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공공영역이 문제인가
공공영역의 문제는 흔히 시민사회론과 결부된다. 시민사회론이 우리 사회에 부각되면서 그간 공공영역 혹은 공공성의 문제들도 함께 제기되었다.
그러나 굳이 시민사회론과 결부시키지 않아도 공공영역/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공공영역/공공성에 대한 정의가
한정적이며, 이에 대한 논의도 아직 초보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사실 최근 ‘문화적 공공영역의 출현’을 논의1)한 것만 해도 생소했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
공공영역을 문제화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여, 공공영역은 오늘날 이미 복잡한 문제지형으로 출현하고 있다.
가령 정치적으로 국회의원들의 대표성 문제 등이, 경제적으로는 노동인구의 파산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는 의료체제 등 공공성의 위기 등이, 생활상으로는 도시공공서비스의 문제 등이, 교육적으로는 교실의 붕괴 문제 등이, 문화적으로는 청소년보호법 등에 의한 문화전쟁의 문제 등이, 예술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문제 등이,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공공적 정체성의 문제 등이 겹질러지고 있다. 과연 이러한 복합적인 사회문제군이 공공영역/공공성이라는 공통의제로 쟁점화될 수 있느냐는 분명 논란거리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복합적인 사회문제군’과 ‘공공영역/공공성 의제가 상호 피드백됨으로써 그 각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형성과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로지르기 효과를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사실 한국사회에서의 공공영역은 제대로 제도화되어 본 적이 없으면서도 항상 이미 헤게모니 투쟁의 물질적 장소들이었으며, 최근에는 그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어 이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개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공공영역/공공성의 문제는 이제 사회구성과 주체형성의 문제로 접속시킬 때 새로운 실천가능성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공영역에 대한 이론은 위르겐 하버마스에 거의 의존한다. 하버마스는 최근의 논의 『사실과 규범 사이에서』(1996)에서 공공영역을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산출된 사회적 공간이라고 정의한다.2) 이러한 정의는 공공영역이, 논쟁을 통해 민주적 정당을 획득하는 기능을 수행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여전히 의사소통행위이론을 고수하면서 공공영역의 문제성을 그것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다. 공공영역의 문제성은 의사소통행위로만 해결할 수 없는 중층적 문제지형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영역에서 혹은 공공영역화를 위해서 의사소통적 담론의 정치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공공영역의 민주적 주권이란 구체적인 제도 속에서 구현될 수 없고 토의와 참여를 증진시키는 민주적 절차 속에서 발견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표명할 뿐이다. 예컨데 빈민의 주택문제는 의사소통으로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국회에는 그런 류의 의사소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 절차에 대한 끈질긴 요구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봉합시켜버리는 ‘구체적 제도’들의 민주적 개혁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예술계와 학계, 신문방송과 같은 여론장치들은 이미 공공영역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제도와 장치들에 담기는 내용의 공공성에 반해 이런 내용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제도적 장치 그 자체의 공적 성격과 공공성의 문제는 크게 주목되지 못해 왔고, 이 장치들의 구성과 운영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의 고유한 권한의 문제였으며, 그 권한의 행사방식은 전문가들의 권위라는 후광 밑에 가려져 왔고 철저하게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3)) 구체적 제도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에게 대리운전시킬 수 없는, 복잡한 현실조건들과 맞물린 제도 자체의 조직이미지4) 및 그 장치의 테크놀로지 문제이다.
우리 사회의 공공영역들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화/민주화/유연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은 그나마 민주화운동의 효과 때문이지 의사소통행위의 ‘성숙한’ 배분 때문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공공영역 스스로의 전향적 태도에서 비롯되기 보다, ‘민주화된’ 사회적 아비투스가 형성되는 조건하에서 지배체제의 현실적인 새로운 재영토화를 성사시키는 재배치 지표들인 것이다. 공공영역과 관련된 각종 기구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재생산의 비밀을 간직한 현실성의 재배치-신자유주의의 실천!-에 불과하다. 그 재배치의 성격은 좀 더 진일보할 수도 있고 아니면 퇴행할 수도 있으며, 훨씬 더 영악해진 리바이어던일 수도 있다. 가령 99년 말 국회에서 통과된 통합방송법의 경우 시청자주권 개념이 도입된 점은 진일보하나 전체적으로 방송개혁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이라는 공공영역은 재단권력과 대학권력의 횡포, 그리고 교육당국의 ‘개혁적’ 지원 아래 ‘사적인’ 거래의 장소로 둔갑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새로운 공공영역으로 출현한 사이버공간은 지배체제에 의해 얼마나 침탈당하고 있는가.
공공영역의 문제지형은, 의사소통행위로 환산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제도의 민주화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중층성이 가로질러지고 있다. 우선 우리는 공공영역에 대한 단순화된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적 영역과 이분법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공공영역이라든가, 혹은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공공영역이라든가, 혹은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공공영역이라는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공영역이 중성적 사회적 공간으로 이데올로기화되면서 다수성의 논리에 따라 지배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태도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공공영역이라는 것은 애시당초부터 사회적 구성에 따르는 투쟁의 장소이자 헤게모니의 장소인 것이며, 그것은 사회적 제도와 공론장에서의 문화효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대부분의 공공영역들은 다수성5)의 논리로 주체, 언어, 욕망, 정체성, 문화, 정치, 경제, 예술, 교육, 여가, 놀이, 취향, 감수성, 담론 등등을 호출하고 배치하거나 배제시켜 왔다. 그러나 이제 공공영역은 시대적 변호와 함께 오래된 습속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거나 지배체제 내 ‘구조조정’으로 스스로 위기를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더군다나 전문가들이나 사회운동가, 그리고 대중들의 공공영역에 대한 새로운 실천성과 참여도의 부여는 공공영역의 지형도를 새로 작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공공영역의 문제지형은 이미 만들어진 공공영역에 대해 해체를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창발적 과제를 안고 있다.
