', 요컨대 사회적 관계 없는 '투명한 사회'로 만드는 묵시록적 공산주의 상들로부터 분리하여 공산주의를 무한정의 정치투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통하여 살아나는 것은 맑스의 "오늘날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독일 이데올로기}) 상이다.



2. 맑스와 엥겔스: 이데올로기의 동요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식화가 맑스의 최초의 '단절'의 불가피한 징표들의 하나라고 한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이라는 범주를 비판하고 이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속하는 범주"인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는 것이다.(주10) 문제는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근본적인 모순이다.(주11)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시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46)에서 유물론은 목적론과 사변에 대한 비판이며,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념론적 표상들 즉 '이데올로기들'의 형성 및 현실적 생산에 대한 분석이고, 또한 이러한 관념론적 표상의 지배효과의 분석이다. 알튀세르가 파악하는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모순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사고할 수 없게 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러한 곤란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독일 이데올로기} 이후 30년간 맑스와 엥겔스의 언설에서 거의 실종되었다가 {반 뒤링}(1876-78) 및 이후의 엥겔스의 일군의 역사적 및 철학적 텍스트들 속에서 다시 출현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가 고취한 소외의 문제설정, 환상의 문제설정을 채택한다. 이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정면에 하나의 세력 또는 반정립적 심급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부르주아 사회의 해체로서의, 모든 이데올로기의 현동적 부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이렇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프롤레타리아 '과학' 내지 '진리'를 대립시키는 도식 속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이, 즉 맑스 자신의 이론이 그 자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파악될 가능성은 봉쇄된다.(주12) 맑스가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사고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가 진리/환상의 형이상학적 이항대립에서, 그리하여 '진리의 형이상학' 또는 '역사의 의미의 형이상학'에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당에 대한 목적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왜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시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맑스주의적이지 않지만(주13) 맑스에게는 이와 전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시되는 곳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1859년)이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조만간 변혁된다. 그런 변혁들을 고찰할 경우 우리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이며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변혁과,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곧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이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그 갈등을 싸워 해결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서 일어나는 변혁을 항상 구분해야 한다(MEW 13, S. 9.).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전혀 환상, 비현실성일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경제나 마찬가지로 물질성을 지닌다.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갈등을 의식하고 그 안에서 이 갈등을 싸워 해결"하므로 이데올로기는 정치의 장소, 즉 세계변혁의 장소이며,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진실(진리)의 장소(주14)이다.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총체성의 유기적 구성부분이며 따라서 공산주의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것임을 뜻한다. 만약 이데올로기가 '환상'이거나 '허위의식'이라면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 없는 세계, '투명한' 세계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생산자들의 '자유로운'(곧 사회적 관계의 제약에서 벗어난) 연합, 곧 사회적 관계 없는 세계가 될 것이다.

[서문]의 저 놀라운 정식화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끝내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는 그의 정치 개념의 동요와 상관적이다.(주15) 즉 그는 계급투쟁은 국가와 정치를 뛰어넘어 국가도 정치도 없는 사회로 이끈다는 생각, 요컨대 ('철학의 종언'과 상관적인) '정치의 종언'이라는 생각과, '새로운 정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정치'라는 생각 사이에서 동요한다. 맑스의 이러한 동요는 그가 사회/국가의 이항대립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연유한다. 이 사회/국가의 정치적 대립쌍은 진리/환상의 형이상학적 대립쌍과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맑스는 이러한 대립을 무효화시키는 1859년 [서문]의 정식화의 함의를 충분히 발전시킬 수 없었다. 맑스 사후 말년의 엥겔스가 비로소 중대한 이론적 진전의 맹아를 도입한다.

엥겔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게 만든 것은 당시 이미 상당히 심각해진 '맑스주의 당'의 문제이다. '조직적 중심'과 '이론적 중심'이라는 당의 '두 개의 중심' 테제에 입각해서도 해결될 수 없을 정도의 문제 말이다. 엥겔스는 당 형태의 위험을 암암리에 인식하고 이를 교정할 힘을 대중운동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모색 과정에서 엥겔스는 대중운동을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 설명하기 위한 원리를 제시한다. 계급투쟁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그러나 계급들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로서 그리고 대중운동으로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다시 말해, 대중운동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엥겔스는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대중들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구성된다고 본다. 이것이 전부라면 엥겔스의 인식은 사람들이 1859년의 맑스의 정식을 다시 취한 것일 뿐이리라. 엥겔스의 진전은 그가 이데올로기를 '비의식적(무의식적)인 것'으로 정식화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주16) 대중운동이 비의식적(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종속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의지에 의해서도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다는 것, 대중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형성은 결코 보장된 경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국가에 대한 그 내적 관계를 통해 정의한다. 예컨대 그는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국가는 제1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라고, 그리고 "국가는 사회에 대하여 독립적인 권력으로 되는 즉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낳는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테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론을 예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엥겔스는 이데올로기 없는 혁명적 세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대중의 궁핍화, 임노동자에게서의 소유의 근원적인 부재, 그리고 맑스주의 이론에서의 환상들의 근원적 부재 사이에 설정한 예정조화를 끝내 떨치지 못한다. 대중과 계급 사이의 불일치의 변증법은 끝내 유산되고 만다.

