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변증법과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미친 영향
강유원
1.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글읽기를 위한 가이드 라인을 쓰겠다. ‘글읽기를 위한 가이드 라인’은 독자들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이 글을 쓰는 가이드 라인도 된다. 필자가 글을 쓰기 전에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라인을 명시적으로 만들어 놓고 쓰든 아니면 그냥 떠오르는대로 쓰든 최소한 ‘가이드 라인’이라 할만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라인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주면 독자들은 글읽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이 가이드 라인은 일종의 기획서라 할 수 있고 논문으로 치자면 ‘서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서론은 많이 써봤지만 가이드 라인은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어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지금으로서는 명료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많은 종류의 글이 있지만 그 글을 읽을 독자, 즉 타겟의 범위가 명백하게 규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철학사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를 다룬 글들은 그 글을 읽기 위해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춘 이가 읽어야 하는지, 읽은 다음에는 어떤 심화학습을 해야 하는지, 또는 글을 읽은 다음에는 현실에서 무엇을 유심히 볼 것인지 등에 대한 안내는 없고, 그냥 주제에 관한 간략한 서론과 본론, 그리고 본론을 반복해서 요약한 결론으로 그치곤 하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가이드 라인을 통해서 내 글의 독자들에게 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주고, 되도록 그들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독자가 글을 읽고 좌절한다면, 다시 말해서 글을 내다버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독자의 잘못이 아니라 필자의 잘못 때문이다.
내가 청탁받은 주제는 ‘헤겔의 변증법과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끼친 영향’이다. 이 제목에 맞추어 글을 쓴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계획을 잡게 된다.
1) 헤겔 철학에 대하여 : 헤겔의 변증법은 헤겔 철학 전반 속에서 살펴야 하므로 대개는 이런 이야기로 시작한다. 헤겔 철학에 관해 쓰는 것 역시 철학사 전반을 살펴야 하므로 그에 앞선 철학자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에 대해서도 얼마만큼은 언급을 하게 된다.
2)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 : 본격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에 관해 쓰는 것은 아주 쉽다. 참고할만한 책도 많다. 여기저기서 필요한 부분을 떼어다가 적당히 이어 붙여도 된다. 중간 중간에 학술적인 용어들, 헤겔에 관한 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어려운 말들을 잘 섞는 게 필요하다.
3) 마르크스와 그의 변증법 : 이 소주제에 대해서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쓰면 된다.
4)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 : 이 소주제가 이 글 전체의 핵심 내용이라 하겠는데, 이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탐구할 필요없이 참조해서 베낄만한 내용은 많이 있다.
이 정도의 순서와 내용으로 글을 쓰면 내가 부탁받은 주제는 기본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쓰지 않겠다. 참고문헌을 잘 뀌어 맞출 수만 있다면 철학적 주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읽는 이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독자의 무지를 탓하는 것에 익숙해진 풍토가 있기 때문에 필자는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글을 읽은 독자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을 하는 경우-이런 경우도 드물고 하려해도 방법이 수월하지 않지만-에는 일단 상대의 무지를 가볍게 탓하고 나서 글에 쓰인 것보다 약간 더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면서 답변을 하면 그런 독자는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가 있다.
필자가 글을 쓰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글이 필자에게나 독자에게나 현실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당장의 삶과 현실의 행위에 지침이 되는 글이 아니라 막연히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서’ 쓰고 읽는 글들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것은 굉장히 어이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회사원이 회사에서 쓰는 업무 보고서는 그의 연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따라서 만약 그가 ‘업무 보고서 잘 쓰는 법’이라는 글을 대하면 엄청나게 신경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매뉴얼을 쓰는 사람은 당연히 책임감있게 글을 쓸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주제의 글은 이런 효용도 없고 약간의 흥분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러니 종이만 채우면 끝나는 분위기 속에서 말잔치를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쓰는 글 역시 일개 매뉴얼만도 못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 글이 예상하는 독자는 다음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1) 헤겔과 마르크스는 고사하고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 심지어 철학이 무슨 굶어죽을 소리를 지껄이는 나부랭이라고 여기는 자들 : 이 글은 이런 독자들에게 두가지 반대되는 결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알고보니, 내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살았구나’ 즉 ‘내 머리가 이게 그냥 붙어 있는 거였지 생각하는 무슨 기능을 하는 게 아니었구나’,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지금까지처럼 살거면 차라리 떼어놓고 몸통, 팔, 다리, 생식기만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혹시나 하고 읽어봤는데 역시 철학한다는 인간들은 쉰소리나 하는 족속들이로군’이라는 종래의 확신을 굳게 해주는 것이다.