2.공공영역의 개념전화와 지형도 그리기
공공영역과 사적영역
공공영역의 개념 사용에 있어서 우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한 오해나 양자를 고정적으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전통적 이분법을 폐기할 필요가 있다. 맑스는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모든 사적 영역은 정치적 성격을 갖거나 아니면 이미 하나의 정치적 영역이다. 또는 마찬가지로 정치는 사적 영역을 갖는다.”6) 이처럼 공적 경험과 사적 경험은 각각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공공영역과 공/사 이분법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7) 페미니스트들은 공공영역이라는 개념이 근대 서구 시민사회의 성립과정에서 공/사의 영역 분리를 통해 확립되었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의제를 고유하게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가족/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의 감금’으로부터 해방되어 남성과 동등하게 공공영역에 진출하는 문제를 담론화하는 과정에서였다. 공/사의 이분법은 ‘남성=공정주체, ’여성=사적 주체‘라는 또 다른 이분법적 정체성 효과를 생산하고 있었고,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반발하였지만, 그러나 이러한 초기 페미니즘은 남성 정치철학자들이 구획한 공/사 이분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2물결을 타는 페미니즘에 들어서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는 구호 아래 공/사 이분법을 극복하려 했다. 60년대의 성혁명을 이끈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 강간, 임신, 낙태 등의 사적인 것들은 더 이상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들과 분리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도 때때로 “사적인 것에 관심을 국한한 나머지 기존의 공적 영역에 대해 사고하지 않았으며,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과의 관계 재구축에 대한 문제를 방치한다”8)는 지적을 받고 있다.
우리가 공/사 이분법을 폐기한다는 것은 공과 사를 동일시하려는 것도 아니거니와 속된 말로 ‘똥/오줌’(공/사)도 못가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또는 공공영역을 사적 이해관계로 도구화하는 것을 승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선과 관계망을 새롭게 획정하고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들의 내재적 분절성이 한편으로는 확정적이고 영토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변적이고 조합적인 구성에 따라 규정됨을 인지하고, 또한 그것들의 기능과 의미, 사회구성과 주체형성의 맥락을 역동화하려는 데에 있다. 최근의 페미니즘 논의들 중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모색하는 시민사회론적 맥락에서 페이트만(C.Paterman)은 공/사의 영역분리를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그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정치는 부엌과 육아실과 침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바꾸는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공영역의 원리를 사적 영역에 철저히 적용할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앤 필립스(A. Phillips)나 아이리스 영(I. M. Young)은 공/사 구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공공영역의 성격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신보수주의의 공격에 저항하며 새로운 복지국가 모델에 기초한 앤 쇼우스탁 사쑨(Anne Showstack Sasson)은 남성과 여성에게 공히 ‘돌보는 시간’(caretime)에 대한 권리부여를 요구하는 ‘시간의 정치’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그물망 형성으로 말미암아 이미 공/사분리적 사고는 어렵게 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9)10)
여성은 아마도 공/사 이분법의 가장 큰 피해자일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에서 지적해온 ‘여성=사적 주체’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공적 주체로 참여하면서도 사적 주체로 괄호쳐져 왔다는 점에서 더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전통적 개념의 공공영역에 편입되어 왔으면서도 공적 주체로 설정되지 못한 측면이다(예컨데, 19세기의 일하는 어머니들). 다른 하나는 공공역역으로 재정의될 수 있는 영역들이 전통적 개념에서는 사적 영역으로 정의되어 왔기 때문에 공적 주체로 인정되지 못한 측면이다(예컨데, 가정주부).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또는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별하는 경계선 및 그 관계망을 새롭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가족구성체는 ‘상식적’ 범주에서는 전적으로 사적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가족 역시 다른 한편으로 공공영역임을 주장하려 한다. 먼저 잠정적으로, 사회적인 생산관계 및 공적인 의미관계가 형성되는 영역들에 대해서 공공영역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 역시 그러한 관계들이 형성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가족은 공공영역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족은 한편으로는 인류적 생산관계를 특정화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내에 이접된다. 맑스가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가치와 같다’고 언표한 것은 바로 이에 대한 표명이기도 하다. 페오뽈디나 포르뚜나띠(Leopoldina Fortunati)에 따르면, 자본은 모든 가족 교환들 및 관계들 안에서 그것들을 상품 즉 노동력의 교환들 및 관계들 안에서 그것들을 상품, 즉 노동력의 교환들과 생산관계들로 만들면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착취의 연쇄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집으로 진입한다. 가족관계는 자본주의적 관계들이며, 개인상호간의 관계인 것처럼 나타날 뿐이다. 가족성원들은 자본이 다른 성원들을 착취하는 통로일 뿐이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어머니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착취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 자신들의 생존, 자신들의 재생산에만 관심을 가질 때조차도 그러하다.”11) 또한 가족은 문화적 생산관계, 담론적 생산관계들만을 형성함으로써가 아니라 또 다른 공공영역의 선분들, 가령 주택, 전기, 통신, 상하수도 등 도시공공서비스의 공급선들로 연결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가계활동이(특히 경제와 관련하여) 공공생활에서 지배적인 위치로 등장했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러한 생산관계들이나 공급선들이 가족단위에 의해서 폐쇄되는 것이 아니라, 다기적인 선분들의 연결에 의해 탈가족적으로 개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탈가족적 선분들은 다시 개별 주체들을 사적 주체로 혹은 공적 주체로 배치한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의 고정된 영역/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100%의 공공영역이나 100%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다만 지배적 기능의 성격에 따라 공공영역이나 사적 영역으로 분류되면서, 그 안에는 기능적 집합적 배치의 이질성에 따라 공공영역 내 사적 선분들이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리고 공공영역/사적 영역의 내적 구성이나 경계선은 가변적, 역동적, 역사적, 현실적 선분화에 따른다. 여기서 주체, 선분, 영역의 문제들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주체는 영역적 선분의 표면 효과에 따라 한편으로는 공적 주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주체이다. 주체가 공공영역으로 접속선을 타게 되면 공적 주체가 되고, 사적영역으로 탈주선을 타면 사적 주체가 된다.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90년대 미국의 새로운 공공예술(Public Art)의 특성을 분석하면서, 작가의 스펙트럼을 사적 영역에서 공공영역에 이르기까지 네 지점 사이의 주체형성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적: 경험자로서의 예술가-보고자로서의 예술가-분석가로서의 예술가-행동가로서의 예술가: 공적’.12) 작가 역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심광현도 “미술관과 박물관, 신문방송과 극장, 그리고 학교와 교회 등을 통해 유통되는 문화적 산물들을 각 개인이 접촉하는 방식은 매우 ‘사적’이지만, 사실상 그 산물들이 제작되고 유통되며 소통되는 방식 그 자체는 ‘제도적’이고 ‘공적’인 것이다.”고 지적한다.13) 요켠데 공공영역은 접속선들의 공공효과로 구성되는 것이며, 사적 영역은 탈주선들의 사적 효과로 구성되는데, 양자는 항상 이미 혼합된다. 그리고 접속선과 탈주선은 경직된 선분이거나 유연한 선분으로 작동한다.
