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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re] 2. 노동가치론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기

2008.04.10 16:00 조회 수 : 494


가치론과 이데올로기

 

목재가치설이란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목재의 함유량에 따라 그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가치론입니다. 이 가치론에 따르면 나무 책상은 커다란 가치 즉 가격을 지니게 되며 자동차는 거의 나무를 함유하고 있지 못하므로 나무젓가락이나 이쑤시개 정도의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이러한 경제체제에 있어서 경제의 중심은 나무입니다. 모든 것이 나무(목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를 돕니다. 이러한 목재 경제에서 가치척도의 수단은 목재입니다. 전자 결제도 가능합니다. 계좌이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목재를 한곳의 창고에 모아두고 마치 화폐나 주식처럼 계좌이체결제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재는 교환수단으로서도 훌륭한 경제적 도구입니다. 그러나 가치저장수단으로서 목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목재는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재가치설에 입각한 경제에서는 목재부패방지 개발에 온 경제력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임야의 부동산 가격이 가장 높습니다. 그리고 도시에는 소방서가 거의 없으며 소방서의 대부분은 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파이프라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산불이 났을 때를 대비한 철재 소방호스입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목재이며, 마치 화폐경제에서 돈이 사람보다 소중하듯이 목재는 사람보다 소중합니다. 나아가 화폐경제에 존재하는 물신주의와 유사한 목신주의가 이 세계에서도 성립하고 있습니다. 목재에 의한 인간의 소외현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노동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이 경우 성립하는 것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면 이때에는 화폐가치설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가치」란 우리의 「규정」에 의해 창조되는 것입니다. 가치는 객관적으로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라는 존재는 태고적부터 원래 있었다거나 아니면 신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가치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성립한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가치로 볼 것인가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목재가치설이나 노동가치설이나 화폐가치설 모두 그 이론적 근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경제학, 특히 정치경제학에서 아직도 해명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바로 가격과 가치와의 관계입니다. 예로부터 경제학자들은 가격과 가치사이에 어떤 이론적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왔으며, 그 함수관계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격은 화폐가치를 뜻하며 가치란 노동가치를 뜻합니다. 아담스미스 이래로 막스에 이르기까지 주류적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설을 채택해 왔었기 때문에 가치라고 하면(즉, 그들이 문제삼았던 가치라고 하면) 일단은 노동가치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가격이란 화폐가치를 뜻합니다. 따라서 가치와 가격간의 관계란 노동가치와 화폐가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두 가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바로 「가치와 가격간의 관계」라고 불리웠던, 그리고 아직까지 해명되지 못하고 있는 고전적 의문입니다.