2) 헤겔과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철학에 대해서도 한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이 글을 이들에게도 역시 두 가지 반대되는 결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역시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 옳은 것이었고 더욱 더 그러한 지식 쌓기에 매진하게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의 공부가 아무런 의미없는 현학이었음을 자각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사전에 미리 어떤 철학적인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물론 요구되는 바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상식이다.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탄탄하고 현실적인 근거 위에서 생각하는 능력같은 것은 이 글의 독자들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사전 등을 찾아봐야 할 일은 없을 것이며,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관한 전문적인 서적을 뒤적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용어나 학설은 애초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관련된 문헌들을 나름대로 찾아 공부해보는 것까지 내가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고 생겨나는 모든 의문들에 대해서는 gaudium@email.com으로 이메일을 보내면 답을 해줄 것이다. 질문을 하든, 반론을 하든 관계없다. 다만 ‘헤겔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따위의 부탁은 사양한다. ‘나는 헤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것을 읽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해 봤는데 모르는 게 이딴 것이니 그것이 궁금하다’는 식의, 달리 말해서 자기가 해온 짓과 노력을 밝혀달라는 것이다. ‘헤겔에 대해서 알려주세요’라고 부탁하면 ‘열심히 알아 보세요’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2.
요즘 나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고 하는 독일의 문학비평가의 자서전인 <사로잡힌 영혼>(빗살무늬)이라는 책을 마악 다 읽었다. 다 읽었으니 덮어두고 잊어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마음에 드는 책은 두고두고 들춰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책의 구절에 비추어 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평소에 느끼던 바를 그 책에서 말해주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공감했던 구절만을 들여다보고 그것만을 기억한다. 그렇게 되면 책읽기는 지식 넓히기라는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결국 책읽기는 시간 버리기요,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는 돈 버리기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맘만 제대로 먹으면 책읽기에서 많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그 맘은 바로 ‘맘 비우기’, ‘맘 버리기’다.
마음을 비우겠다고 마음 먹으면 되는 것이요, 이는 달리 말해서 편견없이 책을 읽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이 편견이든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뭔가를 읽는 일 자체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물음은 탐구의 출발점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니 질문 자체를 할 수가 없고 물음, 즉 궁금한 게 없으니 뭘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책 안 읽는 사람은 애초에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다. 하여튼 <사로잡힌 영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알고있는 것, 그리고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유태인들은 성이나 궁전을 짓지도 않았고, 탑이나 성당, 왕국을 건축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말을 이어나간 것 뿐이다. 지구상에서 모세교만큼 말과 문자를 더 높이 숭상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뤼쪼프 광장의 회당에서 기대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토라 두루마리가 보관된 성궤 옆에 서 있었던 게 어느덧 육십년이 넘었다.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대표 기도를 맡은 이가 조심스럽게 그 두루마리를 꺼내서는 모세 오경이 적힌 양피지를 회중 앞에서 높이 치켜드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경외감에 몸이 얼어붙은 신자들은 그 문자 앞에 머리를 숙였고 나 역시 감동받은 나머지 숨이 멎었다.”