이후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에 근원적으로 외재적인 '계급의식'(루카치)이라는 신화가 지배적 노선으로 자리잡고 이러한 신화와 양립불가능한 맑스와 특히 엥겔스의 비판적 사고의 어떤 요소들은 억압된다. 이러한 이론적 봉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는 당이 절대지의 대용물이 되어가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전화해 간다.



3. 알튀세르: 경향으로서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화는 기본적으로 맑스의 1859년 [서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 입각한 것이다.(주17) 다만 그는 맑스와 반대로 무의식적(비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채택하는데, 회고적으로 본다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과정의 무의식적(비의식적) 본성에 대한 엥겔스의 주장을 보완하려 한다"(주18)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주체'를 기각하고 구성하는 기능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주체를 이행시키고자 하는 알튀세르가 "주체를 구성하는 구조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비록 부단히 프로이트적 유비들을 통해 마르크스를 해석했지만) 프로이트의 개념들보다는 오히려 맑스의 개념들을 일반화시키는 것을 선택했다"(주19)는 점을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지만, 프로이트적인 무의식도 결코 아니다.(주20)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알튀세르의 모든 이론적 작업은 두 개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한다. 한편 알튀세르는 역사유물론의 빠진 고리로서의 이데올로기론(또는 국가론)의 구성이라는,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되풀이되어 온 프로젝트를 다시 채택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사회적 복잡성 또는 정치적 실천을 총체화시키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하면서, "명시적으로 항상적 과잉 또는 결핍이라는 견지에서 이데올로기를 고려한다."(주21)

그렇지만 공식적인 활동의 마지막 수년간의 그에게서는 이중에서 후자의 경향이 지배적이다.(주22) 1977년의 [오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기왕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이데올로기, 국가, 당, 그리고 철학에 대한 이론의 부재에 돌린다면 이는 아마도 다시 미묘한 형태의 '관념의 전능'이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며, 완전한 맑스주의 이론이라면 역사를 제어할 수 있었으리라고 가정하는 관념론을 상정하는 것임을 경고한다.(주23)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에 대한 알튀세르의 설명은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테제로 요약된다. 함께 제시되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테제가 비맑스적인 것과는 달리, 이 테제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안에서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그 갈등을 싸워 해결한다"는 맑스의 1859년 [서문]의 정식화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에 대한 그의 이러한 설명에는 중대한 난점이 있다. 즉 모든 개인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일하게 주체로 호명된다면 그의 주체구성 도식은 기능주의적 도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도식 속에서는 '재생산'만이 사고가능할 뿐 반역은 사고될 수 없다. 물론 그는 기능주의 혐의를 부정하고 이데올로기들의 계급적 성격을 주장하지만,(주24)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부여하는 이유, 쉽게 말해 이들이 반역하는 이유를 만족스럽게 제시하지 못한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제시한 불완전한 요소들로부터 추론하여 알튀세르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고 주장한다.(주25)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강한 의미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상상적 경험은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다. 즉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공하는 관념들(notions)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등이다.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잠재적 모순을 내포한다. 즉 피지배자들이 그들 자신의 상상의 보편성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들은 더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것, 즉 정치적 변화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대중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맑스의 관념 대신에 오히려 "지배적 도덕들은 '노예들의 도덕들'이라는 니체적 관념"(주26)을 채택하여 알튀세르의 곤란을 해결한다.

그런데 대중들은 '정상적' 행동과 반역적인 성향 사이에서 분할되어 있으며, 양자 중에 어느 하나가 우세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역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예정된 미래가 아니라 단지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 항존하는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경향'이라는 알튀세르의 관점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공산당 선언}의 시대에도, 파리코뮌 시대에도, 1917년 혁명의 시대에도 가능한 것이었다. 알튀세르적 관점에서 볼 때 특정한 공산주의가 오늘날 다시 가능해진다면 그것은 맑스 시대의 공산주의와 또 레닌 시대의 공산주의와 심대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항상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주27)




4. 발리바르: 두 개의 토대와 세 개의 정치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의 비판적 개조를 위하여 철학을 전화시키고자 한 철학자이지 사회이론가는 아니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의 연장선 위에서 맑스주의 개조 작업을 수행해 온 것은 발리바르이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그는 확대된 해방의 정치로서의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 '해방'과 '변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다른 정치로서의 '시빌리테(civilité)의 정치' 개념을 가공하며,(주28) 이러한 견지에서 생산양식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의 문제설정을 절합(節合)하는 방향으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려 한다.