공공영역의 층위들
공공영역은 정당, 공장, 사찰, 노동조합, 학교, 도서관, 언론, 동아리, 집회, 축제, 콘서트, 건축물, 공원, 마을, 교통, 통신, 전기, 거리, 언어 등을 포함한다. 이처럼 다양하게 분화되는 공공영역들은 복잡하게 얽혀 중층적으로 구성되는데, 대략 다음 여덟 가지 층위로 나눠볼 수 있다.
① 장소성 공공영역: 장소-공공성, 장소의 공간적 정의
② 제도성 공공영역: 제도-공공성, 제도의 공식적 정의
③ 집단성 공공영역: 집단-공공성, 집단의 참여적 정의
④ 담론성 공공영역: 담론-공공성, 담론행위의 소통적 정의
⑤ 표현성 공공영역: 표현-공공성, 예술표현의 문화적 정의
⑥ 시장성 공공영역: 시장-공공성, 시장의 교환적 정의
⑦ 생활성 공공영역: 생활-공공성, 공공서비스의 공급적 정의
⑧ 생태성 공공영역: 생태-공공성, 환경의 생태적 정의
장소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장소의 공간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가령 미술관, 거리, 대학, 병원, 목욕탕, 놀이터, 탁아소, 공원 등이다. 제도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제도의 공식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가령 정당, 행정, 민방위 훈련, 표준어 등이 이에 속한다. 집단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집단성의 참여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가령 시민단체나 종교집단이 일정한 장소적 거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구성원들의 참여적 연결에 따라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게 될 때 집단성 공공영역이라 할 수 있다. 향우회나 축제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 담론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언어(와 영상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담론행위의 소통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방송, 신문, 대중집회, 벽보, 포스터, 교육, 정보 따위들이 그러하다. 표현성 공공영역은 예술표현의 문화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영화, 미술, 음악, 사진, 문학 등이 이에 속한다. 시장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화폐 혹은 비화폐를 매개로 시장의 교환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재래시장, 백화점, 인력시장, 생활정보지, 지역화폐, 품앗이 등이 이에 속한다. 생활성 공공영역은 도시서비스, 즉 전기, 상하수도, 도시가스, 통신, 교통, 우편, 보건 등의 공급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생태성 공공영역은 뚜렷하게 환경의 생태적 정의에 따라 구성되는 공공영역을 말한다. 가령 특정공간의 물리적 사용은 자연적, 문화적, 신체적, 감성적 생태조건을 공공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갯벌이나 군주둔지, 공장, 가로수, 댐, 강, 산, 작업장 등이 이에 속한다.
복잡한 문제지형을 갖는 공공영역은 중층적으로 서로 얽혀 있으며 가변적인 규정력을 갖는다. 그것은 다른 공공영역 층위들간에도 그러하고 사적 영역 층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단일한 공공영역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층적인 입구와 출구를 갖는 복수의 공공영역들로 서로 겹쳐지고 연결되는 중첩성과 인접성으로 구성된다. 가령 대학이라는 공공영역을 보자. 장소성 공공영역(특정장소)-제도성 공공영역(교육제도/건축제도)-집단성 공공영역(교수/학생/교직원)-담론성 공공영역(지식생산)-표현성 공공영역(저항예술활동)-생태성 공공영역(교육환경)-… 등으로 중첩되고 인접된다. 이러한 중첩성과 인접성은 불균등하고 구체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층위구분을 하다보면 모든 것을 공공영역으로 정의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또 다른 자유로운 공간인 사적 영역 혹은 사사성(私事性)의 소멸을 뜻할 수도 있다. 정치적 파시즘이나 미시적 파시즘에 의해 사적 영역이 위협당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해질지라도 사적 영역과 사사성의 소멸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공공영역들 사이에는 사적 영역들이 중첩되고 인접된다. 다시 말해 공공영역은 공공적 기능의 공간구성만이 아니라 구성주체들의 사적 활동들이 동시에 영역화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공영역/공공성을 말하는 만큼이나 사적 영역/사사성도 함께 이중화해야 한다.14) 가령 공공영역에서의 감성활동은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자율적 주체형성은 두 영역의 동시효과인 것이다.
공공영역을 이러한 흐름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닫힌 체제가 아니라, 열린 상황의 기호체제들임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공공영역은 사회가 구성되고 주체가 형성되는 경로이자 환경이며, 그것은 단순한 선분으로서가 아니라 다층적 선분들의 집합적 배치로서이다. 공공영역은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분할되고 배치된다. 만일 공공영역운동이 일어난다면 사적 소유나 사적 영역을 개인적 주체성이자 사회적 주체성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공공영역은, 맑스가 말한 바처럼,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지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개인들은 공공영역의 사회적 창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공공영역이 개인적 주체성들의 차이들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의 연대에 의해 생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헤게모니 영역
공공영역은 헤게모니 영역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샬 버만은 근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늘날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생생한 경험방식-공간과 시간의 경험, 자아와 타자의 경험, 삶의 가능성과 모험의 경험-이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경험의 실체를 ‘근대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15) 다시 말해 근대화된다는 것은 맑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라고 말한 바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탈영토화되는 대기 속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견고하게 재영토화되어 온 것이 근대성 경험의 지배적 측면이기도 하다. 근대사회 소수자들의 모든 저항은 바로 이에 대한 저항이었다. 레이번(J. Rab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호와 양식, 급속하고 고도로 관례화된 소통체계는 대도시 활력의 근원을 이룬다. 이러한 체계가 분리되었을 때-우리가 도시생활의 원리를 잃어버렸을 때-(폭력이) 발생한다. 멋드러진 현대적 형태인 도시는 유연한 것으로서 삶과 꿈, 그리고 갖가지 해석들의 현란함과 욕망추구를 기꺼이 허락한다. 그러나 거대도시를 인간정체성의 해방자로 만들어주는 이와 같은 가변적 특성으로 도시는 정신이상이나 전체주의적 악몽에 대해 극히 취약해진다.”16) 근대성의 시간과 공간들 속에서 견고해지는 모든 것들은 ‘전체주의적 악몽’으로 재현되어 왔다. 근대적 공공영역은 바로 그 재영토화하는 견고함, 즉 권력생산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다수성의 논리에 헤게모니를 내줘 왔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공공영역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제시한 종교, 교육, 가족, 법, 정치, 노동조합, 대중매체, 문화 등이 모두 (부분적으로라도) 공공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군대와 경찰 등 억압적 국가장치들을 ‘공공영역’이라 명시하고, 앞에서 예시한 사례들에 대해 대부분이 ‘사적 영역’이라고 명시한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사적단체’에 불과한 기관들을 어떤 근거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고 하느냐는 반문에 대해 그람시를 빌려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은 부르주아법에 내재적인 구별로서, 부르주아법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영역에서만 유효하다. 