이 장면은 문자 또는 말이 가진 힘을 아주 또렷하게 보여준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왜 거기서 얼어붙는걸까. 여기서 ‘경외감’이라 표현된 것은 달리 말하면 ‘공포심’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바로 이 공포심인데, 말이나 문자로 이걸 불러 일으킬 줄 아는 건 정말 대단한 위력이다. 그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권총이나 각목을 곁들여서 말을 하는 것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고 모세교처럼 ‘신의 응징’이라는 고단수의 방법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예수가 창시한 기독교도 말을 가지고 힘을 쓰는 건 모세교와 마찬가지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아 말씀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복음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라 하는 것인데 이는 이치와 법칙이다. 그것은 문자 이외의 방식으로는 형상화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래는 문자로도 형상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문자는 억지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상화된 문자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신의 말을 기록한 문자가 힘을 갖게 되다보니 문자중심주의가 만연하게 된다. 문자 이전의 세계자체가 의미 있는 대상이 아니라 문자 속에 들어 있는 세계만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한번 이런 습관에 길들여지면 문자로 되어있지 않은 것들은 생각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는 기묘한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본래는 기록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참다운 모습인데, 그것이 기록된 다음에야 비로소 참다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사실 고등종교는 문자를 철저하게 배제했었다. 귀로 들리는 말만이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있지만 ‘예수께서 쓰셨다’는 없다. 불교의 경전들은 ‘如是我聞’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은 있었지만 부처님의 글은 없었다. 공자의 제자들은 ‘子曰’이라는 말로써 논어를 시작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이다.
이들이 떠들었던 초월적 진리를 들은 인간들은 말을 글자로 형상화했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 중심주의가 시작되는 계기다. 이제 글자는 말과 똑같은 진리값을 가지게 되었고 글자를 숭배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해 어려운 글을 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론은 본래 현실보다 앞선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론이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그 현실보다 이론이 먼저 있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보기 전에 이론부터 보면 철학자들의 농간에 놀아나게 된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이론화 작업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 마음에 새겨두자: 눈에 보이는 현상 먼저!
3.
헤겔은 독일의 철학자다. 변증법으로 유명하다. 그의 철학이 세상을 바꾼 증거는 없다. 그가 없었다해도 세상이 별 탈없이 굴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이 말이 세상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는데 사람의 인생을 바꾼 증거는 제법 된다. 70년대나 80년대의 한국 사회는 폭압적 사회였다. 그래서 ‘변증법’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죄다 빨갱이 책이라 간주해서 그 책을 가진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곤 했다. 그렇게 족쳐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불구가 되곤 했다. 이게 아마 변증법이 한국 사회에 끼친 가장 뚜렷한 영향이라 할 것이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자. 오늘날 우리는 헤겔이 썼다고 하는 저작들을 읽어볼 수 있다. 독일어로 된 전집, 영어나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된 것들을 찾아서 읽을 수 있다. 그것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자신의 삶을 바꾸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한평생 그의 저작을 연구하겠다고 마음먹고 그 일에 매진한 사람이 있다면 그 경우는 그의 저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극소수에 나도 해당한다. 나의 30대는 헤겔 철학공부에 매진했던 시기니까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이런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은 헛소리이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무시해도 그만이다.
헤겔의 저작을 읽고 연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제대로 읽으려면 독일어를 익혀야 하고 독일어를 잘해도 그의 책만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드니까 이런저런 참고서를 사서 읽어야 하고, 읽는 것만으로는 안되니까 이해한 만큼 글로 써봐야 한다. 기껏 고생해서 이런 짓을 해도 들어간 노력과 시간과 돈에 비해서 남는 게 별로 없으니 그 공부를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투덜거리거나, 그냥 투덜거리기만 하면 쑥스러우니 어려운 말을 가져다 붙이면서 자신이 했던 공부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기 마련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싹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시하기 싫고 그래도 뭔 소리를 하는지 알고서 무시하고 싶을 때에나 헤겔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모든 이론은 나중에 나오는 것이다. 헤겔의 저작들을 앞에 놓고 그가 아무 짓도 안하고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채 방구석에 처박혀서 오로지 책만 썼다는 판단을 바탕에 깔고 그의 책을 대하면 안 된다. 그의 책에 쓰여진 모든 개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미리 정해놓고 딱 그 경우에만 맞춰서 썼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책을 이해하는 일이 너무나 쉬울 것이다. 철학책이 무슨 실험 보고서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책을 읽다보면 도무지 그가 일관성있게 변증법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다는 걸 금방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걸 찾아내서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추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헤겔더러 해보라고 해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힘겨운 일을 여기서 해 볼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그의 생각의 큰 줄거리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작정이다.