발리바르의 논의는 "초개인적(transindividuel[개인횡단적])인 것의 근대적 존재론"(주29)의 한 사례인 맑스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회적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다시 말해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고 보는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은 개인주의와 유기체주의 사이의 부르주아적 대립을 무효화시킨다. 다만 맑스는 사회적 관계를 사실상 계급관계로 환원했고 계급구성체로서의 사회구성체라는 '사회적 전체'를 구성함으로서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의 비판적 함의를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했다.

맑스의 이론화의 이러한 내재적 한계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그것을 규정하는 맑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를 전면적으로 문제삼는다. 맑스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 및 교환관계들에 대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모든 관념을 폐기해야 한다는 관념에 도달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본질적 활동'은 노동이라고 정의하는 철학적 인간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은 자유를 사적 소유와 동일화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근원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에 입각한 목적론적 예견의 효과는 특정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는 노동자운동에 엄청난 힘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 역시 파국적인 것이었다. 한 예로, 민족적 분할에 기초를 둔 사회적 적대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해내지 못한 역사유물론의 내재적 한계가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발리바르는 맑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단순히 기각하기보다는 그것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하려 한다. 그는 인간학적 성찰을 통하여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또는 사회적 관계의 다양한 차원들에 대한 연구들의 접합(接合)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는 노동의 인간학에 토대를 둔 계급적대의 문제설정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내적 한계들이라는 질문, 즉 계급투쟁과 모든 곳에서 일치하지만 그것으로 절대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초개인적인 것의 형태들이라는 질문"(주30)을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계급적대와 전혀 다른 유형의 보편적인 모순들 혹은 분할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지적인 차이라는 근본적인 인간학적 차이를 식별하고,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의식과 담론 밖으로 추방되어 온 이 차이들과 계급적대의 절합을 사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정치의 개조를 수행하고자 하는데 그 핵심내용은 '인권의 정치'의 새로운 정식화이다. 그는 인권 일반을 무조건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보로 만드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인권이라는 관념 속에서 하나의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담론만을 발견하고 집단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 인권을 지양하려 하는 종래의 사회주의적 기획 모두를 넘어서는 인권의 정치를 정식화하고자 한다.(주31) 이러한 정치의 원리를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을 동일화시키는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찾는데, 그는 거기서 평등과 자유의 동일화를 읽어내고 이를 보편적 시민성을 근거짓는 '평등자유(égaliberté/equaliberty) 명제'라고 부른다.(주32)

그러나 성의 차이, 지적인 차이라는 '평등의 제도화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모순)의 어떤 유형'이 근대 정치 속에서 억압되어 왔다. 근대정치를 '괴롭힌' 이러한 모순은 '평등자유의 변증법'을 더욱 전개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화(해방)의 내용은 이제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중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의 생산으로서 전진해야 한다. 인권의 정치의 이러한 확장은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형식적으로 중화시키는 시민성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그러한 차이를 전화시키는 명시적 경향을 갖는, 새로운 시민성 개념을 요구한다.

인간의 권리들을 확장시키고 결국 그것들을 시민의 권리들로서 발명해야 하는 인권의 정치에서는 착취, 불평등, 차별 등과 같이 보편적 권리를 부정하는 폭력 또는 압제에 대한 저항이 중요하다. 그러나 저항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권의 정치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다시 문제삼을 것을, 따라서 봉기적 행위를 항상 전제한다. 이 봉기적 행위는 불가피하게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즉 대항폭력을 수반한다. 인권의 정치는 기존 질서의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혁명적 시도들을 인권의 정치에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동시에 또 그것으로부터 무한히 멀게 만듦으로써 난파시킨 '대항폭력'(contre-violence)의 자기파괴적 효과들과 대결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오늘날의 일반화한 폭력의 상황 속에서 폭력의 실천적 부정의 두 형태인 비폭력과 대항폭력 간의, 또는 혁명적 변화와 합법적 변화 간의 전통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를 다급히 발명할 필요성을 강조한다.(주33)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발전시키면서 맑스주의를 개조하려는 발리바르의 최근의 작업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을 절합하는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의 제출, 그리고 그러한 도식에 입각한, '시빌리테(civilité)의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개념의 정식화이다.(주34)

발리바르는 정치는 인민 및 인민 내부의 개인들의 구성적 행동으로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위에 정초된다고 보는, 루소가 대표하는 관점을 '정치의 자율성'으로 명명한다. 정치적 주체의 자율성에 근거를 둔 정치의 자율성은 '해방(émancipation)이라는 윤리적 형상'에 조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개념은 인민의 내적 갈등, 내적 분할이라는 아포리아를 내장한다.

