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다시보기를 제안하며
0. 무엇을, 왜 제기하는가?
주지하다시피, 그간의 변혁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노동운동이 있었고, 전통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임금노동자로 규정되어 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완전히 절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표상된다.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적대를 주요한 모순으로 파악하는 것은 타당하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노동 산물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전유하게끔 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리이다. 자신의 생산물이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 마르크스가 언급한 ‘소외’의 모습이다. 이런 분석에는 이미-항상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를 만드는 것이 ‘노동’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물’은 경제적 관계에서 생산된 산물․사회적 조건을 총칭하는 것으로,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물질의 개념과는 구분된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는 그 ‘물’에 의해 구성되는 체제이다. 이것은 현실사회주의 및 혁명이론에서 상부구조(법, 이데올로기 등)가 토대(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경제결정론’으로 발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부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토대를 먼저 무너뜨려야 하고,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과학적으로 정초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노동은 세상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혁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에, 위대한 것이다.
이런 ‘과학적’인 규정을 바탕으로 한 현실 운동에서는 도달해야 할 어떠한 상태가 뚜렷하게 상정되어 있고, 그것을 위한 목적론적인 활동이 요구된다. 이럴 때,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절멸하면 다른 사회적 모순들이 해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실천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노동자운동 이외 다른 영역의 활동들은 부문운동으로 다뤄지고, 결정적인 시기에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에 복무해야할 것으로 고려된다. 한국의 변혁운동에서도 그렇게 여성, 이주자, 성적소수자, 장애인 등의 운동은 전체 운동에서 옵션처럼 취급되었고, 운동사회 안에서 운동에 대한 가치평가와 줄 세우기가 이루어져 왔다.(예를 들어 밥꽃양.) 그리고 이런 것들은 새로운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세상의 분석에 따르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최단거리가 계산되고, 그 최단거리를 지나면서 생기는 일들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중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명시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그 태도와 입장이 일치하기란 드문 일이고, ‘노동자 중심성’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린 이데올로기 효과이므로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활동이 그 이데올로기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채만수 씨와 같은 소위 정통계급좌파들은 철저하다. 지금도 많은 영역 운동을 부문운동으로 절하하고,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으므로.)
다시 조금 앞으로 돌아가서, 이런 노동자 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경제결정론이 옳은 이론인가라는 물음과 맑스주의를 정초한 ‘과학’은 객관적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 우선 후자에 대해서 언급하면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라는 인식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과학은 당파적인 지식이고, 병렬적으로 성립하는 A와 B명제가 있을 때, 어느 쪽에 시선을 집중하는가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다. (예를 들어 질병의 감소는 의료기술의 발전이나 상수도 보급률 향상과 상관관계가 있다. 역사적인 증례에서 실제로는 상수도 보급률이 높아지는 것이 더욱 획기적으로 질병을 감소시켰지만, 시선은 거의 언제나 의료기술의 발전에 따른 질병감소에 맞춰진다. 물론, 의료기술이 발전했을 때 질병이 감소할 가능성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 적절한 예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예를 들긴 했는데, 이게 또 의료기술의 발전이 질병감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 사실인 것을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다 해서 그것이 이데올로기 편향에서 자유운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리 앞에서는 그 목적과 과정을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다.(역사발전5단계론이라든지, 이행기논쟁 등이 이를 보여준다.) 맑스주의를 과학으로 포장한 데서 유발되는 그 효과를 들춰냄으로써 노동자 중심성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럴 때, 공산주의를 특정한 상태로 상정하는 운동의 양태 또한 결정론적인 명제를 택하는데서 비롯되는 편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 뒤집어 어떠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역사의식이 결정론적인 편향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 독일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제안한 것은 전자의 부분이다. 전자와 후자가 독립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 조금 더 방점을 찍겠다는 의미이다. 경제결정론을 성립하게 하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이 모든 재화를 생산하고 그곳에서 가치가 만들어진다는 전제가 있었다. 상품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노동’이라고 보는 것이 ‘노동가치론’이다. 계속 반복하듯이 A라는 명제가 옳다고 해서, 그것을 선택하는데 이데올로기 편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현상들을 드러내는데 매우 적합하고, 타당하지만 그것에 가려지는 또 다른 명제가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원천은 오로지 인간의 노동이므로,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자연의 요소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되고,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가 직접 지적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이 존재하고, 감춰져 있는 그것을 열어제낌으로서 결정론적․목적론적 역사관을 깨트리고 끊임없는 변화로서 현실의 운동을 만들 수 있게 한다.