헤겔은 독일 사람이었다. 이 때 우리는 오늘날의 독일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지도를 펼쳐서 보고 역사책 등에서 그 시대의 일반적인 상황을 읽어 대강이라도 머리 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살던 시대의 독일은 한마디로 어중간한 세상이었다. 특별히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선진국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개발의 국가도 아니었다. 사상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나라도 아니었으며, 영국처럼 산업혁명이 일어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미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헤겔 개인의 삶 역시 그렇게 잘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헤겔이 쓴 책들은 대게 세 가지 범위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째, 젊은 시절에 혈기에 차서 쓴 비판적인 글들. 이 글들에는 그가 살아가던 세상의 모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담겨있고 그 세상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성적 사유들이 전개되어 있다. 즉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 글들을 통해서 판단해보면 헤겔이 살던 시대의 독일이라는 나라의 어중간함이 잘 드러난다. 세속적인 욕구와 제도들이 위력을 얻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세력이나 제도들이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있는 모습.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내가 내린 판단이 제일 중요하다’는 이른바 개인주의적 자각이 싹트고 있는데도 여전히 낡은 전통에서 유래된 관습들이 그들을 얽매고 있으며 그것을 확 떨쳐 내버리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어중간함, 이런 것들이 보인다. 헤겔은 이런 상황을 한마디로 ‘분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둘째, 그야말로 제도적인 요청에 의하여 쓴 글들. 그의 대작이라 알려진 <논리학>이나 <엔치클로패디>, <법철학> 등이 이에 속한다. 그는 대학에 취직하기 위해 뭔가 학문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책을 써야 했는데 그것이 그의 논리학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책을 위한 책이고 그런 까닭에 생생한 현실을 담고 있지 않다. 어쩌면 그는 이 책을 쓰고 나서 이 책이 과연 현실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엔치클로패디>나 <법철학>은 대학교수가 되고난 다음에 강의를 하기 위해 교재로 쓴 책들이다. <엔치클로패디>의 본래 제목을 우리 말로 옮기면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인데, 철학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총망라하여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오늘날 보면 어이없는 이야기도 많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위에 속하는 책들 모두의 공통점은 그 책들이 기본적으로 이른바 ‘철학적 용어’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당시에 철학한다는 사람들만 아니라 교양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책을 쓴다면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써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뻔한 상황도 굉장히 추상화해서 쓴 경우가 많다.
세 번째 범위로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 주목해둘 책은 그의 <정신현상학>이다. 이 책은 흔히 그의 청년기 최후의 저작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다 보니 첫 번째 범위에 속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두 번째 범위에 속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어려운 말로 쓰여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청년기의 철학적 사유가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이 노력하기만 하면 그가 파악했던 현실 또는 세계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현실과 그것에 대한 그의 반성적 사색의 대응이 나타난 것이 <정신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그가 현실을 이해하고 개념적으로 정리하는 방식, 어쩌면 우리가 ‘변증법’이라는 말로 편리하게 정리해 버리면서 제쳐 버렸던 그의 사색 방법의 독특함을 짐작할 수 있게도 해준다.
세 번째 범위에 속하는 책들은 그가 쓴 것들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강의 노트를 묶어서 펴낸 것들인데, 뒤에 ‘강의’라는 말이 붙은 역사철학강의, 종교철학강의, 미학강의, 철학사강의 등이 이에 속한다. 시간 없고 노력낭비가 싫다면 읽지 않아도 무방한 책들이다.
4.
변증법에 관한 책은 많지만 그것들을 아무리 읽어도 변증법이 뭔지를 알기는 정말 어렵다. ‘정,반,합’의 삼박자라고 하기도 하고, ‘즉자, 대자, 즉자대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사변적 방법’이라는 말도 있으며 ‘대화의 방법’이라는 설명도 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글은 변증법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 어떤 학술적인 규명을 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글의 관심은 헤겔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그것을 이해하고 파악한 그의 방식에 중점을 둔다. 이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관심도 아니다. 인식론이라 하면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게 ‘인간 일반’, 즉 현실 상황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인간이고, 그가 바깥 세상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를 탐구한다. 얼핏 보기에는 보편적 인간의 세상 알기를 탐구하므로 누구나 그 방식을 따르기만 하면 세상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에 그처럼 보편적인 인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들어가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이다.