루소적 관점의 대극에서 맑스는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념을 주창하는데, 이는 정치의 진실(진리)과 현실성은 그 자신 안에, 즉 자신의 정치적 의식 또는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밖에, 즉 외적 조건들 및 대상들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의 타율성, 즉 구조적 및 정세적 조건들에 결부된 정치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형상에 조응한다. 발리바르는 바타이유가 도입하고 데리다가 채택하는 '일반적 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소유와 노동을 국가와 계급투쟁에 연관시킴으로써 경제와 정치를 단락(短絡)시키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일반화된 경제'의 이론화로 표현한다. 이 '일반화된 경제'는 '국가, 법, 인간의 의지와 권리들에 의한 압제 또는 불평등의 단순한 지양의 불가능함'을 표현하는 정치의 타율성을 지시한다. 그 작동에 각종의 폭력을 요하는 체계로서의 '일반화된 경제'의 변혁, 즉 생산과 착취의 구조의 변혁에서는 폭력이 불가피하다. '일반화된 경제'는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 또는 '폭력과 대항폭력의 순환의 종언으로서의 역사의 종언'이라는 유토피아가 '진정한 정치의 최종적 준거로 사고되어 왔던 하나의 이름'이다.

정치의 타율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스피노자가 분석한 상징적 폭력 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모든 정체에 적용가능한 민주화의 이론으로서의 정치적 교통(communication)'의 이론을 발견한다. 스피노자에게 사회생활은 교통의 활동인데, 이 교통은 무지의 관계, 미신의 관계, 곧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주35) 사고는 그 자신의 교통을 항상 이미 가능성의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자유화(해방)의 조건으로서의 인식을 위한 투쟁은 정치적 실천이다. 스피노자적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모두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자유로운 교통이며, 그 조건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이다.

스피노자적 정치에서 변혁의 대상은 '생산과 착취의 구조'가 아니라 '믿음(croyance)과 교통의 구조'이다. "상징적인 것의 상상화의 장"(주36)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구조 속에서는 '공동체적 도식(schéma)'이 육체·행동·가치·문화·소속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규정에 항상 투영됨으로써 교통과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자 형태로 나타나며, 이로부터 폭력이 발생한다. 요컨대 '집단성의 창설'(l'institution de la collectivité), 즉 집단적 주체성의 창설에 폭력이 따르는 것이다.

맑스가 분석하는 생산과 착취의 구조와 스피노자가 분석하는 '믿음과 교통의 구조' 사이에 놀라운 평행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의 분석 사이에는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맑스가 정치의 조건 또는 '다른 장면'인 공동체적 소속과 따라서 상징적 폭력의 영역, 즉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면, 스피노자는 '경제적' 적대의 감축불가능한 성격을 근본적으로 무시했다.

정치의 조건 또는 타자로서의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맑스의 비사고와 '일반화된 경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사고는 각각 그들의 철학적 인간학의 내재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발리바르가 맑스의 '생산적 노동의 인간학'을 스피노자의 '정치적 교통의 인간학'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교통의 문제, 따라서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정치의 근본문제로 사고하는 스피노자가 이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사고를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학적 성찰 위에서 발리바르는 생산양식들의 문제설정과 주체화양식들(modes de sujétion)들의 문제설정의 절합을 추구한다.(주37)

