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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전 6.10민중항쟁은 항쟁 19일째 되는 날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거리의 정치가 얻어낸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성과를 기초로 급격한 제도화의 국면으로 이어졌다. 87년 민중항쟁은 직선제라는 헌법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 헌법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과 원포인트 개헌 제안이 있기까지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87년헌정체제 21년은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유지 재생산되어왔다.
이로서 87년개정헌법은 지난 20여 년간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자본축적 구조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구조로 확장 전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정치적으로는 직선제 개헌으로 헌법의 국가권력 작동체계 부분의 수정을 이루었지만, 경제적으로 볼 때는 시장주의 정신이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왔다. 87년개정헌법은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발전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현실 계급투쟁 과정 전반에 폭넓게 개입하고 작동해왔는데, 표현의 자유의 제약이나 집시법 개악, 통신비밀보호의 후퇴 등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재협상’과 ‘헌법제1조’가 조우한 건 필연이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87년체제를 규정해온 87년개정헌법은 낡았다. 가령 제3조 영토조항은 10.4 선언과 충돌한다. 제119조 경제조항은 세계화된 자본운동을 가로막는 독소조항으로 이해된다. 다수당 한나라당이 개헌을 추진하면 이 조항부터 손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기본권은 단 한 번도 국민적 논쟁과 동의과정을 거친 적이 없다. 자본주의를 더 옹호하는 방향이든 사회주의적 지향이 반영되는 방향이든 87년개정헌법은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헌법으로의 개정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촛불시위에 나선 대중이 헌법제1조를 문제삼기 시작한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통수권자의 행위에 헌법을 들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재협상’은 이명박 대통령이 ‘하겠다’고만 하면 단박에 정리되는 요구다. 촛불시위의 열기도 일순 정리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하겠다’고 하지 못하는 이유, 이는 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에 사태의 심각함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다져온 시장주의 법제도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과 사유화, 개발주의 노선 집행을 약속으로 당선되었다. 투표율과 지지율의 취약성이 곧 정통성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지라,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FTA의 선결조건으로 되어 있는 쇠고기 협상을 ‘완성’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정치 행위로 풀이된다.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은 사문화된 헌법제1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헌법제1조의 급진적 완성은 논리적으로는 제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재협상’을 옹호하는 각종 헌법조항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담는 방향으로 논의될 수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볼리바리안헌법을 공표한 것이 시사하는 바도 있지만, 제헌이 아니라도 인민의 기본권에 대한 급진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촛불시위는 역사의 진전에 기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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