헤겔은 보편적인 인간의 인식론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제시하는 세상 알기 방식 역시 일반적인 의미의 인식론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물가에서 아무리 수영하는 것을 연습하면 뭐하겠느냐, 수영을 배우려면 일단 물에 들어가고 볼 일이다.’ - 이게 헤겔이 한 말이다. 그러니 그의 세상 알기 방법은 ‘구체적 상황 속에 들어가서 그 상황을 읽고 그것을 읽은 내 머리 속의 생각도 스스로 다시 읽고, 또 그렇게 읽어서 세상의 현실과 대조해서 옳은지 살펴보고...’ - 이런 과정을 밑도 끝도 없이 해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방식에 대해 억지로라도 이름을 붙여 보자면 ‘구체적 상황 속에서 앎을 형성해나가는 역사적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정신현상학>>이다. 그는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게 진리가 아님을 아는게 정말로 알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 일은 정말 어렵다. 틀린 것을 참으로 알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알았다’ 치자.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알아낸 것에 대해서 뭘 적어 놓는다 - 여기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무엇’이라는 대상, 그 대상을 알아내려고 굴린 내 머리, 그리고 내 머리로 만들어낸 앎.
이 세 가지의 관계를 한번 보자. ‘무엇’은 본래 무엇이 아니었다. 그게 내 머리로 신경을 쓰면서부터 무엇이 되었다. 그러니까 일단 내가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그 ‘무엇’은 나와는 아무 관계없이 완벽하게 저쪽에 그저 있을 뿐인 대상이 아니라 나라는 주관과 관계된 대상이 된다. 그리고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신경을 쓴다는 것은 내 머리가 그 대상에게 다가가고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 머리 역시 대상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내 머리 자체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는 객관을 담고 있는 주관이 된다. 이처럼 내 머리와 무엇이 서로 만나면, 그 순간 내 머리와 무엇은 본래의 성격을 잃고서 상대방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내 머리와 대상은 서로에게 오고 가는 일을 하고 이것을 헤겔은 ‘운동’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운동을 통해서 내 머리는 무엇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낸다. 그런데 이 ‘뭔가’, 즉 앎은 오로지 내 머리로써만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내 머리와 무엇이 서로 작용해서 만들어낸, 달리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혼합물’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제 삼의 것이 과연 제대로 된 혼합물인지 아닌지를 검증해보는 것이다. 이 검증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까? 애초에 구체적 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검증기준은 있을 수 없다. 그 기준은 내 머리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제 삼의 것의 진리값을 알아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막힌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현실에 되돌려서 다시 살펴보기로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거기서 그냥 멈추어서 그 단계에서 얻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것 역시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헤겔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그가 별종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아무 것도 믿을만한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성서에 비추어 보고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판별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흔들림 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현실에서 닥치는 대로 그때 그때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해서 알아낸 것을 당분간 진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는 상황이 바뀌면 이전에 올바르다고 알고 있던 것이 그릇된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면 그때 다시 바뀐 상황이나 흘러간 시간을 감안해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앎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헤겔의 철학 사상을 설명하고 이해할 때 ‘변증법’이라는 말을 굳이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늘 의문을 품는 편이다. 위에서 말한 앎의 형성과정은, 앞서 말했듯이, ‘역사적 방법’이라 하면 그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식은 앎을 만들어내는 과정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거나 체득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사회,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해 보려면 바로 이 상황을 밑바닥에 깔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 역시 앎의 방식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게 된다.