막스는 시장경쟁이라는 요소를 도입하여 상품이 가치는 달라도 가격이 같을 수 있다는 이론적 해명을 시도한 바 있고, 경제학에 한계혁명을 불러 일으켰던 한계효용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다이아몬드는 낮은 가치를 가졌지만 높은 한계효용 즉 가격을 가진다고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또는 가치란 사용가치를 뜻하며 가격이란 교환가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거나 믿는 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학자 모두는 똑같은 맹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격과 가치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미궁에 빠뜨리게 한 근본원인이었는 바, 그것은 가격과 가치 사이에는(즉, 노동가치와 화폐가치 사이에는) 분명 어떤 경묘한 이론적 함수관계가 반드시, 기필코 존재한다는 「정답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목재가치설에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즉, 목재가치와 화폐사이에는 아무런 이론적 관련이 없습니다. 목재경제체제에 살고 있는 경제학자들 치고 가치와 가격 즉 목재가치와 화폐가치와의 이론적, 선험적 관계를 문제삼거나 연구하는 학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치와 가격간의 관계란 애당초부터 잘못된 질문입니다.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을 질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자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목재가치설에서는 목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화폐가치설에서는 화폐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뿐입니다.
어떤 이론적 관련성이 있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저 물고기의 유영과 저 새의 비행사이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내지 믿고 싶은, 그래서 그 관계를 해명하고 싶은)하는 어떤 기막히게 경묘한 이론적, 선험적 함수관계를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어떤 비슷하게 일치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지 이론적 필연성에 따른 귀결이 아닙니다. 만약 노동가치와 화폐가치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이론적 관련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관련성은 그들 사이뿐 아니라 목재가치설, 생선가치설, 먼지가치설, 머리카락가치설 그 외 모든 마구잡이식 가치설에서도 필연적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저 노동설이 있고, 그저 화폐가치설이 있을 뿐입니다. 그저 그 뿐입니다. 즉 가격과 가치사이에는 이론적 관련성이 「없습니다」.그것이 정답입니다. 정답은 있는 곳에 있지 않고 없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노동가치설에서는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이것은 이론적 선형적 「사실」이 아니라, 노동가치설을 따르는 인간집단의 주관적「규정」입니다. 그 이후의 모든 경제논리는 이 규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그 규정은 최초의 자입니다. 그 자는 그 이후에 생겨나는 다른 모든 원리나 이론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떤 다른 논리도 그 자를 대체시킬 수 없습니다. 그자는 완전히 정확한 자이며, 그 이후에 생겨나는 그 어떤 자도 그 자보다 더 정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노동가치설은 이론적으로 부정될 수 없습니다. 이점은 목재가치설이나 머리카락가치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아직도 막스 이론이, 즉 자본론이 의연히 생존하고 잇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동가치설이 거짓이되 운명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10시간의 표준노동시간을 투입하여 5개의 재화를 생산했다면 노동가치설에서 각 재화는 각각 「α노동단위」라는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동자는 10노동단위의 가치생산을 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그 노동자는 10노동단위에 해당하는 분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반면 똑같은 재화를 생산하는 다른 노동자가 10표준노동시간을 투입하여 1개의 재화밖에 생산하지 못했다면(예컨대 지리적 환경 등의 차이로 인하여)이 경우에도 생산된 그 재화는 「10노동단위」의 가치를 함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노동자는 10표준노동시간의 가치를 생산한 것이 됩니다. 그 결과 두 노동자는 똑같은 대우를 국가로부터 받게 됩니다. 이것이 노동가치설의 논리입니다. 이처럼 노동가치설은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를 중시합니다. 숙련 노동과 비숙련 노동의 차별은 노동의 결과에 입각한 차별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 근거한 차별일 뿐입니다. 노동의 결과물은 노동가치설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 결과물을 낳기 위해 흘린 땀방울 뿐입니다. 많은 생산을 낳은자 보다 많은 땀을 흘린자가 우대받는 곳이 노동가치설의 세계 즉 공산주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하여 경제 시스템 전체가 돌아갑니다. 인민은 노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책임은 국가가 떠 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가치설의 세계 즉 공산주의 세계는 가슴이 훈훈한 막스의 성정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일단 실패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인민의 배신입니다.
인민은 노동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하여 급기야는「철밥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작업대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이 그들의 「노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론적으로 국가는 이 경우에도 인민의 졸음노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것은 당위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할 뿐이었습니다.

둘째, 이상사회의 모습에 대한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분명 이상사회란 많은 재화가 흘러 넘치는 곳이 아니라 많은 자유가 흘러 넘치는 곳이며, 재화는 그 자유를 뒷받침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막스 마저도 이상사회를 표현함에 있어서 「인간의 생산력이 최고도로 발휘되고 있는 곳」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최고도로 발휘 될 수 있으려면 자유의 반대 개념인 노도에 구속되는 시간이 최소한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생산은 최고도가 아니라 필요 최소한이거나 적어도「적절」해야 할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스를 포함한 모든 공산주의자들은「다다익선」이라는 함정에 빠져있었고 그 결과 종일 노동을 하는 곳이 공산주의의 이상향처럼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즉 노동천국을 그린다고 하면서 노동감옥을 그린 격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인민의 지지가 따를 리가 없습니다.

셋째, 만약 주변에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선진국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는 위의 첫째와 둘째 이유와도 깊은 관련성이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는 그 「생산력」측면에서 생산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별 인민이 지고 있는 자본주의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경제」의 측면에서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앞설 수 있는 것은 「자유」의 측면일 뿐입니다. 즉 공산주의는 생산의 천국도 아니고, 노동의 천국도 아니고, 자유의 천국입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의 천국이지만 노동의 지옥이며 자유의 감옥입니다. 생산의 천국인 자본주의에게 공산주의가 생산 면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 소련을 위시란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생산력이 초고도로 발휘될 수 있는 경제체재」라는 막연한 주장만 믿고 자본주의에 대하여 경제적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만약 과거 한창 공산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에 그 여세를 몰아 전세계가 공산화되었더라면 이러한 문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교의 대상이 없으면 경쟁의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 소련이 붕괴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미국과의 경제적 경쟁에서의 패배 때문이었기에 이 세 번째의 이유가 공산주의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문제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해결될 수 있다면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두 번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산주의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공이 아닙니다. 그런 성공은 자유의 천국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생산과 강제노동의 천국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성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만약 막스가 이 두 번째의 문제를 명확히 지적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세상은 이미 공산주의의 천국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공산주의의 운명을 규정 지워 버렸습니다.