이 두 개의 문제설정의 절합은 역사적 인과성에 대한 맑스의 도식을 넘어섬은 물론 알튀세르의 도식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감을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 새로이 구성될 도식이 "역사성의 보충물 또는 보완물처럼 작동하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합" 대신에 "서로 양립불가능하면서 동시에 분리불가능한 설명의 두 '토대들' 또는 두 결정들, 즉 주체화양식과 생산양식(또는, 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양식과 일반화한 경제적 양식)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주38) 그리고 그는 양자의 결합의 필연성을, 어떠한 역사적 정세 속에서도 상상적인 것(이데올로기)의 효과들은 현실적인 것(경제적 적대)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의 효과들은 상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발리바르는 맑스를 패러디하여,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듯이 경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는데, 이는 경제와 이데올로기는 각기 자기 자신의 효과들의 유효한 원인인 타자를 통해서만 역사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타자는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에서 말하는 '부재하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부재하게 하는 원인, 또는 그 효과성이 자신의 반대물을 통하여 작동하는 원인"이다.(주39) 이러한 인과성 도식 속에서는 '최종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가 정치의 타자, 즉 정치의 현실성·원인들·효과들의 장소라면, 이데올로기는 이 타자의 타자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발리바르는 '타율성의 타율성'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에 '해방'으로도, '변혁'으로도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정치가 조응하는데, 이러한 정치의 윤리적 지평이 '시빌리테'이다. 시빌리테의 정치는 '동일성들의 폭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주40)로서의 '반폭력의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의 입장에서 모든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초개인적이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순수히) 집단적이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모든 개인은 단일한 동일성, 단일한 소속을 갖지 않으며, 반대로 불균등하게 포함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등적인 여러 동일성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동일성의 형성 즉 동일화와 관련하여 두 개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극한적인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성을 유일하고 일의적인, 집괴적(集塊的)이고 배제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성이 모든 역할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부동(浮動)하도록 허용하는 상황이다. 폭력의 상황은 개인들과 집단들이 이 극한들 중의 한 쪽을 향해 내몰리게 될 때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양극 사이의 잔혹한 진동으로부터 약게 빠져나오려 할 때에도 산출된다.

동일화들과 소속들의 복수성, 복잡성, 갈등성이 감축되어야만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감축하는 것이 제도들의 역할이다. 제도들은 '상징적'이고 물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예방적 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반제도들의 경우에는 조직된 대항폭력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수행한다. 발리바르는 총체적 동일화와 부동적(浮動的) 동일화라는 두 극한들 사이에서의 동일화들의 갈등을 규제하는 한에서의 정치를 '시빌리테'라 명명한다.

시빌리테로서의 정치는 '위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가능하다. 아래로부터의 시빌리테의 정치는 국가의 고유한 폭력에 대한 대안이자 동시에 국가의 무능력에 대한 치료제로서 정의된다. '아래'란 곧 다중(multitudes)을 뜻한다. 인민이 국가에 대한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고타강령 비판])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보통의 시민들로, 계급들로, 대중masse의 당파들로 이루어지는) 다중이 국가로 하여금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도록 강제하고 공적 공간에 시빌리테의 규범들을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곧 시빌리테의 정치가 된다.(주41)

이 시빌리테의 정치는 정치의 자율성에 조응하는 해방의 정치, 정치의 타율성에 조응하는 변혁의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 하겠다. 이 세 개의 정치 개념은 각각 완전한 것이 아니며, 각자는 역사적 시간과 생활공간 속에서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과 시빌리테 없이는 해방이 없으며, 해방과 변혁이 없이는 시빌리테가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 가지 정치의 절합은 개별적인 길 위에서만 가능할 뿐, 절합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빌리테의 정치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의는 아직 추상적이며, 그가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켜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 개념이 정당한 자리를 찾는 대신에 전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 개념으로 대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와 그 타자의 도발적인 유물론적 동일화'(즉 '정치와 경제의 단락')에 의거하는 맑스의 정치의 타율성 개념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현재의 맑스주의의 위기 및 그 기저에 놓인 역사적 현상들에 의해 바로 이러한 정치 개념이 문제시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가 현재의 위기가 민주적 또는 진보적 진영 내에서 자율성의 이론으로서의 정치이론의 부활로 귀결할 것이냐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라고 말할 때,(주42) 틀림없이 그는 다른 것들과 함께 들뢰즈의 '욕망의 정치'나 부차적으로 네그리의 '구성적 권력'의 이론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5.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맑스주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알튀세르, 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맑스주의의 개조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맑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을 특권화시킨다. 계급투쟁과 같은 정도로 보편적이고 결정적인 사회적 적대들로서의 '성의 차이와 이 차이가 발생시키는 억압' 및 '지적 차이'의 재발견은 상이한 해방들의 절합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맑스주의의 개조에서 스피노자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중에서 지적 차이와 결부되는 지적 해방(émancipation intellectuelle)의 문제를 대중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철학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맑스와 스피노자의 모순적 결합의 가능성의 토대는 양자가 공유하는 '초개인적인 것의 존재론의 하나로서의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이다.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은 정치에 관한 '대중(masses)의 관점'의 전제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사고는 교통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며, 따라서 지적 해방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의 분석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가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상상'이라 부를 수 있는 대중적 관계들의 체계, 다시 말해 자신들의 감정들을 통한 개인들의 교통관계이다. 그리하여 상상적인 것 속에서의 개인성의 구성과 대중의 구성은 동일한 과정이 된다.(주43) 지식과 동일성의 구성과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분석이 이데올로기적 과정에 대한 맑스주의의 맹목성을 보완해 주기에 맑스주의의 비판적 개조에서 스피노자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스피노자주의적 개조로서의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맑스주의'는 네그리의 또다른 '스피노자-맑스주의'와 이단점을 형성한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로서의 교통관계를 특권화시키는 반면에, 네그리는 권력과 역능의 존재론적 구분을 특권화시킨다.(주44)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을 기각하고 주체의 구성적 역능에 근거하는 네그리의 이론화는 맑스주의의 주요한 경향들 중의 하나를 이루는 '행동의 철학'(또는 '결단의 철학')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발리바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맑스적인 '정치의 타율성'에서 전맑스적인 '정치의 자율성'으로 회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역과 과학을 결합시키는 맑스에게 과학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이다.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이 기각되는 네그리의 이론화에서는 목적론의 위험이 어른거리게 마련이고(주45) 과학의 희생 위에 혁명적 언사가 번성하기 쉽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이론화에서는 맑스적인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대중'의 문제설정, 그리고 그 모든 위험을 포함한 '대중의 정치'의 관점이 소실된다.(주46) 반면 스피노자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보완된 맑스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이 유지되는 한 발리바르의 이론화에서는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 대중적 실천이라는 맑스주의의 근본 이념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회적 관계의 지평 내에서도 맑스주의의 스피노자주의적 보완은 물론 불충분한데, 이는 그것이 아직 성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이론에 '성적 차이'를 각인해 넣는 것은 현재로서는 요청일 뿐, 그것을 위한 이론적 진전은 앞으로의 과제이다.(주47)