앞서 설명했던 앎의 방식을 삶의 방식 세우기라는 주제에 비추어 다시 더듬어 보자. 출발점은 명백하다.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 모래밭에서 연습만 하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수영을 배울 수 없고, 수영은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앞서 말했다. 앎의 출발점이 물 속에서 수영 배우기를 시작하고 있는 사람이듯이 삶의 출발점 역시 가족, 사회, 국가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에서 완전히 격리된 개인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물론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논리적이라는 게 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어떻게 눈앞에 있고 자신이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는데 없다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헤겔이 이런 방식을 취하는 까닭은, 그의 머리 속에서 아무리 멋있고 훌륭한 삶의 체계를 구상해 보았자 그게 결국에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프랑스 혁명의 파도가 유럽 여기저기로 넘쳐대던 때였다. 전통적인 사회, 국가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곤 했다. 고상한 품위를 뽐내던 유럽의 왕조들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촌놈인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부랑아 비슷한 무리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 와중에 무엇을 지킬 것이며, 무엇이 고상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헤겔이 ‘힘이 곧 법’이라는 괴상한 패권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그 부랑아 비슷한 무리들 속에서 넘치는 또 다른 활력을 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 낡은 것을 철저하게 극단으로까지 파괴해 버리는 힘이었다. 바로 그 파괴력에 헤겔은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살던 독일은 낡고 구질구질한 모든 정치 시스템을 상징하고 있기도 했다.
이야기를 다시 삶의 방식으로 되돌리자. 세상에 믿을만한 것, 지속되리라 여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게 헤겔의 눈앞에 놓인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외면하고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개인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일단은 현재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담담한 마음으로 관찰할 것이다. 그 중에서 수긍할만한 것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묵묵히 따르든지 아니면 고칠 방도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각각의 개인의 몸이 이미 담겨있는 현실이라는 무엇, 그 현실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주관,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서로 마주치고 오고 가면서 생겨난 앎 -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앎은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미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앎이므로 이는 곧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이 차원에서는 앎이 삶이나 행함과 다르지 않다. 흔히 말하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이 차원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삶의 방식이 맘에 들면 그는 그것을 고집할 것이고, 방식이 맘에 들지 않으면 더 나은 방식을 찾든지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달리 말하면 세상을 바꾸거나 내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일도 백지에 유토피아를 그리는 방식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나는 헤겔이 취했던 앎의 방식과 삶의 방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현실을 수긍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 자세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아무 것에나 쉽게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알아낸 앎에 적당히 만족하고 사는 이가 있는 반면, 분명 지금의 앎에 만족하지 않고 그 길이 ‘절망과 회의로 가득찬 길’이라 해도 뭔가 확실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 믿고 갈 데까지 가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앎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앎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것을 헤겔은 ‘개념의 운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시 저기에 있는 무엇을 이리저리 굴려보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의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정신인 사람은 지금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과의 교감 속에서 얻어진 방식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다시 현실에 비추어보고, 더 나아가 철저히 현실에 수긍하든 아니면 현실을 갈아엎든 할 것이다.
이처럼 앎에서든 삶에서든 현실에 입각하되 철저하게 하는 것, 갈 데까지 가보는 데에 헤겔의 사유가 가진 힘이 있다. 현실과는 무관한, 투명하고도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현실이 어떠하든 그 진리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철저한 사람들인 듯하지만 그건 뜻밖에도 힘든 일이 아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내 알 바 아니다’, ‘난 이거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그리 어려울 게 없다. 한번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그 안에서 맨 정신으로 있는 일이다.
5.
마르크스만큼 세상에 많은 영향을 준 철학자는 없다. 이는 그가 철학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말대로 헤겔에서 철학은 끝났고 그는 그걸 현실에서 행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철학을 버린 최초의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싫든 좋든 우리는 그를 인정해야 한다. 그 사람의 이름을 걸고 벌어진 모든 것이 그의 본뜻에서 유래한 것이든 아니든 그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그의 본뜻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건 ‘마르크스학’을 하는 이들의 몫이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따질 문제는 무엇인가? 앞서와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를 따질 때도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 먼저’라고 하는 원칙을 되새겨야 한다.