노동가치설에서 가치는 객관적 가치를 뜻하며 인간의 주관적 선호는 객관적 가치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자본주의의 화폐가치설(=가격가치설)에서는 인간의 주관이 가치의 결정에 절반의 영향을 미칩니다. 즉 인간이 주관적 선호도는 수요라는 이름으로 가치의 결정에 관여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물론 공급이 관여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간의 선호 내지, 인간의 선호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곧 가치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화폐가치만이 가치일 뿐입니다. 효용가치와 화폐가치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돈과 만족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만족이 가치가 아니라 돈이 가치인 것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재화 속에는 효용이나 노동이 함유되어 있다고 해서 재화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금」이 들어 있기에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다만 그 금의 함유량은 수요와 공급의 사정변화에 따라 부단히 변화한다고 자본주의 인간들은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화폐」가 가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화폐가치설 또는 가격가치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하에서 노동이 가치일 따름으로, 그리하여 그것을 노동가치설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화폐가치설은 주관적가치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객관적 가치설에 가깝습니다. 다만 재화 속에 함유된 가치는 객관적이로되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상황에 따라 부단히 변동한다는 점이 노동가치설과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화폐가치설은 객관적 유동적 가치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유동성을 주관성과 혼동했던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A라는 상품 하나에 대한 수요자 a,b,c의 주관적 만족도(선호도 또는 한계효용)는 각각 다릅니다. a의 만족도∪a=10, 그리고 b,c는 각각 ∪b=100, ∪c=1000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화 a의 가치는 개별 수요자의 선호에 관계없이 유일하게 예컨대 Pa=250으로 정해질 뿐입니다. 나아가 이 상품 A의 가격(화폐가치)이 얼마인가라고 a,b,c 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250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공급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

의 똑같은 상품을 공급하는 생산자 xyz에게 있어서 그 재화의 생산비가 각각Cx=10, Cy=100, Cz=1000 이라 해도 그 재화의 가격 즉 화폐가치가 250이라는 점을 그들은 인정하고 그에 승복합니다. 이처럼 가치 (화폐가치)는 주관적 효용이나 투입비용(생산비)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꽃의 수정에 꿀벌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꽃이 곤충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화폐가치설에서는 화폐 즉 돈만이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처럼 화폐가치설은 어떤 윤리성을 지향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원시적 본능을 지향합니다. 소유를 위한 투쟁이 선(善)일 수밖에 없었던 원시적 삶의 시절에는, 그러한 삶의 기준에서, 화폐가치설은 「윤리적」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선의 기준이 생존을 위한 소유와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화폐가치설은 그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이와 반대로 노동가치설은 현시대는 이제 과거와는 다르다는 시대변화를 전제로 하여 등장한 가치론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제학자(정치경제학자)들이 이러한 시대상황의 변화를 인식하고 노동가치설을 주장, 옹호했던 것은 아닙니다. 실은 그들에게는 그러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은 막스에 이르러서야 노동 가치설은「규범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막스경제학 (이런 식으로 이름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은 규범경제학입니다. 반면 화폐가치설에 입각하고 있는 현대자본주의 경제학은 순수이론 경제학 또는 원시규범경제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막스의 노동가치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새로운 가치론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가치를 노동에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노동가치설의 장점이자 동시에 그 한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物神을 숭배하듯이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는 堂神숭배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북한공산당의 명칭은 노동당이며 그 기관지는 노동신문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사람들이 자유를 팔아 돈을 얻으려 하듯이, 사회주의 하에서 인민들은 노동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자유보다도 고귀한 노동」이라는 고정관념은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상적 함정입니다. 하기야 자본주의보다는 다소 낫기는 합니다.

그곳에서는 자유보다 고귀한 노동일 뿐만 아니라, 노동보다 고귀한 돈이라는 고정관념이 또 한 꺼풀 더 얹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돈보다 노동이, 노동보다 자유가 고귀합니다. 우리의 의식을 덮고 있는 가리개를 벗겨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두 꺼풀을 막시즘에서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이란 목재가치설을 취하고 있는 비버들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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