역사에서 물질적인 것에는 사회적 관계들 외에도 무의식, 성(sexuality), 욕망 등이 있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계급투쟁을 다른 사회적 적대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또다른 차원의 역사적 물질성들과 절합할 필요성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 이러한 웅대한 절합을 시도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발리바르의 이론화는 아마 왜소하고 보수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합의 이론적 조건은 현재에는 갖춰져 있지 않다. 라이히의 '프로이트-맑스주의'가 정당했지만 불가능했다면, 이 같은 절합시도의 경우에도 사정은 동일하다. 역사유물론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론적, 정치적 조건을 넘어서는 맑스주의의 확장 기도는 유토피아적인 기획일 뿐이다.





<미주>

1) 에티엔 발리바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모순들],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43쪽.

2) 알튀세르적인 '진리의 소멸의 양태들'(수동적 소멸과 변형적 개입 속에서의 능동적 소멸)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알튀세르여, 계속 침묵하십시오!],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엮음, {루이 알튀세르}, 민맥, 1991, 97-102쪽 참조.

3) 에티엔 발리바르, [프로이트맑스주의의 교훈 ―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대하여], {문화과학}, 제3호, 1993년 봄.

4) 루이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1965), 두레, 1991, 236-46쪽.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은 단순히 스피노자적인 것만은 아닌데, 이는 그가 변증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헤겔을 재해석하여 역사를 '주체(들)도 종말목적(들)도 없는 과정'으로 정식화함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루이 알튀세르, "Sur le rapport de Marx &agrave; Hegel", 국역, [헤겔과 마르크스], {우리시대의 문학}, 6집, 1987년 여름호.

5) 에티엔 발리바르, [(철학의)대상:'절단'과'토픽'],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224쪽. '경제주의' 또는 더 일반적으로 '경제 이데올로기'는 핵심적으로 경제적 현상들의 자동성 또는 자생적 조절에 대한 이데올로기이다. 스탈린주의가 맑스주의적 경제주의의 반동성을 극한에까지 보여주었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경제주의의 반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6)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181쪽. 알튀세르는 특히 스피노자에게서 "이제까지 사유된 최상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즉각 거기서[{에티카} 1부의 부록] 가능한 온전한 이데올로기 이론의 모태를 보았고, 그것을 유익하게 사용했다. 단 차이가 있었는데, 나는 단지 개인적 주체성뿐 아니라, 사회적 주체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갈등적 인간집단의 주체성을 내세운 것이다(스피노자 역시 {신학­정치론}에서 그랬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백승욱 편역,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새길, 1996, 155쪽.

7) 루이 알튀세르, 이종영 역, [맑스주의와 인간주의](1963), {맑스를 위하여}, 백의, 1997, 280쪽.

8)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1976),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239쪽.

9)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182쪽

10) 루이 알튀세르, [맑스주의와 인간주의], 272쪽.

11) 맑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 또는 아포리아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 155쪽과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1993), 문화과학사, 1995, 83-86쪽을 보라.

12) 이데올로기 개념의 사용에서의 맑스의 또 하나의 곤란은 그가 케네, 스미스, 리카도 같은 고전가들의 정치경제학을 이데올로기로 정의하는 데서 봉착한 곤란이다.

