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동력은 ‘차이’ 인정으로부터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다. 플라톤이 존재, 운동, 정지와 더불어 ‘같음’과 ‘다름’을 가장 큰(보편적인) 개념으로 제시했을 정도로 다름(=차이)은 우리의 사물 이해를 틀 짓는 근본적인 범주인 것이다.
변화의 동력은 ‘차이’ 인정으로부터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다. 플라톤이 존재, 운동, 정지와 더불어 ‘같음’과 ‘다름’을 가장 큰(보편적인) 개념으로 제시했을 정도로 다름(=차이)은 우리의 사물 이해를 틀 짓는 근본적인 범주인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도 차이는 핵심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며, 이것은 곧 현대사회, 현대문화에서 차이 범주가 핵심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상이란 늘 당대의 현실과 맞물려 진행되기에 말이다. 그러나 차이에는 매우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이 함축되어 있으며, 그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 차이의 여러 가지 의미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흔히 두 사물, 또는 여러 사물들을 고정시켜 놓고서 그 사물들이 인식주체인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들에서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 탁자와 저 의자를 놓고서 그 모양, 색깔, 감촉, 기능 … 등에서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좀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한 국가와 다른 국가의 차이(예컨대 일본과 중국), 한 담론과 다른 담론의 차이(예컨대 물리학과 생물학), 한 작품과 다른 작품의 차이(예컨대 운명 교향곡과 미완성 교향곡) 등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우리가 차이를 이야기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차이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그 아래에 일정한 존재론을, 곧 세계를 보는 근본적인 방식을 깔고 있다. 차이에 대한 이런 식의 논의는 바로 실체-성질 존재론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세계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들과 ‘실체들에 부수해서 존재하는’ 성질들로 나누어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존재론은 우리의 일상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존재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체-성질 존재론은 언어적으로는 주어-술어 구조에 해당한다. 저 책상과 이 의자 등은 실체들이다. 책상과 의자의 색깔, 모양, 감촉 … 등은 성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상은 노랗다”, “저 의자는 둥그렇다”고 말한다.
물론 존재론에는 이 실체-성질 존재론 외에도 여러 형태들이 있다. 세계를 입자들의 합성과 분해로 보는 존재론, 에네르기, 생명, 기(氣) 등의 연속적 흐름으로 보는 존재론 … 등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발견, 발명해낸 다양한 존재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언어가 전제하는 존재론은 실체-성질 존재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전제하면서 살아가는 세계는 바로 실체-성질 존재론을 통해서 이해되는 세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차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차적인 이해도 이런 존재론에 입각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경우에도 이 존재론에 입각한 논의를 펼치는 전통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나아가 현상학(現象學)에까지 이르는 일정한 흐름이 이 존재론에 입각한 사유를 펼쳤다.
사물과 사물을 변별하는 시각
차이의 개념이 이렇게 철학의 역사, 나아가 사유의 역사 일반에서 늘 문제가 되어 오긴 했으나,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이 개념이 새로운 맥락을 획득하게 된 것은 구조주의의 등장 및 신좌파 정치철학의 등장과 더불어서이다.
언어학적 맥락에서, 구조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소쉬르는 자신이 전개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차이라고 말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따르면 기호와 사물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앉는 데 쓰는 가구가 꼭 ‘의자’이고 물건을 올려놓는 데 쓰는 가구가 꼭 ‘탁자’일 이유는 없다. 전자를 탁자라고 부르고 후자를 의자라고 불러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빨간 불일 때 서고 파란 불일 때 가는 교통체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빨간 불일 때 가고 파란 불일 때 서는 기호체계이면 안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인, 임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지’와 ‘탁자’의 차이이고, ‘빨간 불’과 ‘파란 불’의 차이이다. 의미는 기호에 내재해 있지 않다. 의미는 기호와 기호의 사이에서, 그 차이를 통해서 성립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변별적인(differential) 관계야말로 의미 성립의 비밀인 것이다.