국가의 영역은 구 구별과는 상관없다. 국가는 ‘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국가, 다시 말해 지배계급의 국가는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도 아니다. 반대로 국가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위한 선결조건이다. 우리의 이데올로기 장치의 출발점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다. 국가이데올로기 장치가 실현되는 기관이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이다.”1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 양자간의 기능적 통합성에서 볼 때-양자의 구별은 무의미하므로, 그리고 알튀세르가 지정한 ‘사적 단체’들은 사실상 공공영역으로 통합되므로-이데올로기 국가장치적 기능은 공공영역적 기능과 호환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물론 이 때는 공공영역의 기능이 지배체제적 경로와 장치로 결속되어 온 한에서이다). 왜냐하면 가족과 같이 ‘사적인 것’이라고 불려오는 것을 더욱 사적이게끔 몰아붙일 때조차도 그것은 이미 공적인 선분(예컨데, 법이나 주민등록제도) 위에 배치되고 호출되면서 다수성의 논리로 재영토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출할 때, 그것은 공공영역의 선분 위에서이고, 자신이 이데올로기임을 숨기기 위해서 ‘공공성’이라는 은유화된 이데올로기를 대중화시킨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체계로 성립함에 따라, 공적생활은 점차 공동의 공적 이익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와 논쟁이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장으로 규정되었다”18)는 류의 진술은 진실이 아니다.
다수성의 논리로 포획된 공공영역은 그 공공성이 때로는 ‘대표성’으로 교환된다. 여기서 대표성이란 정치적 대표성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공공영역을 구성하는 일련의 기호체제, 즉 화법, 담론, 행위, 태도, 매너, 차림새, 감각, 단어사용, 색깔사용, 감정표현, 공간구성, 또는 특정한 경우에 있어서의 신체조건 따위들에 있어서의 대표화되고 규범화된 코드체계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론장의 공공영역에서 ‘박수’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대표성의 원리와 관련되어 보인다. 그 ‘박수’를 공론장의 코드체계로 도입한 것은 19세기 말 서재필에 의해서였다. 그는 협성회 주최의 한 토론회에서 다음과 같이 참여자들에게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지만 미국에는 남이 연설할 때,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합니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 보시오.”19) 서재필은 회의하는 법과 토론하는 법도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있어서 근대적 공공영역 형성의 새로운 경험이자 공공성 개념의 한 초기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공공성이 대표화되고 규범화된 코드들을 의미하게 되고, 공공영역의 구성이 권력생산과 지배체제를 재생산하는 다수성의 효과로 포획되면서 공공영역은 대체적으로 경직된 아비투스가 지배해왔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적 공공영역은 대중주체들의 자발적 결사체/표현체/소통체 기능을 하기 보다 정치적으로 영토화되고 관료화되고 관변화되면서 대중주체들을 지배체제로 호출하는 기능을 해온 측면이 크다. 70년대의 새마을회관이나 반상회, 여의도 5.16광장, 그리고 오늘의 민방위교육장 영역들이 그런 장치들이다. 전국민이 시청/청취하는 방송 공공영역의 ‘방송언어순화’도 그런 장치의 하나다.
그렇다고 공공영역이 권력생산과 지배체제의 논리로만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서구에서의 근대적 공공영역은 부르주아의 정치참여 통로로서 공개적인 여론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20)이면서도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공공영역의 기능도 격렬하게 수행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프랑스 혁명에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현재까지 공공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요와 혼란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리용의 폭동에서 모든 견직포공들은 그들의 깃발에다 ‘일하면서 살거나 싸우면서 죽는다’라는 전형적인 표어를 내걸었다.”21) 근대 공공영역을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만 파악하면 공공영역의 역동성과 전복성, 헤게모니성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또한 계급적 분할을 넘나들면서 임대생활자, 학술원 회원, 저널리스트, 교사, 넝마주이, 상점 주인, 인쇄공, 선술집주인 등이 국가의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서적과 팜플릿, 신문들을 통해 공론장 즉 공공영역을 형성하는 일이 19세기 말에 존재하기도 했다: “이 모든 집단들은 변화를 원했다. 특히 그들은 기존 국가기구의 권력행사망식을 단순히 수정하기보다 완전히 다른 정치적 장치들을 창출하는 식의 변화를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정치적 문제에 관한 ‘여론’을 창출하고 나아가 이것에 기초해 새로운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비밀스럽고 독단적인 국가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토론하고 독서하는 (잠재적인) 공공영역들을 형성했다.22) 요컨데 서구의 근대 공공영역의 형성은 부르주아지의 일방적인 장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령 대중들의 공론장 형성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대중들의 정치개입 통로로서 혹은 새로운 정치상상력이 동원되는 역동성을 띤 헤게모니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해방공간에서 삐라 등을 통한 공론장 형성이나 구한말 만민공동회,23) 혹은 최근의 87년 6월항쟁 등의 사례들을 보더라도 저항적이고 역동적인 대중공론장 형성의 힘들을 보여주었다.
다수성/다수자 대 소수성/소수자
공공영역이 헤게모니의 영역이라면, 그 핵심은 다수성/다수자 문화와 소수성/소수자 문화의 대결에 있다 하겠다. 즉 다수성/다수자의 논리로 지배되어 온 공공영역은 이제 소수성/소수자의 집합적 배치가 지배하는 새로운 헤게모니의 형성이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4) 이러한 문제인식은 공공영역이 개인적 주체성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주체성들의 집합적 배치효과로서 구성되어야 함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하여 실제적 현실관계에 놓여있는 개인적 주체성의 감성적-욕망적 표현활동이 무장해제당하면서 이미 만들어진 공공영역에 거수기나 ‘쪽수’채우기로 동원되고 호출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동일성이나 다수성에 반발하고 권력에 저항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며 차이들을 생성하는 개인적/소수자적 권리로서, 요컨데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사회적-공공적 구성 주체로서, 오로지 그것으로서 공공영역을 구성해야 함을 전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주체를 소수자와 동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수성의 논리로 가득찬 개인이라면 그는 이미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이다. 다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공공영역은 개인적 주체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되, 한편으로는 그 개인적 주체들이 소수자로서의 자기전화를 추구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영역이 소수자들의 집단적 연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수성에 기초한 제도, 관행, 체제, 권력, 언어, 공간 등의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제기는 유효하다.