13)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69),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103쪽.

14) 에티엔 발리바르, [테제들], {맑스주의의 역사}, 254쪽. 진실(진리) 및 따라서 정치의 장소로서의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들로는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와 함께 Etienn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eacute;rit&eacute;, Editions de l'Aube, 1994를 보라.

15) 정치 개념의 동요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역사유물론의 전화}를 보라. 같은 책에 실린 [조우커 맑스]; [국가, 당, 이데올로기];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도 참고할 것.

16) "두뇌 속에서 이 사유 과정[이데올로기의 발전]이 진행되는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조건이 결국 이 사유과정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이 사람들에게는 의식되지 못하고 만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데올로기란 도대체 있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돌베개, 1987, 79쪽.

17) "……그러나 또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맑스는 사람들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 속에서라고 말했던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맑스주의와 인간주의], 280-81쪽.

18)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160쪽.

19) 에티엔 발리바르, [(철학의)대상:'절단'과'토픽'], 213쪽.

20) 1977년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또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구성체들)와 무의식'의 관계의 문제가 '잠정적으로 해답이 없는 문제'라 말한다(올리비에 코르페 외, 송기형 역, [알튀세르와 정신분석학], {이론} 8, 1994, 350쪽). 따라서 '프로이트-맑스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거리두기를 염두에 둔다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개념화에서 라캉을 오해했다는 종종 제기되는 논점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21) 에티엔 발리바르,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178쪽.

22) 이것은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 현재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부정과 상관적이다. 1969년에 "프로이트가 무의식 일반의 이론을 제출했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일반의 이론을 제안하려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믿는다"([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106쪽)고 말한 바 있는 알튀세르가 1976년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서관모 엮음,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3)에서는 "프로이트는 그의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을 가공하기에 이르지 않는다"는 테제를 제출한다. 여기서 쟁점은 라캉의 '언어적인 것으로서의 상징성'이론이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가 "모든 것이 무의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 즉 언어와 그 법칙,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에 따라서 인식되는 그런 이론에 의존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사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과 관련해서 정신적인 것이 하나의 중심화된 통일성의 모델에 따라 구조화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고 라캉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한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상징성 개념을 언어적 상징성 이론으로 환원하고 프로이트의 '정신장치의 토픽'을 '무의식의 주체의 토폴로지'로 대체하여 칸트주의적 주체이론을 완성한 셈이라는 알튀세리앵의 비판으로는 피에르 마슈레/에티엔 발리바르, [라캉과 철학: 주체성과 상징성의 이론이라는 쟁점], 윤소영 엮음,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6을 보라.

23) 그러면서 그는 관념의 유효성의 조건을 해명하는 유물론적 토픽(또는 "기원, 주체, 의식이라는 관념론적 사고에 대립하는 토픽이라는 맑스주의적 사고")에 대한 자신의 최종 견해를 제시한다. "관념은, 아무리 참되고 형식적으로 논증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역사적으로 능동적인 것일 수 없으며, 계급투쟁 속에 채택된 대중이데올로기적 형태를 취하게 될 때만 역사적으로 능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루이 알튀세르, [오늘의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3, 53-54쪽). 이론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단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유효해지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4)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노트], {역사적 맑스주의}, 앞의 책.

25)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184-90쪽. 그러나 이것은 실은 발리바르 자신의 입장이다.

26) 에티엔 발리바르, [지식인들의 폭력: 반역과 지성],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225쪽.

27) Etienne Balibar, "Structural Causality", in A. Callari and D. Ruccio(ed.),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Wesleyan Univ. Press, 1996, p. 116.

28) 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acut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eacute;", La crainte des masses, Galil&eacute;e, 1997. 난감하게도 적절한 번역이 불가능한 이 civilit&eacute;는 '공동체의 창설/통치성'을 특징짓는 '문명/문화'(영어의 civility)이자 '인륜/예절'로서의 '시민적 도덕성'(독어의 Sittlichkeit)이다. 윤소영,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비판: '피디의 진실'(2), {베토벤: '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 공감, 1997, 240쪽. civilit&eacute; 개념에 대한 오해 및 '시민성'으로의 잘못된 번역이 초래한 희화화의 한 예를 네그리와 박기순의 대담에서 볼 수 있다. [네그리와의 대담], {비판}, 창간호, 1997, 106-107쪽.

29)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160쪽.

30) 같은 책, 161쪽.

31) 에티엔 발리바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맑스주의의 역사}; [소유에 대하여] 및 [민족형태에 대하여],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또한 윤소영, {마르크스주의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를 보라.