페미니즘운동, 동성애자들 등의
운동들이 도래하면서
이른바 ‘다원화 사회’ 가 온 것이다
다원화란 곧 차이의 증식을 함축한다
이제 오늘날의 사회사상은
이런 차이들을 인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의 힘을
구성할 것인가를 사유하게 된 것이다
말과 사물 사이의 자의적, 임의적 관계, 그리고 변별적인 관계를 통한 의미 생성이라는 사유는 그 후 사회와 문화의 분석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토테미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그 한 예이다. 한 부족이 늑대를 토템으로 하고, 다른 부족이 양을 토템으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자의 부족이 후자의 부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한 부족이 흰 곰을 토템으로 하고, 다른 부족이 검은 곰을 토템으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자의 부족은 희고 후자의 부족은 검은 것이 아니다. 거꾸로 되어도 토템체계에는 변화가 없다. 토템은 심리적인 것도, 기능적인 것도, 또 신비한 것도 아니다. 다만 구조적인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별적 관계이며, 문화란 변별적 관계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에는 그 한계가 극복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
차이 개념의 또 하나의 맥락은 1968년 ‘5월 혁명’을 전후해서 배태된 새로운 정치사상, 이른바 ‘신좌파’ 정치사상의 맥락이다. 19세기에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이 양분된 이래로 정치사상은 이 양분법을 깔고서 한 세기 동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1968년을 분기점으로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이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는 1945년 이후 형성된 ‘전후(戰後) 질서’에 대한 대중들의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도래하게 된다. 주로 선진국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운동들은 현대 정치사상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전후의 드골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서 전개되었으며, 정권을 바꾸었을 정도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의 고전’으로서 읽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를 비롯해 많은 사상가들이 이 5월 혁명의 영향을 받는다(프랑스어로 ‘68동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이다). 아울러 독일, 미국 등에서도 유사한 성격의 운동이 진행되었다(미국의 경우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 및 케네디 암살 이후의 미국 정세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일본의 경우에도 전후의 부흥이 낳은 숱한 모순들이 격화되면서 ‘적군파(赤軍派)’가 등장하고 (일본 관료들의 산실인) 도쿄대학이 초토화될 정도의 격렬한 운동이 전개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권에서도 ‘프라하의 봄’으로 대표되는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동시에 저항 운동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자유, 자본주의냐 사회, 공산주의냐’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하던 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 양자택일을 넘어서 두 체제가 공히 함축하는 모순들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한국을 예로 들면 박정희냐 김일성이냐가 아니라 이 두 체제가 공히 함축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암암리에 상부상조하는 좀더 심층적인 체제적 모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어떤 지배체제냐가 아니라 지배체제 자체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중’이 탄생하게 된다. 인민, 민중이 아니라 대중, 다중이 탄생한 것이다.
페미니즘등 다원화의 원천
특기할 것은 이런 운동들의 주체가 대체적으로 농민, 노동자들보다는 학생들, 지식계층들이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주체였던 시기가 지나가고 지식계층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오늘날에는 지식계층이 자본주의에 흡수됨으로써 과거의 저항력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아울러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자들, 청소년들 등의 운동들이 도래하면서 이제 사회 운동은 과거와는 성격이 상당히 다른 무엇이 되었다. 이른바 ‘다원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다원화란 곧 차이의 증식을 함축한다. 이제 오늘날의 사회사상은 이런 차이들을 인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의 힘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사유하게 된 것이다.
‘차이 근거는 뭔가’ 도 물어야
그러나 상식적 차이이든, 구조주의의 차이이든, 신좌파 정치사상에서의 차이이든 이런 차이들이 전제하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이 모든 차이들은 항상 ‘무엇과 무엇의 차이’이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 기호들의 차이, 집단들의 차이 등은 모두 무엇과 무엇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개념은 항상 이 ‘무엇’들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라고 말할 때, 책상 자체는 그리고 의자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책상과 의자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는 순간 책상과 의자가 계속 변한다면 차이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들뢰즈가 좀더 급진적 의미에서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분절해서 부를 때 이미 전제되는 동일성 자체를 비판함으로써 이들은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출처 : 한겨레
날짜 : 2005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