관련해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958년에 쓴 『인간의 조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그녀는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에서 찾는다. 즉, 어떤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인간의 삶은 언제나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사물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사적 영역의 문제제기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영역을 사고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활동적 삶이라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공공영역을 동일성에 기초한 보편적 공통감각으로 정의하게끔 발목잡지는 않는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의 공공영역을 분석하면서 공공영역은 “개성을 위해 준비된 곳”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론영역의 실재성’은 수많은 측면과 관점들이 동시에 존해한다는 사실에 기초해있다. 이러한 측면과 관점들 속에서 공동세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이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척도나 공통분모는 있을 수 없다. 공통세계가 모두에게 공동의 집합장소를 제공할지라도,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의 위치는 상이하다. 두 대상의 위치가 다르듯이 한 사람의 위치와 다른 사람의 위치는 일치할 수 없다. 타자에 의해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의 의미이다. …공동세계는 단지 한 측면에서만 보여지고 단지 한 관점만을 취해야만 할 때, 끝이 난다. 공동세계는 오직 이 세계의 관점들의 다양성 속에서만 실존한다.”25) 우리는 아렌트의 논의에서 동일성/보편성에서가 아니라 차이/다양성에 기초하는 공공성의 새로운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공공영역을, 우리의 현실적 공공영역처럼 통제되고 관리되는 개념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생활의 영역의 문제로 사고하고 있음도 크게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인간자유의 중심적 차원은 공공영역의 자율성이라고 밝히는 바, 이 공공영역이 인간특유의 행위가 번성하고 그것에 대한 기억이 세대를 넘어 존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의 독특한 자아는 공개적인 담화와 말 속에서, 즉 항상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우리의 능력/행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공공영역의 개념은 정치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는 통상적인 의미를 넘어선 것이다. 그녀에 있어서 공공생활은 “그들 자신의 권력과 경제적 이익의 증진에 대한 관심에 의해 지배되는 권력추구적인 개인이나 집단의 영역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생활의 영역, 즉 사람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정체성을 넘어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관계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서사를 창출할 수 있는 장(場)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있거나 결정되어진 세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세계이다.”26) 이제 우리는 공공영역이 열린 상황의 기호체제들이어야 함의 구체적 의미에 더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렌트가 명시하듯 활동적 삶의 정치적 의미이기도 하다.
유사한 맥락에서, 공공영역의 차이를 생성하는 ‘이질적 공공’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 아이리스 영의 견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은 기존의 공공영역이 모든 개인적 이해관심이 ‘잊혀지고’ 보편성만이 추구되는 ‘공동체’라고 규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차이를 억압하고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규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차이를 억압하고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고 비판한다. 영은 공/사의 영역을 철폐하기보다는 공공영역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특수성을 억압하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공공영역이 아니라, 이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특수한 집단들의 차이를 모두 포함하는 ‘이질적 공공’(heterogeneous public)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영은 민주주의란 억압된 집단이 직접적으로 대표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라 보며, 이를 위해 이질적 공공은 첫째,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이익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런 집단들의 자기 조직화를 지지하는 공적자원이 사용가능할 것, 둘째, 그럼으로써 이 집단들이 사회정책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 그리고 셋째, 이 집단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특수한 정책들에 대해 거부권을 가질 것 등의 요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27)
그런데 내가 소수성/소수자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관념적인 주체영역으로 추상화되고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현실에서 그리고 현실적 상상에서의 신체적-감성적-언어적 실천활동들로부터 부단히 파편화되고 층변(層變)되는 기관없는 신체들28)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소수성/소수자는 기관없는 신체들이라는 선분들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고 생성하는 자기구성적 주체이며, 그 선분들에는 이 주체들과 연접하고 이접하는 감각, 신체, 공간, 욕망, 열정, 쾌락, 상상, 스타일, 감수성 들이 다성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수수자는 이 상황들을 지배자/권력자/포획자가 되는 수목적 욕망세계로 결코 유도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리좀적으로 뻗쳐나가고 접속한다.29) 이것이 바로 공공영역적 기호체제가 소수성/소수자들의 집합적 배치로 탈영토화되는 표면들의 모습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바흐찐의 축제이론이다. 축제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는 비일상적 공공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탈영토화/탈코드화될 수도 있는 장점을 가진다. 축제의 공공영역은 볼거리와 행할거리들이 돌발적으로 사고쳐지는 것에서 가장 큰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바흐찐은 카니발에서 이 점에 주목한다. 그는 소수자적인 속도, 즉 신체들- 언어들의 그로테스크한 탈코드화 혹은 이질적 접속들에서 위반의 정치와 ‘축제의 웃음’을 발견해낸다. 이 축제의 웃음은 개인적인 반응이 아니라 축제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시적인 웃음이며, “즐겁고 승리감에 충만한 것이면서도 조롱하고 흉내내는 것”, “내세우면서도 거부하고 묻으면서 재생시키는 이중성”의 것이다. 그래서 바흐찐은 축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공식적인 잔치에 반대하면서 기존질서에 대한 진리로부터 일시적인 해반을 구가하는 것이 바로 축제의 뜻이다. 축제 안에서 모든 사회적 순위, 특권, 규범, 금기사항은 무너진다. 축제야말로 진정한 시간의 잔치이며 변화와 재생의 잔치이다. 그것은 완벽하고 불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갖는다.”30) 그러나 바흐찐의 축제이론에 대해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축제는 ‘인가된 행사’이며 ‘사전봉쇄된 대중적 폭발’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밥콕(Babcock)의 다음 발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징적인 전복의 과정은 경험의 주변범주와는 다르다. 사회적으로 주변적인 것이 상징적 중심이 된다. 문화적 저항이나 전복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일반적인 문화과정의 역동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게 된다.”31) 따라서 축제가 인가된 행사라는 것에 대해 부정만 할 게 아니다. 적어도 상징효과를 산출하는, 혹은 ‘인가된’ 영역 안에서 그리고 인가의 범위를 더 확장해나가며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인가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탈영토화/탈코드화(소수화)를 통하여, 공공영역의 성격과 기능을 새롭게 바꾸어나가는 헤게모니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 축제와 같이 ‘인가된’ 혹은 제도성 공공영역에서의 헤게모니 과정은 내용과 표현의 형식들에서만이 아니라, 물질적 배치들, 즉 인력, 예산, 제도, 장치, 법, 도구, 대중 등등의 흐름과 배치를 (민주적이고도 개방적으로) 새롭게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축제류의 공공영역에 사용되는 돈이 관료적 밀착과 상업적 타산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대중적 공공사용으로 투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의미의 공공성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 도대체 일탈성이라는 것은 찾아보기도 힘들거니와 관료화/규범화/표준화/상품화된, 그리하여 육체도 없고 언어도 없는 우리 사회의 축제문화들을 염두에 둘 때, 바흐찐적 카니발은 충분히 주시될 필요가 있다.