역사는 그렇게 쉽게 한순간에 바뀌는 법이 아니니 헤겔이 살던 때보다 세월이 더 나아질 것도 나빠질 것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마르크스가 살아간 시절은 이른바 ‘위기’라는 분위기가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던 때였다. 후진국 독일에서도 선진국들에서처럼 노동자가 생겨나서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있었고, 그나마 조심스럽게 전개되던 전통에 대한 비판도 막가는 형태로까지 표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청년기에는 여전히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끼리 말로만 떠들고 있었다. 마르크스 역시 ‘박사클럽’이라고 하는 이런 지식인 패거리에 끼어 있었으나 래디컬한 그의 성격은 곧바로 이들에게서 염증을 느꼈다.
마르크스는 이런 염증을 자기 안으로 가두는 계기로 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계속했다. 그는 헤겔이 말했던 물 속에서 수영 배우기를 특별한 깨달음 없이 계속해 나간 것이다. 그의 철학이 힘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헤겔은 말로는 물 속에서 수영 배우기를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교수가 되기 위한 책도 쓰고 학생들을 위해 구색 갖춘 교과서도 썼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자본>을 쓰기 위해 대영박물관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는 끊임없이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 딴 짓을 하느라 원고에만 전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철저함이 그의 평생을 밀고 나간 힘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마르크스를 ‘예언자’로 취급한다. 이건 정말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한 것이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 해부학자였다. 눈앞에 놓인 현실을 철저하게 해부하여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밝혔으며, 너무 생생해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앞에 내놓은 사람이었다. 이런 해부학이 뭐 그리 대수로우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여기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소중간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보자. 그는 소중간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조만간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리라는 대세를 읽지 못한 채 기존 체제에 빌붙어 있다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는 소중간계급의 그러한 작태를 비난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아무도 옹호하지 않는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냉담하게 짓밟고 가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 대세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그냥 밟히는 것이다. 알아도 밟히는 자는 밟힌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능력도 안되면서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면 몸도 망가지고 마음에는 상처만 입는다. 또한 세상을 제대로 보는 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본다. 원하지 않는 현실이라 해도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에 의해 내가 밟힌다 해도 두 눈을 부릅뜨고 보는 이는 진리를 아는 이다. 이미 헤겔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담하게 볼 것을 촉구했었다. 그리고 그 현실이 국가와 사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제도화되는지를 관망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요구는 거기까지만이 아니다. 그는 이 모든 사태가 흘러가는 시작과 끝, 즉 시간까지도 들여다 볼 것을 요구했다.
세상에서 시간만큼 강하고 무서운 게 없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마모되고 덧없이 되어간다. 오죽하면 셰익스피어는 그의 소네트에서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시간이여”라고 노래했을까. 이처럼 무서운 시간의 시험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미래 역사의 주인일 수 없다. 그러니 헤겔과 마르크스 두 사람은 모두 ‘갈 데까지 가본다’, ‘하는 데까지 해 본다’는 자세와 더불어 ‘버틸 때까지 버틴다’는 태도를 고수했었다. 이는 누가 누구에게 전수했고,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냥 그들의 삶과 앎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갖게 한 일종의 이성본능이다.
그렇지만 다른 점도 있다. 앞서 나는 헤겔이 몇 가지 구색 갖추기용 책을 쓴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갈 데까지 가 본다. 하는 데까지 해 본다. 그리고 버틸 때까지 버틴다는 원칙을 근본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이 원칙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탁상공론에 머무른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삶에서 충실히 구현했던 것이다. 또한 헤겔은 온갖 것-그가 ‘백과사전’을 썼던 것을 돌이켜 보라-에 이 원칙을 적용시켜보려 했다면, 그리하여 더러는 허황돼 보이는 이야기까지 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면, 마르크스는 철두철미 이 원칙을 자본주의적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통찰하고 이끌어가는 데에만 적용했다. 이것을 우리가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든 말든 그것은 상관없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D.H. 로렌스의 소설 첫 머리를 한번 읽어보자: “현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큰 재난은 이미 발생했다.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삶의 아담한 터전을 마련하고, 조그마한 새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미래로 향하는 평탄한 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장애물을 넘어 기어 오른다. 하늘이 일백 번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체로 콘스탄스 채털리의 처지였다.”
헤겔과 마르크스도 콘스탄스와 마찬가지의 처지가 아니었을까? 마르크스가 좀 더 심각했을지도 모르고.
< 2002년 가을 [관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