마르크스와 나는 때때로 젊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경제적인 측면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곤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설정한 주장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상호 보완해서 생각했ㅇ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부수적인 요소까지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상호 연관성의 다른 요소에 계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나 장소 또는 정확한 시간에 대하여 한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 엥겔스 1890년 9월 21일 J.Bloch에 보낸 편지
그럼 왜 노동을 다시 보려 하는가? ‘노동이 원래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본질과 기원에 집착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원래 ‘노동’이 어떠한 것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호출한다. 마주침의 유물론은 이런 질문을 폐기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세상과 활동을 지지해줄 가치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는 공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키아밸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에 대한 가치편향은 비단 운동 안에서 동심원 구조를 만들어 내고 운동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운동의 역할을 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제기의 바탕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이 독자적으로 존재해서, 그것만 극복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버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양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생산이 필요한데, 그 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질문한다.(전투적 남성노동자들의 집회는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으로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에 주체화 양식이 포함된다. 또 다른 방식의 답으로,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동일성에 포함되지 못한 누군가를 배제하고, 동일성에 포섭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주목하고, 자본주의보다 이전에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동일성의 기준은 노동에 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을 나눠, 노동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하지 않은 채 배제적으로 통합한다.
이럴 때, 노동에 대한 긍정적 가치관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혹 근대성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운동 안에서 언급되는 ‘위대한 노동’은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내면화하도록 요구하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변혁’운동이 해왔던 활동은, 겉으로는 자본의 이윤률을 일정정도 제한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안정적인 노동력의 공급을 담보하고, 동일성의 원리를 작동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더욱 공고히 돌아가도록 돕는 것은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온의 존재가 매트릭스의 오류를 수정해 매트릭스를 유지시키기 위한 존재였던 것처럼. 이것은 현대 사회를 면밀히 분석해서 이끌어 내야한다.
한국사회는 97-98년 대규모 정리해고를 통한 노동의 유연화를 관통하면서, ‘노동-거부’에 대한 제기가 조심스럽게 출현했다.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통해 보장노동자들이 형성되는 과정은, 노동을 해야 생존을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 생각을 보편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정리해고에 대한 보장노동자집단의 요구는 이미 보장받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정리해고반대’라는 구호가 도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요구들에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자리가 사라지고, 이렇게 배제된 영역을 만드는 것은 동일성의 정치를 유지시킴으로서 자본주의를 작동케 하는 근대성을 강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더 노동에 포섭시킴으로써 자본의 잉여가치율에 보탬이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한 활동이어야 한다면, 그 활동은 자본이 강요하는 노동으로의 포섭을 벗어나는 방식일 수 있지 않을까?
1. 노동-다시보기 의의와 목표
- ‘노동’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양태와 자본주의와의 연관성을 밝혀낸다.
-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있는 실천에서 가능한 의제와 현실태를 발굴한다.
2. 쟁점을 논의하고 제기하기 위해 갖춰져야 할 내용
-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가치가 생성되고 교환되는 방식 일반에 대한 이해(특히 잉여가치에 대해)
- 노동의 다양한 양태와 성격에 대한 이론들(생산적 노동 - 비생산적노동, 물질노동 - 비물질노동 등에 대한 그간의 논의들)
- 이와 관련해 현실에서 만들어졌던 운동의 구체적 사례들
첨언하면, 현실 운동에 대한 논의의 전거를 마르크스에게서 끌어내고 검증받으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물론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파헤친 마르크스의 언급에 귀중한 가치가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00년 전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활동에서 요청되고 검증된 것이다.
3. 고민 이후 착목해야 할 구체적 과제
- 비정규노동을 비롯한 노동의 유연화에 대응하는 이데올로기의 구성
- 대학사회의 자기계발 및 경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그것이 가지는 자본의 노동으로의 포섭전략 폭로
- 여러 영역의 운동이 만날 수 있는 구체적 보루로서 탈-노동 전선의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