바흐찐의 축제이론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공공영역 혹은 공론장은 경직된 합리성을 근거로 하는 표준화/규범화 또는 곡해된 민주주의론을 근거로 하는 평준화와 거리가 멀수록, 참여하는 대중들이 기관없는 신체들로 움직일수록, 그들의 열정이 흐르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MBC텔레비전 <정운영의 1001분 토론>을 진행했던 정운영은 이 문제를 정확히 꿰뚫으면서 공공영역/공론장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19세기 자유주의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다수의 전제/횡포’(tyranny of the majority)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민주주의는 평등주의적 이상을 급속하게 실현하려고 할 때 평준화의 위험이 뒤따르고 종국에는 독재를 낳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평준화 자체가 다수성의 횡포다. 그것은 권력생산 방식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로만 귀속되지 않는, 소수집단의 문화들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한 문화적 습속 자체의 따가운 시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성)의 횡포는 지배체제의 권력생산 방식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공모하는 바이기도 하거니와 지배체제를 해체시키려고 하는 저항집단/대안집단에서도 충분하게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접한 또 다른 종류의 권력구조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우리는 토크빌이 권력이라는 것은 군주의 손에 쥐어져 있건 인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건 아무튼 하나의 질병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공공영역의 문제화와 관련하여 사고해야 할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푸코가 이미 말한대로, 권력행사의 방식들, 즉 특히 제도성 공공영역에 배치되는 권력행사의 테크놀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나 추상화된 권력담론으로 선언되는 의미화의 문제설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사고해야 할 제도의 문제-기능과 배치의 테크놀로지 문제-인 것이다. 제도성 공공영역에서 다수성의 횡포를 발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은유적으로 행사되는 제도(의 경로와 장치들)에 대한 분석 즉 배치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망각할 경우, 즉 제도들을 기관없는 신체들로 분해하지 않을 경우 저항집단이나 대안집단마저도 ‘제도의 독재’32)에 스스로 함몰될 것이고, 공공영역의 다수성 헤게모니를 해체할 진정한 방법이 사고되지 못할 것이다. 토크빌의 다음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동시대인들이(…)생각하는 정부는 단일하고 보호자적이고 막강한 것이되 인민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면 된다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화는 인민주권론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을 안도케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학교훈장들을 선택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학교 훈장들의 감독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이러한 제도하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선택하기에는 너무도 오래 전에 예속의 상태로 전락해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그 제도 속으로 영락해버리게 되는 것이다.33)
3. 공공영역과 사회운동: 차이와 연대, 참여와 자치로
생활세계의 시간/공간과 세대/인구의 복합적 분절과 확장, 즉 각종 미디어와 영화 등 대중문화/문화산업의 현저한 발달, 축제와 문화관광 등 장소성에 근거한 지역문화의 부각, 탈지역적인 교통관계의 새로운 구성, 도시공간의 재건축, 유흥과 소비 영역의 확충, 거리미술이나 음악회 등 예술적 접근의 대중화, 노동공간의 세분화, 사이버공간의 창출, 새로운 세대들의 등장 및 사회활동 연령층의 현저한 하향화,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의 확장, 도시공공서비스의 확장, 시민사회의 창출 등에 따라 공공영역들이 더욱 확장되고 있지만, 그 지점들에서의 공공영역들은 대부분이 올바른 공공성 개념으로 생성되지 못하고 있다. 즉 이런 영역들이 공공영역의 개념으로 인지되고 배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 또는 사적 경험으로 계산되고 오인된다거나 공공영역으로 공식화된다고 해도 사적 도구화 등 왜곡된 방식으로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공공영역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심화되는 공공성의 부재화’로 요약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공공영역/공공성의 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공공영역/공공성의 위기는 사적 영역/사사성의 위기와 동반하여 나타난다. 공공성에 위협을 가하는 만큼이나 사사성에도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예컨데 신규 주민등록증 지문날인은 행정공공영역이 개인의 신체정보를 등재 및 관리하고 국가권력의 감시/통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공공성의 위기는 국가권력의 비대화 및 감시와 통제 영역의 확산, 기술관료주의의 재생산 및 재배치, 초국가적자본과 금융자본 등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횡포, 시장자유주의와 생활영역들의 상품화 및 화폐화 체제 심화, 정치집단의 정치의 사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투여, 언론의 자기권력화 및 지배체제적 가치 대변, 전문가와 지식인 집단의 반민중적 사회참여, 이익집단들의 반시민사회적 폐쇄적 결사체조직, 통신회사 등 자본의 국가권력적 검열의 대리 수행, 학교 등 미시공공영역들에서의 미시권력/미시파시즘 횡포,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와 고립주의에 따르는 생활세계의 사적 영역화, 시민단체들의 도덕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사회운동, 그리고 보수집단의 신보수주의 문화전쟁 등등에서 비롯된다. 그 위기는 실제적으로 예컨데, 미술장식품 제도의 비리사건, 청소년보호법의 제정 및 시행과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가동, 노동현장들에서의 구조적인 구조조정 및 대량해직, 창작물 음란성 규정과 표현의 자유 탄압, 사이버공간의 표현과 공론의 자유권을 박탈하고자 하는 소위 ‘질서확립법’의 제정 움직임, 부안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한 갯벌생태 파괴, 집회와 시위 등 국민저항권 제약, 삼성재단의 성균관대 자본화 ‘통치’, 인천 호프집 화재로 인한 중고생 참사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다층적인 공공영역들에서의 공공성 개념의 복합성-장소공공성, 집단공공성, 제도공공성, 담론공공성, 표현공공성, 사장공공성, 생활공공성, 생태공공성-이 왜곡되거나 부재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좀더 근본적으로는 공공영역/공공성이 다수성/대표성으로 ‘표상되고’ 기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공공영역/공공성의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나갈 것이냐에 있다. 기존의 민중 운동이나 좌파운동에서는 이 영역을 배제해왔고, 90년대 이후 급성장한 시민사회운동에서도 부분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개념적으로 제한된 정의에 그치고 있는 정도이다. 