32) 발리바르는 맑스가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혁명적 전망에서 개인적 자유와 평등의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본주의적 시대의 획득물, 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를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자본} 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 정확히 인권의 정치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소유에 대하여], 95쪽;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108쪽.

33)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글; 동, ['세계'는 변화하였는가?], {이론} 제11호, 95년 봄/여름.

34) 세 가지 정치 개념에 대한 이하의 논의는 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op. cit.에 의거한다.

35) Etienne Balibar, Spinoza et la politique, PUF, 1985, pp. 117-18.

36) 에티엔 발리바르,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194쪽. '상징적인 것의 상상화'에 대하여 스피노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에티카}의 '제1종의 인식'에 대한 부분을 참고하라.

37)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160-62쪽. 주체화양식이란 '상징적 구조들의 작용 하에서의 주체의 구성 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suj&eacute;tion은 '복종'과 '주체화'(주체로 되기)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음에 유의해야 한다(알튀세르의 호명 테제 참조). '주체화양식'은 '주체화/복종 양식'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suj&eacute;tion)의 형태들"을 "복종(suj&eacute;tion)의 형태들의 상관물들인 한에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의 형태들"로 표현한다. Etienne Balibar, "Suj&eacute;tions et lib&eacute;rations", Cahiers Intersignes, n° 8-9, 1994, p. 89. 영어로는 subjection(suj&eacute;tion)의 형태들은 "subjugation(suj&eacute;tion)의 상관물인 한에서의 subjectivation(subjectivation)"이 된다. Etienne Balibar,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Joan Copjec, ed., Supposing the Subjec, Verso, 1994.

발리바르는 주체화의 양식들 또는 형상들로서 1) 고대적인 시민성에 조응하는 "일방적 말"로서의 주체화[복종]의 양식과 2) (알튀세르가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 부른 바 있는) "내면의 소리"로서의 주체화의 양식(이상 "Suj&eacute;tions et lib&eacute;rations")에 더하여 3) "권력관계들, 언어의 경제, 신체와 정신의 상상을 결합할" 또다른 주체화의 양식을 제시한다. Etienn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Yale French Studies no 88, Yale University Press, 1995, p. 156.

38) Ibid., p. 160. 참고로, 발리바르는 80년대에 이미 "맑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국가의 모든 역사적 형태가 생산관계들의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의 형태로 이중의 '토대'를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 178쪽, 주 57.

39) Etienn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op. cit., p. 160.

40) 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op. cit., pp. 39-53.

41) 발리바르는 '동일성들의 폭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로서의 시빌리테의 정치에는 맑스적인 것(사회적 시민성의 거시정치 수준의 것)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이단점을 이루는 들뢰즈·가타리적인 것(욕망의 미시정치 수준의 것)도 있다고 한다. 들뢰즈·가타리가 성찰을 반파시즘의 시각 속에 위치시킬 때 그들은 하나의 시빌리테의 정치를 채택하는 것이 된다. 발리바르는 다수자적 다중(majoritaires multitudes)의 반파시즘과 소수자적 반파시즘(minoritaires multitudes)은 각자 고유한 위험을 안고 있고, 양자간의 선택의 문제는 이론적 선택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정치기술적 문제라고 한다. Etienne Balibar, ibid., p. 160.

42) Etienne Balibar, "Preface" to Masses, Classes, Ideas: 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 Routledge, 1994, p. ?.

43) Etienne Balibar, "Spinoza, l'anti-Owell: La crainte des masses", La crainte des masses, pp. 87-94.

44) 안토니오 네그리, {야만적 별종}, 푸른숲, 1977.

45) {야만적 별종}에 대한 마슈레의 [서문]을 참조. "……이 일치는 이 일치의 의미와 통일성을 보증하는 진리적인 것(le vrai)의 내재적 목적론이라는 환상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가?" {야만적 별종}, 25쪽(번역은 다시 함).

46) 네그리가 중시하는 multitude라는 범주는 맑스적 대중과 들뢰즈적 소수자(또는 모든 동일화에 대하여 탈동일화가 발본적으로 우세하게 만드는 소수자-되기의 과정) 사이에서 동요하는 범주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정세 속에서 그가 제출하는 일종의 '지식프롤레타리아론'(윤소영)은 이 동요를 잘 보여준다.

47) 우선은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의 절합' 및 그에 따른 '다면적 해방들의 절합', '평등 속의 차이의 권리' 등과 같은 발리바르의 이론화와 친화력을 갖는 뤼스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윤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제5장, [뤼스 이리가라이의 '성적 차이의 윤리']와 동, {알튀세르를 위한 강의}, 공감, 1996, 제5강,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윤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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