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에 나온 반-노동선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제
이글을 소개하는 분의 약간의 설명
참고 (이 글은 몇 가지 점에서 이론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고 또 그것 때문에 적지 않은 비약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드물게 눈에 띄는 좋은 글로 반드시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노동의 부정적 측면, 즉 자본의 대립물로서의 노동,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생산자로써의 노동의 측면을 지적하면서 ' 노동의 해방'이 아닌 '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고타강령비판에서도 맑스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자유(혹은 노동의 해방)란, 아무 제약 없이 더 많은 사람들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임노동의 자유 혹은 해방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것은 자본가의 구호는 될 수 있어도 노동자당의 구호는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를 지향하는 청년진보당의 강령에서 흔히 '노동 해방'이라는 문구를 목격하는 데, 누구나 노동할 수 있는 자유, 누구나 자본의 노예로 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원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실제로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정책은,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그 실현 가능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바로 모든 노동자가 자본의 노예로 될 권리를 주장하는 정책에 다름 아닙니다. 원래는 역사적으로 제1인터네셔널에서는 '노동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노동 없이도 자기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인간 활동으로서 노동으로의 자기 회복, 삶의 1차적 기쁨으로써의 노동으로의 회복, 소외된 노동의 자기 부정, 임노동의 자기 부정 등의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의 진정한 자신으로의 복귀는 '부정의 부정'의 과정으로 묘사될 수 있겠습니다. 즉, 노동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합목적인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물과 생산과정, 이로 인해 형성되는 사회관계가 노동자 자신에게 반대로 낯설고 억압적으로 나타나는 임노동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인간 스스로 이러한 억압적 임노동을 부정하고 진정한 자신으로의 실제적 내용을 가지고 복귀한다는 것을 묘사합니다.