물론 동성애자 운동, 스크린쿼터제 수호투쟁, 지하철 성추행방지 방송 쟁취, 대학가의 반문화운동, 청년좌파의 카피레프트운동, 청소년들의 탈학교운동, 미군기지 및 군사훈련 이전 운동, 지문날인 거부운동, 기무사 부지활용 논의, 노동자 집단 내 소수자 운동, 총선 낙천낙선운동, 인터넷 안타운동, 표현의 자유 투쟁 등등 인권, 생태, 여성/성, 평화, 환경, 계급, 세대, 공간, 문화 등 다양한 영역들에서 저항적이고 시민적인 사회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으나, 공공영역/공공성 개념으로 절합되고 있지는 못하다. 우선적으로, 앞서 논의한 것처럼, 개념전화와 새로운 지형도 그리기의 작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 자체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공영역/공공성의 문제가 복합적인 사회문제군, 그리고 사적 영역/사사성의 문제와도 연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공영역/공공성의 문제지형이 이러한 문제설정에서 왜 중요해지는지, 다시 말해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로지르기로서 왜 공공영역/공공성의 정치를 사고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공공영역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심화되는 공공성의 부재화로 요약되는 오늘의 사회적 문제군들을 해결해 나가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특히 공/사 분리라는 부르주아적 가치체계로 인하여 공공영역은 공경영역대로 사적 영역으로 오인되어 공공성이 적용되지 않고, 사적 영역은 사적 영역대로 침탈당하거나 무방비상태로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삶의 가치와 시간과 의미들을 공공영역으로 투여하기보다, ‘사생활’에 치중하는 개인주의/가족주의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연줄주의에 기대 공공영역에 진출하고 사생활을 풀어나가려는 경향이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둘째, 공공영역/공공성은 주어진 영역이 아니라 대중주체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구성되는 사회적 공공공간이어야 한다. 따라서 공공영역/공공성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화하는 헤게모니와 대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 기능과 성격을 변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장이 될 수 있다. 셋째, 공공부문 등 공식적으로 정의되는 제도성 공공영역이나 생활성 공공영역 등은 특히 시민의 참여적 권리를 확대함으로써 관료화/권력화/예산낭비를 방지하고 민주성/공공성/개방성에 의해서 운영될 수 있도록 감시/비판/대안 활동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공공영역/공공성은 특정한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부터 여가, 문화, 정치, 경제 노동, 예술, 자연 등등에 걸쳐 삶의 질과 생활 양식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따라서 삶의 질과 생활 양식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공통감각의 형성이 가능해질 수 있다. 그 공통감각의 형성은 과거처럼 ‘민주주의 만세’ 등 먼거리 저항이 아니라, 가까운 생활 속에서의 장소성 공공영역, 집단성 공공영역, 제도성 공공영역, 담론성 공공영역, 표현성 공공영역, 시장성 공공영역, 생활성 공공영역, 생태성 공공영역 등의 중첩성과 인접성에 의해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하여 다섯째, 전통적으로 존재해 온 노동운동/빈민운동/ 농민운동 등 민중운동과 그 동안 영역별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민운동을 전체 사회운동으로 엮어내는 네트워킹의 연대코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계급주의/노동자주의/경제주의로 환원되지 않고 또한 시민운동이 경도될 수 있는 탈정치적, 탈계급적, 친체제적, 친국가적 성격을 지양하는 새로운 코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공영역/공공성은 사적 영역/사사성의 선분과 마주치고 꼬이면서 삶과 생활의 본질적 표면들을 구성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구성 및 주체형성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이것들이 바로 공공영역/공공성이라는 의제/코드를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로지르기로 사고하는 맥락들이다. 좌파진영에서도 이 의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공공성 개념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영역은 국가/관료/자본의 것이 아니라, 시민대중들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민대중들의 자율적 의사에 따라 공공영역이 구성되도록 하는 새로운 공공성 개념의 출발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하고도 풍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공공영역은 항상 국가/관료/자본 혹은 정치인/재력가/권세가/지역유지/엘리트들에 의해서 정의되고 분할되었으며, 그것은 공공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명분상, 공공적이라고 의사소통당하면서 사실상 사적인 소유물이나 부속물로 전유당해왔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공공영역/공공성을 새로이 문제화할 수 있는 대중집단의 형성이다. 대중집단의 형성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외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대응하되 그 자체의 기능과 성격의 변화에 대해서는 공공성의 투여를 통한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에 경도되기보다 테크놀로지적 개입, 즉 공공성 투여를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 구체적 실행역량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건 테크놀러지건 공공영역/공공성은 다수성/다수자의 논리를 해체시키면서 소수성/소수자의 집합적 배치로 구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공영역/공공성의 소수화는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하면서도 이데올로기 및 테크놀로지 게임에 있어서 쉽지 않은 전략이다. 국가/관료/자본이 막강하게 버티고 있음도 그 이유이지만 사회운동이나 제3섹터(NGO/NPO) 내에서도 그와 공모하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문제군의 해결을 위해 법의 제정을 남발하거나 국가기구화에 크게 의존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공공영역/공공성의 확보나 시민사회의 형성은 비국가적/탈국가적 영토화를 목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가능한 한 국가의 개입을 저지하고 시민대중들의 자율적인 의사에 따라 공공영역을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로 하여금 스스로 할 일이 없어지게 하는 전략과 맞물리는 발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종 국가정책이나 국가(지원)기구 등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적 공공영역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민운동이 대상으로 설정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국가적 공공영역의 공공성 회복을 위하여 법, 인력, 예산, 조직, 기능 등의 메커니즘을 조정/개혁/해체하는 데 전문가와 시민들의 압박이 필요하다.(“국가라는 살아있는 시계장치는 작동 중에 개선되어야 하며, 작동하는 중에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교체해야 하는 것입니다.”34) 예산의 경우는 국가기구의 강화가 아니라, 시민대중들의 공공영역 구성으로 귀속될 수 있도록 그 분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것은 구차하게 ‘요구’할 사항이 아니라 정당한 자기권리이다.
또한 이러저러한 합리성을 명분으로 하여 공공영역/공공성을 자본주의적 시장의 논리로 매매하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흥 때문에 공적 인간이 몰락했다는 리차드 세넷(Richard Sennett)의 주장35)이나, 시장경제적 생활로 인해 인간의 마음 및 사회의 틀을 사장정신이 포섭한 것을 비판하는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주장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장성 공공영역은, 시장이 오로지 자본주의적 시장만이 존재한다는 시장 정신을 폐기하고, 비자본주의적인 다양한 시장들의 형성, 즉 시장-화폐-가격의 복합체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듯이, 그 복합체에 기초하지 않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장의 형성을 상상하는, 시장의 소수화효과를 위해서만도 아니며, 공공영역/공공성에 사장정신을 적용하려 할 때 그것은 다시 소수성의 논리로 귀착되고 결국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폴라니의 다음 성찰은 우리의 문제이다. “인간의 생활이 우리 세대에게 제기한 일반적 문제에 대해서 보다 현실적인 시각을 확립하려 노력할 때 처음부터 아주 귀찮은 장애물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19세기에 모든 산업화된 사회에 형성된 경제유형화에서의 생활상태 속에 특별히 깊게 스며든 사고방식이다. 이 심리는 ‘시장의 정신’으로 구현된다.”36) 여기에서 우리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제도를 만드는 힘이 ‘상상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스(Cornelius Castoriadis)도 참조해보자. “(상상적인 것은) 사물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현존하는 것과 다른 것을 보는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37) 사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정치적 상상력이 너무 빈약하다. 이것 또한 기존의 경직된 공공영역 체제가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문화적/미적 상상력을 봉합해 온 정치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렌트는 혁명적 상황이 공적 자유의 관념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본다. 혁명적 무정부 상태는 공공영역이 국가와 관료와 자본 따위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대중들의 직접적 자기욕망으로 해방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때야말로 요동치는 영도의 글쓰기이며, 사회적 구성과 주체의 형성에 있어서 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상상들이 자기가치들을 생성하고 논쟁과 함께 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 공공영역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 맥락은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들 속에는 국가가 있고 관료가 있고 자본이 있으며, 미시파시즘을 포함한 다수성의 논리가 있으며, 그것들 때문에 공공영역/공공성이 억압되거나 왜곡되어 왔다. 다시 말하여 공공영역은 시민대중들의 직접적인 자기 욕망의 해방, 즉 시민대중들의 자기구성적, 상호소통적 과정들의 집합효과를 전제하는 자율적이고도 공공적인 사회공간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바로 일상생활들 속에서 국가/관료/자본과 대결하면서 교섭하면서, 혹은 그것들이 조작해내는 공공영역으로부터 탈주하면서 새로운 공공영역의 상황들을 창출하는 일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공공영역을 일시적으로 창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공영역들의 연동효과를 창출해내는 차이와 연대의 전략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참여적이되 대의민주주의를 부분화시키는 시민대중들의 자치적 생성과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요컨데 공공영역의 문제화는 차이와 연대, 참여와 자치의 전략 속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가로지르기로 접속해 나가자는 것이다.
4. 공공영역과 문화효과
얼마 전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 동안 미술계에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온 마술장식품 설치 관련 비리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아파트 등 대형 건축물의 미술장식품 설치와 관련, 15억대의 리베이트를 주고받은 한 유명 조각가를 비롯하여 건축관계자, 화랑대표, 건축미술 심의위원, 그리고 공무원 둥이 무더기로 검찰에 적발된 것이다. 이 사건은 미술장식품 설치를 둘러싸고 최초 작가선정 과정에서 건축주와 화랑과 미술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자금 조성 및 탈세와 이면계약 및 알선수뢰 관련 비리, 작품의 타당성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현장 소장에 대한 뇌물공여 비리 등으로 그 범위가 전 과정에 걸쳐 있고, 종류가 매우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비리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술 표현물과 건축공간/도시공간과 시각환경 등을 둘러싼 공공영역/공공성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연대는 바로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여 기존의 ‘미술장식품 제도’를 폐기하고 ‘공공미술’(Public Art) 개념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1%법에 해당하는 건축공간은 소유주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도시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공영역에 해당하므로, 거기에 설치하는 미술품은 사적 소유로 귀속되고 건축공간을 과시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미술장식품’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에 기초해서 시민들에게 공간의 공적 의미를 획득하게 하는 한편, 공공적인 시각환경에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미술과 사회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공공미술’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연대는 “공공미술제도의 운영에서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작가와 시민/지역주민들 간에 현대도시가 야기하는 문제점들을 타개하기 위해 해당공간이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화적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이 때문에 공공미술은 예술과 시민사회와의 소통의 단절을 비판하면서 도시 공간에 새롭고 활기찬 소통을 창조하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시민사회적이며 참여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문화연대의 문제제기는 공공영역 운동의 명백한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미술장식품 제도 사건에서 드러난 공공영역/공공성 문제는 장소성 공공영역, 제도성 공공영역, 표현성 공공영역, 생태성 공공영역, 생태성 공공영역 등의 다양한 층위들과 관련하면서 사회적 문제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따라서 공공영역/공공성의 복잡한 문제지형은 결코 ‘의사소통’의 상징체로 압축할 수 없으며, 그보다는 다층적 소통들의 문화효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문화효과’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공공영역에서 문화적 공공영역으로의 확장을 넘어, 공공영역들의 톱니바퀴들의 흐름들을 문화화하는 것, 톱니바퀴의 경직된 선분들을 개방적이고 유연한 선분들로 변환시키고 소통시키며, 거기에 설치된 신체-욕망-언어의 권력적, 지배적, 포획적 장치들을 해체시키는 문화과정의 투여라는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문제 설정은 우리가 제기해 온 언어, 육체, 욕망, 공간, 그리고 문화공학, 문화정치, 문화사회, 혹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과 연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